Culture & Hitstory Traveling

Since 2008, Korea & World by younghwan

창녕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사적), 삼국시대 비화가야 지배층 무덤

경남 창녕군 창녕읍에 있는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사적)이다. 창녕에서 밀양으로 가는 20번 국도 옆에 있는 5~6세기 경 비화가야 지배층의 무덤들이다. 창녕도심에서 화왕산 북쪽 고갯길로 연결되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교동 고분군은 국도를 기준을 서쪽을 A군, 동쪽을 B군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특별한 차이는 없다.  송현리고분군과도 큰 차이가 없어 두 고분군이 통합되어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도로 동쪽 높은 곳에 위치한 봉분들은 둘레에 호석을 쌓아 놓은 것이 많고 아래쪽 무덤들에는 호석이 거의 없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도굴에 가까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상당히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창녕지방에 자리잡았던 비화가야는 가야연맹체 중에서 특이하게 낙동강 동쪽에 자리잡고 있었던 세력이다. 가야연맹체의 일원이라기 보다는 신라와 관계가 깊었던 세력으로 여겨지며, 신라의 영향을 받은 각배, 철제무기류 등이 많이 출토된다. 주요 유적지로는 창녕 교동 고분군, 계성동 고분군 등이 있다. 신라 진흥왕이 561년에 이곳에 진흥왕순수비를 세워놓았다.

<창녕 교동 고분군(사적)>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무덤 분포(위성사진)>

창녕 교동고분군 A지구는 창녕박물관 앞  도로 서쪽에 있는 70여기의 무덤들로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봉분의 크기는 다양하며 봉분 주위에 호석을 두르지 않았다.

<창녕 교동고분군 A지구>

<A지구 입구>

<A지구에 있는 가장 큰 무덤>

<남쪽편에 있는 비슷한 크기의 무덤들>

<석실내부을 볼 수 있도록 한 무덤>

<도로 옆에 있는 무덤들>

<A지구 안쪽에 있는 무덤>

<작은 크기의 무덤들.>

<A지남 남쪽편 발굴.조사 작업이 진행중인 곳>

동쪽편에 있는 B지구는 윗쪽에는 봉분둘레에 호석이 있는 무덤들이 있으며 아래쪽 무덤들은 호석이 없다.

<교동고분군 B지구>

<B지구 입구 (12호 무덤)>

<봉분의 크기가 가장 큰 7호 무덤>

<11호, 12호 무덤>

<6호 무덤,둘레에 낮은 둘레석이 있다.>

B지구 위쪽으로 올라가면 봉분을 둘레석으로 둘러싸고 있는 무덤을 볼 수 있다. 둘레석이 있는 무덤은  신라 왕릉에서 볼 수 있는데, 신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둘레석이 있는 무덤>

<B지구 위쪽에 있는 무덤들, 1~5호 무덤 등>

<B지구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는 무덤(2호)>

 관식은 관의 앞에 끼우는 장신구로 금이나 은으로 만들어졌으며, 주로 새 깃털이나 나비모양을 하고 있다. 이런 관식은 관모와 함께 착용자의 신분을 과시하는 대표적인 위세품이다. 신라 경주에 출토된 유물들과 비슷하다.

<관식, 창녕 교동, 김해박물관>

<관식, 창녕 교동>

허리띠 장식은 천이나 가죽에 금속으로 만들어진 장식품을 붙여 만들었다. 변진한에서는 호랑이나 말모양의 띠고리가, 삼국에서는 화려하고 복잡한 무늬를 장식한 것이 유행하였다.

<은허리띠, 창녕교동, 김해박물관>

은허리띠는 신라 고분에서 금관과 함께 출토된 허리띠와 비슷한 형식이다.

<은허리띠. 창녕 교동, 김해박물관>

<금귀걸이, 창녕 교동, 김해박물관>

각배로도 불리는 유물로 중앙아시아 유목민들로부터 전해진 문화이다. 신라지역에서 주로 출토되는 비화가야가 가야연맹체보다는 신라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청동뿔잔, 창녕교동, 김해박물관>

뿔모양잔(각배)
뿔잔은 문자 그대로 소나 코뿔소 등 짐승의 뿔을 잘라 술과 같은 음료를 마시던 습관에서 유래된 것으로 점차 토기나 금속, 상아, 옥 등으로도 만들어지게 되었다. 처음 만들어진 것은 기원전 2,000년경 이란에서부터였다고 알려져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삼국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4대왕인 석탈해가 아직 왕위에 오르지 않았을 때 토함산에서 내려오면서 심부름꾼을 시켜 마실물을 떠오게 하였는데 심부름꾼이 몰래 먼저 물을 마시자 뿔잔이 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아 이를 꾸짖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까지 출토지가 알려진 뿔잔은 그리 많지 않지만 대체로 경주를 중심으로 신라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김해, 부산, 창녕, 달성 등에서 출토된 것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안내문, 김해박물관, 2012년)

<청동합, 창녕 교동, 김해박물관>

<청동자루솥, 창녕 교동, 김해박물관>

<환두대도, 관모, 모형철기, 물미. 창녕박물관>

<말안장, 창녕 교동, 김해박물관>

<종형행엽, 교동11호분, 창녕박물관>

<금동말띠꾸미개, 재갈, 창녕박물관>

<금동말띠꾸미개, 창녕박물관>

<재갈, 띠고리, 창녕박물관>

<청동말종방울, 청동방울, 창녕박물관>

<자귀, 낫, 창녕박물관>

<장경호, 창녕박물관>

<인화문병, 유개합, 창녕박물관>

<그릇받침, 창녕박물관>

<손잡이바라, 굽다리접시, 김해박물관>

창녕 교동고분군,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리
창녕읍 북쪽 교동의 창녕박물관 일대에 무리지어 있는 가야시대의 고분군이다. 창녕에서 밀양으로 가는 24번 국도에 의해 동서의 2군으로 나누어져 있다. 서쪽의 70여 기를 A군으로, 동쪽 80여기를 B군으로, B군의 남쪽 송현동 고분군을 C군으로 나누기도 한다. 일제시대에 송현동 고분군의 일부와 함께 10여기정도가 발굴되었는데, 출토유물이 마차 20대와 화차 2량에 싣고도 남을 정도였다고 한다. 1992년 2월부터 6월까지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B군의 1~5호분을 발굴조사 했다. 도굴의 피해가 심해 만족스런 성과는 아니었으나, 교동고분군의 대략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일제시대에 밝혀진 약간의 내용과 아울러 확인된 고분군의 특징은 아래와 같다.
첫째, 고분의 돌방은 세 벽을 쌓고 한 쪽 짧은 벽을 입구로 매장했던 앞트기식돌방 무덤이 대부분이다. 둘째, 봉토 언저리에 호석이 돌아가는 것이 많고, 호석 밖으로 나무기둥을 세워 봉토를 방사선식으로 구분하여 다졌다. 셋째, 5~6세기경에 축조된 무덤이 고분군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넷째, A군 최대의 7호분은 5세기 중엽 경으로 생각되는데, 출자형 금동관.은제띠고리.청동그릇 등이 출토되어 신라적 색채를 나타내고 있다. 가야세력이 신라에 편입되어 가는 모습을 짐작케 한다. 다섯째, A군 11호분에서는 금으로 글을 새긴 고리자루큰칼이 출토되었다. 신라를 통한 고구려와의 교류를 짐작케 하는 내용으로 해석되고 있다. 교동고분군은 비화가야 왕들을 묘역으로, 비화(比火)는 ‘빛들-빛이 좋은 들’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안내문, 창녕군청, 2010년)

송현동 고분군(사적)은  창녕읍에서 화왕산으로 올라가는 골짜기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교동고분군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에 의해 도굴에 가까운 발굴조사가 있었는데 보고서는 남아 있지 않으며 발굴된 유물들은 일본으로 반출되어 찾을 수 없는 형편이다.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사이에는 농경지로 바뀐 곳이 많아 두 지역이 분리된 것 처럼 보인다.

<송현동 고분군>

<이곳에서 내려다 보이는 교동고분군(A지구)>

<교동고분군(A지구)에서 보이는 송현동고분>

교동교분군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농경지 등으로 훼손되어 지금은 봉분 형태가 남아 있는 큰 무덤들만 17기 정도 확인되고 있다. 봉분 주위에 호석으로 둘러져 있는 무덤과 그렇지 않은 무덤들이 섞여 있다.

<큰 규모의 봉분들>

<1호 무덤>

<2호 무덤>

<3호 무덤>

<4호 무덤>

<5호 무덤>

<뒷편에 있는 무덤>

<쌍분처럼 보이는 무덤>

창녕 송현동고분군, 경남 창녕군 송현리
창녕박물관 남쪽에서 목마산 쪽으로 무리지어 있는 가야 시대 고분군이다. 원래 80여 기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17기 정도의 봉토분이 확인되고 있을 뿐이다. 일제시대에 89.91호분이 발굴되어 엄청난 양의 유물이 반출되었고, 2000년 2월부터 6월까지 경남문화재연구원에서 현황파악을 위한 지표조사를 실시하였다. 일제시대의 정식 발굴보고서가 나오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축조시기, 무덤형식, 부장유물 등에서 북쪽에 인접한 교동고분군과 비슷할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지름 20 m정도의 대형무덤(1~7호분, 15호분)은 구릉의 높은 줄기를 따라 배치되었고, 소형무덤(8,9,11~14호분)은 합쳐져 표주박 모양으로 보이고 있다. 교동고분군과 마찬가지로 비화가야의 왕릉과 지배층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지만, 일제의 파괴, 그리고 후대의 경작과 도굴로 인한 피해가 극심하다. (안내문, 창녕군청, 2010년)

<출처>

  1. 안내문, 창녕군청, 2010년
  2. 안내문, 창녕박물관, 2010년
  3. 안내문, 김해박물관, 2012년
  4.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