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tstory Traveling

Since 2008, Korea & World by younghwan

강진 백련사 사적비(보물)

전남 강진군 도암면 백련사에 남아 있는 사적비(보물)이다. 거북받침돌, 비몸, 머릿돌로 구성된 높의 447 cm 의 전형적 형태의 비석이다. 거북모양을 하고 있는 받침돌은 고려시대에. 비몸과 머릿돌은 조선후기 숙종 때 만들어진 특이한 내력을 가진 비석이다. 거북받침돌은 용의 얼굴을 하고 있는 형태로 입체감있게 조각된 고려전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몸돌과 머리돌은 조선후기 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

거북받침돌은 고려중기 백련결사 운동을 이끌었던 원묘국사비를 받치던 것을 다시 사용하였다. 비문의 작성에는 숙종 관리 등을 지낸 지역 유력인사들이 참여하였는데 백련사의 중수, 원묘국사의 행적, 백련결사의 내용 등이 적혀있다. 조선후기에 조성된 비석 중에는 그 규모가 크고 조각수법 또한 뛰어난 편이다.

<백련사 사적비(보물)>

고려중기 백련결사를 이끌었던 원묘국사비에 사용되었던 거북받침돌 위에 조선후기에 사적비를 세워 올렸다.

<백련사 사적비(보물)>

비석은 용머리를 한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과 머릿돌을 얹은 전형적인 탑비의 형태를 하고 있다.

<거북받침돌>

원묘국사비에 사용되었던 것을 조선후기 사적비를 세우면서 재사용하였다. 힘찬 기상과 섬세한 조각수법이 돋보이는 고려전기 거북받침돌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등에는 당초문을 조각해 놓고 있다.

<옆면에서 본 거북받침돌>


<조선후기에 만든 몸돌과 머릿돌>

당시 지역 유력자들이 참여하여 비문을 짓고 글씨를 적었다. 내용은 백련사를 중건하게 된 경위, 원묘국사의 행적, 백련결사에 관한 내용 등의 적혀 있다. 머릿돌에는 겹처마가 서까래가 새겨져 있는 등 조선후기 건축양식이 반영되어 있다.


<비몸 옆면 초화문>


<옆쪽에서 본 모습.>


<뒷편에서 본 모습>

<2010년 비각을 세우기 전 모습>

백련사 사적비, 보물, 전남 강진군 도암면 백련사길
백련사에는 고려 명종 때의 문신 최자(1188~1260)가 지은 원묘국사비 등 여러 개의 석비가 있었으나, 현재는 백련사 사적비만 남아 있다. 이 비는 1681년(숙종 7) 5월에 세워졌으며, 비문은 홍문관 수찬을 지낸 조종저(1631~1690)가 찬하고, 낭성군 이우(1637~1693)가 글씨를 썼으며 동생인 낭원군 이간(1640~1699)이 전서를 썼다. 비문은 모두 19행으로 이루어졌으며 1행은 45자로 구성되었다. 비의 앞면에는 백련사 중수, 원묘국사 행적, 백련결사 등의 내용이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비 건립에 참여한 72명의 승려명과 인명이 음각되어 있다. 비문에 따르면, 백련사에 원래 원묘국사비가 있었으나 이수(머릿돌)와 비신(비의 몸돌)은 유실되었고 귀부(거북이 모양의 받침돌)만 남아 전해졌다고 한다. 이후 백련사 사적비를 세우면서 귀부는 옛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즉 백련사 사적비는 고려시대의 귀부에 17세기 후반의 이수와 비신을 갖추고 있는 셈이며, 1기의 비에서 고려와 조선시대의 양식적 특징을 동시에 볼 수 있는 특수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안내문, 강진 백련사, 2018년)

<출처>

  1. 안내문, 강진 백련사, 2017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