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 앞바다 작은 섬인 장도에 있는 청해진 유적(사적)이다. 중국와 일본을 잇는 한반도 서남해안 연안항로의 주요 거점으로 통일신라 때 장보고가 해상무역을 장악하기 청해진을 설치한 곳이다. 지금도 이곳에서는 장보고를 기리는 제사(완도 장좌리 당제 및 당굿)를 올리고 있다.
장도는 육지에서 멀지 않은 작은 섬이다. 발굴.조사 결과 판축식 토성을 쌓았으며 둘레는 약 890 m이다. 서남쪽에 출입문인 외성문과 우물이 있으며, 안쪽에 내성이 있다. 섬과 육지사이는 수심이 얕아 걸어서 왕래할 수 있으며 방어력을 보완하기 위해 섬주위에 목책을 쌓았다. 동쪽 정상부에 올라서면 남쪽 신지도와 완도읍 사이, 동쪽 신지도와 고금도 사이 바다와 북쪽 강진만이 한눈에 들어온다.
<완도 청해진 유적지(사적)>
장보고가 청해진 설치하고 요인이 있어 유배보내다 ( 828년 04월(음) ), 〔3년(828)〕 여름 4월에 청해대사(淸海大使) 궁복(弓福)은 성이 장씨(張氏)이고 일명 보고(保皐)라고도 한다., 당 서주(徐州)註 003로 건너가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되었다가, 나중에 귀국하여 왕을 뵈었으며, 부하 10,000명을 거느리고 청해에 진(鎭)을 설치하였다 청해는 지금의 완도(莞島)이다. ~ 생략 ~ (삼국사기, 권 제10 신라본기 제10 흥덕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통일신라 말 장보고가 근거지로 삼았던 청해진 유적지(사적)는 장도라 불리는 작은 섬으로 육지와 붙어 있어 썰물 때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섬과 육지 사이의 좁은 수로가 해자 역할을 하고 있으며, 섬 바깥에 목책을 설치하였다.
<청해진 유적지와 육지를 연결해 놓은 다리>
외성문. 청해진 성의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외성문은 성의 내외를 연결하는 통로로 유사시 적의 공격을 저지하고, 적을 역습하거나 격퇴하는 통로이다. 외성문 앞에는 식수를 공급하기 위한 우물이 있었고 그 주위 판축으로 성벽을 쌓아 우물을 보호하고 있다. 성벽은 외성문과 우물을 보호하기 위한 옹성 역할을 하고 있는데 청해진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시설이다.
<외성문>
<‘ㄷ’자형 판축유구와 우물>
청해진 성의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ㄷ’자형 판축유구는 해안 구조물로서 국내는 물론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그 유례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ㄷ’자형 판축유구는 우물을 보호하고, 외성문을 보완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우물은 잔존깊이 5.8 m이며, 이곳에서는 주름무늬 병과 철제편 등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안내문, 완도군청, 2018년)
성벽은 흙을 쌓아 만든 판축 토성이다. 전체 성벽의 둘레는 890 m 정도이다.
<외성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성벽>
<성벽을 쌓은 판축.>
청해진이 성벽은 판축법으로 만들어졌다. 판축이란 흙으로 기초 및 성벽을 쌓는 방법 중 하나로 돌을 판판하게 깔고 그 위에 흙을 고르며 다져가는 공법을 말한다. 청해진 성은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능선을 따라 축조하였으며, 성의 규모는 둘레 길이가 890 m이다. 성벽은 좌우 내.외측에 기단석렬을 깔고 기단석렬을 맞물린 상태에서 그 안쪽으로 흙을 시루떡처럼 다져 쌓은 판축토성이다. (안내문, 완도군청, 2018년)
청해진은 외성문과 내성문을 두어 방어력을 보완하고 있다.
<외성문 안쪽 중턱에 위치한 내성문>
<내성 성벽과 내성문>
성의 남쪽 높은 지점에 고대(高臺)를 설치했다. 바깥쪽 바다에서 들어오는 선박을 감시하기에 좋은 곳에 위치하고있다.
<성의 남쪽 높은 지점에 위치한 고대(高臺)>
동서로 이어지는 청해진 남쪽, 성벽의 높은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청해진 성의 고대는 동쪽, 북쪽, 남쪽 3곳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일본과 중국 등 외국에서 내륙으로 통하는 길목으로 연안의 상선과 해적을 감시하기 유리한 곳이다. (안내문, 완도군청, 2018년)
고대를 지나 동남 치로 이어지는 성벽은 비교적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동남쪽 모서리에 있는 동남 치(雉)는 남쪽 바다와 완도읍 일원을 조망하고 있으며, 바깥쪽 바다에서 안쪽으로 들어오는 배를 살피는 기능을 하고 있다.
<동남 치로 이어지는 성벽>
<동남쪽 모서리에 위치하고 있는 동남 치(雉)>
동남 치 남쪽으로는 완도읍과 신지도를 연결하는 신지대교가, 동쪽으로는 신지도와 고금도를 연결하는 장보고대교가 보인다. 강진만으로 들어노는 선박들을 한눈에 감시할 수 있다.
<동남 치에서 내려다 보이는 남쪽바다>
<동쪽으로는 보이는 장보고대교>
<동쪽으로 이어지는 성벽>
<성벽 아래로 보이는 바다>
동쪽 섬 정상부는 평탄한 지역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는 장보고 등을 모시는 사당이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 아침 동이 틀 무렵 이곳에서 당제(완도 장좌리 당제 및 당굿)를 지낸다. 모시는 신격으로는 장보고, 송징, 정년, 혜일대사 등 네 분이다.
<섬 동쪽 정상부>
건물터는 굴립주(堀立住)라고 부르며 사당 북쪽과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굴립주는 기초를 놓지 않고 땅에 기둥을 박아 세운 건물이며, 주변 해역과 완도 본 섬을 조망할 수 있었던 시설이다.
<사당 남쪽편에 있는 건물터>
<사당 북쪽 건물터>
<사당 앞 성벽>
청해진 북쪽에 위치한 북치(雉)는 인근 강진, 해남쪽에서 들어오는 배들을 감시하고 주변을 조망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청해진 북쪽에 위치한 북치(雉)>
<북치에서 내려다 보이는 강진만 바다>
<북쪽을 따라 이어지는 성벽>
<성의 북서쪽 모서리에 위치한 서북치>
<서북치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성벽>
<서쪽 성벽에서 올려다 보이는 내성문과 고대>
<섬의 서쪽 수로를 감시하기 위해 세워진 서치>
<서쪽 성벽>
<성벽 아래 해안에는 목책을 쌓아 방어를 보완하였다.>
완도 청해진 유적, 사적, 전남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
신리 흥덕왕 3년(828) 장보고는 서남해안의 중심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하였다. 이후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제패한다’는 신념으로 청해진 본영을 중심으로 한민족의 기상을 떨치며 해양을 개척하였다. 장보고는 한국과 중국, 일본을 연결하는 장대한 해상항로를 개척하였으며, 청해진을 본거지로 중국과 일본을 잇는 중계무역을 실시하고, 이슬람 세계와도 교역한 아시아 최초의 민간 기업인이자 세계적 무역왕이 되었다. (안내문, 완도군청, 2018년)주요 발굴성과 (1991 ~1998년)
- 판축기법으로 이루어진 890 m에 달하는 성벽과 내부 건물지, 굴립주 건물지, 매납유구 등을 확인하였으며, 331 m에 달하는 해안 원목렬의 분포 범위 확인과 함께 총 3만여 점이 넘는 많은 유물을 발굴하여 장도가 청해진의 주요 근거지였음을 밝혀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 매납유구는 직경 1 m, 깊이 150 cm 정도의 원형 구덩이 안에 인위적으로 유물을 매납한 제사와 관련된 유구이다. 수혈 중앙의 가장 바닥에 회청색 경질 대옹을 바로 안치하고, 대옹과 수혈벽 사이에 토기편병 2점.철제 솥 2점.한 개체를 반으로 절단하여 각각 나누어 묻은 철제반 1점.청동병 1점.철제 자물쇠 등의 철기류를 매납하였다. 이들 유구와 유물은 청해진 조음도에서 중사(中祀)를 거행했다는 「삼국사기 권32잡지 1 제사조」의 기록과 견주어 검토해 보아야 할 자료이다. 또한 국가 제사인 중사가 지내졌던 장도 유적은 청해진 내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주요 발굴 성과 (2, 3차 발굴: 1999 ~ 2001년)
- 7차 발굴조사에서는 장보고의 해상활동과 관련된 해안 출입 겸 접안시설로 ‘ㄷ’자형 석축석렬 유구와 우물 등 중요 유구들을 발굴하여 청해진의 본영이 바로 이 장도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자료를 확보하게 되었다.
- 8차 발굴조사에서는 섬 입구 해안지대에서 노출 된 ‘ㄷ’자형 석축석렬 유구와 우물의 구조에 대한 조사를 마무리 지어 그 구조를 파악하였으며, 그 앞의 바다 해저 면에서 기존에 이미 알려져 있던 원목렬과 나란히 또 하나의 목책렬이 지나가고 있음을 새로이 확인하였다. 그 외에도 성벽에 나 있는 배수구를 처음으로 발굴조사하였고, 청해진의 판축토성 성벽이 내외측 모두 2중 기단 석렬을 깔고 조성한 것도 함께 밝혀냈다. ‘ㄷ’자형 석축석렬 유구는 21 x 22 m 정도의 규모로서 내외측에 기단 석렬을 깔거나 석심을 쌓고, 그 사이에 판축다짐을 하여 만든 해안 구조물로서 국내는 물론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그 유례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물은 깊이 6 m로 바닥에는 통나무를 ‘井’자형으로 깔아 기초를 잡고 그 위에 석축을 쌓아 만들었는데 위가 좁고 (직경 150 cm 내외) 중간이 약간 넓어지다가 (직경 180 cm 내외) 바닥은 다시 좁아지는 모양이다. 우물의 바닥에는 자갈을 약 50 cm 두꼐로 깔아 물을 정화할 수 있게 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이 우물 바닥에서는 사면편병, 주름무늬 병 등의 토기류와 재갈편, 철제자귀, 금제고리 등의 금속제 유물과 어망추, 가락바퀴, 숫돌 등의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다. 특히 이곳에서 출토된 편병류는 구연부만 파손된 채 4점이 나란히 깔려 있어 우물을 축조할 때에 의도적으로 매납한 것이 분명하다고 보여 지며, 이는 우물의 축조 및 사용 시기가 청해진 성의 축성 및 운영시기와 동일하였음을 증명한다. 또한 깊이 6 m의 이 우물은 청해진 뿐만 아니라 항해하는 장보고 선단의 주요 식수원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도 서쪽 저지대에서는 성벽의 사이에 좌우 양쪽으로 석축을 하여 막음을 하고, 바닥에는 판석을 깔고 그 사이에는 잡석을 채워 물이 스며들게 하는 암거식 배수구가 조사되었는데 입구가 깔대기 모양으로 되어 있어 물이 잘 모여들게 하였다. 이러한 구조는 판축토성의 배수방법과 관련된 대단히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주요 발굴 결과
- 완도 청해진 유적에서 발굴조사 된 수 많은 유구와 유물들을 장보고의 해상 활동의 근거지로서의 청해진의 실체를 규명하는 기초 자료가 될 것이며, 특히 절대연대가 9세기 전반인 많은 유물들은 앞으로 통일신라시대이 ‘표지유물’로서의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안내문, 완도군청, 2018년)
<출처>
- 안내문, 완도군청, 2018년
-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 삼국사기, 권 제10 신라본기 제10 흥덕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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