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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박물관] 회화와 서예

광주박물관에는 많지는 않지만 조선후기 전남지방을 대표하는 문인화가들의 그림과 서예작품을 전시해 놓고 있다. <자화상>으로 유명한 윤두서의 아들 윤덕희와 진도출신 문인화가 허련, 화순 출신 송수면의 작품을 볼 수 있는데 작품 수준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보인다. 서예작품으로는 선조대왕의 글씨와 조선후기 문인 임장원의 글씨를 볼 수 있다.

먹으로 그리다
현대의 우리가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등의 기기를 손에서 놓지 않듯이, 옛 문인들은 붓과 먹, 벼루와 종이의 문방사우를 늘 주위에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벼루에 먹을 갈아 붓으로 종이 위에 그린 그림은 우리 전통예술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물을 더해 먹의 농담을 조절하여 그린 수묵화는 우리 선조들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고요하고 단정한 그림입니다. 남도의 전통회화를 대표하는 해남 윤씨 가문의 윤덕희(1685~1766), 조선후기 진도의 운림산방에서 문인화의 맥을 이어간 소치 허련(1808~1893) 등도 먹으로 마음을 그린 그림, 수묵화를 많이 남겼습니다. 흰색과 검은색만으로 이루어진 모노톤의 수묵화는 현대미술 속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장르로 남아 있습니다. 화려한 색과 현란한 기교 없이도 우리의 내면을 보여주는 ‘수묵’의 현대적 의미가 다시금 주목받고 있는 지금, 남도의 전통회화 속에서 수묵화의 정수를 찾아 보고자 합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말그림, 윤덕희, 조선 1742년, 종이에 먹

윤덕희는 해남윤씨 가문 어초은공파의 8대손으로, 국보 240호 <자화상>으로 유명한 공재 윤두서의 장남이다. 갑술환국으로 정치계의 판도가 바뀌자 윤덕희는 일찍부터 벼슬을 포기하고 부친의 뒤를 이어 그림을 그렸다. 그 화업은 아들인 윤용에게까지 이어져 3대에 걸쳐 문인화로 일가를 이루었다. 화면을 가로지르며 용트림하는 소나무와 언덕을 배경으로 한 필의 살찐 말이 고개를 숙인 채 걸어가고 있다. 소나무는 문인의 절개와 장수를 상징하며, 준마는 재사의 인품과 등용을 뜻한다. 윤덕희는 다양한 주제에 능하였지만 특히 이러한 말 그림을 자주 그렸다. 18세기의 한 기록에 의하면, 윤두서는 마르고 날쌔 보이는 말을 그리고 그의 아들은 살찌고 둔해 보이는 말을 그렸는데, 중국인들은 살이 올라 반질반질 윤기가 도는 아들의 말그림을 선호하여 비단을 주고 사 가기도 했다고 한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무이산의 아홉굽이 경치, 허련, 조선 1878년

허련은 19세기 호남이 배출한 주요 화가 중의 한명이다. 진도에서 태어난 그는 늦은 나이에 추사 김정희에게 실력을 인정받아 헌종을 모시고 그림을 그려 보이는 영예를 누렸다.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당하였을 때에는 그를 따라 제주도에 머무르며 그림과 글씨를 익히기도 하였다. 추사의 사후에는 진도로 낙향하여 운림산방을 경영하였다. 이 병풍은 무이구곡의 모습을 그린 것인데, 무이구곡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가 노닐던 중국 무이산 구곡계를 가리킨다. 주자는 그 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자신의 사상을 담아 무이구곡시를 남겼다. 성리학을 숭상한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현인이 거주할 만한 이상향으로 무이구곡을 꼽았고, 그림으로나마 그려 갈 수 없는 그 곳을 가까이에 두고자 하였다. 각 폭 상단에는 주자의 무이구곡시가 적혀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여덟 군자의 모습, 허련 (1808 ~ 1893), 조선 19세기, 종이에 먹

조선후기 문인화가 소치 허련이 그린 팔군자를 병풍으로 만든 것이다. 팔군자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의 네 가지 식물의 상징성을 의인화하여 그린 사군자를 변형, 확대시킨 것으로 연꽃, 소나무, 모란, 파초, 비자 등을 더한다. 이른 봄 추위를 이기고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매화, 깊은 산중에서도 은은한 향기를 멀리까지 퍼뜨리는 난초, 늦은 가을 추위를 견디는 국화, 그리고 겨울에도 푸른 잎을 유지하는 대나무는 절개와 덕, 학식을 갖춘 군자의 정신세계를 함축하여 상징하지만, 여기에 다시 더해진 네 가지 식물은 길상적 의미를 지닌 것이 많다. 특히 모란에는 부귀와 행운, 소나무에는 장수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허련이 그린 팔군자에는 오동나무가 포함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며, 조선말기에 이르면 길상적 의미가 담긴 팔군자를 일반 서민들까지 애호하게 되어 그 그림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대나무, 송수면(1847~1916), 19세기말 ~ 20세기초, 종이에 먹

사호 송수면은 조선말기 문인화가이다. 화순군 남면 사평리에서 나고 자란 송수면은 사평리 앞에 흐르는 천에서 그의 호 ‘사호’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평생을 사평에 머물렀지만 집안 일가들이 벼슬을 하며 거주하던 한양에 머무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의 작품 중 일부는 현재도 서울에 전하며, 생존 당시 이미 이왕가박물관에 소장될 만큼 이름이 있었다. 송수면의 그림 중 묵매와 함께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이 묵죽이다. 오세황의 『근역서화징』에도 대 그림을 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송수면은 조선중기의 대나무 그림을 충실히 따라 그리면서 연습하였다. 그의 대나무 그림이 예스러운 방식을 보이는 것은 이러한 까닭으로 보인다. 이 그림은 다양한 형체의 대나무를 그린 6폭 병풍이다. 각 폭에 두 그루의 대나무를 앞뒤로 배치하였으며, 먹의 농담을 달리하여 원근감을 표현하였다. 곧게 뻗거나 바람에 흔들려 휘어진 모습, 또는 굵고 가는 줄기를 대비시키는 등 대나무의 형태에 변화를 주어 그렸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먹으로 쓰다.
먹으로 쓴 글씨를 소재로 하는 ‘서예’는 예술의 한 장르로 발전한 것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한자문화권 뿐입니다. 한자는 의미에 따라 수없이 많은 형태의 글자가 존재하는 표의문자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달리 표음문자를 사용하는 서양의 ‘미술’ 속에는 ‘글씨’를 예술로 하는 장르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1922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미술공모전이었던 조선미술전람회에서도 본래 동양화, 서양화에 이어 제3부를 차지하고 있었던 ‘서예’는 오랜 논쟁 끝에 동양화 부문에 흡수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추상적 사고를 눈에 보이는 형태로 표현한 글씨는 인간의 내면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으로, 특히 한자를 사용해 온 동아시아의 사람들에게 글씨를 아름답게 쓰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한때 부정되었던 서예가 추상미술의 한 부분으로 다시금 주목받게 된 것은 본래 먹으로 쓴 글씨가 가지는 의미와 중요성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선조대왕의 글씨, 조선 1632년

여덟 폭 폭으로 이루어진 이 병풍은 선조의 글씨를 새겨 찍어낸 판본을 보고 다시 찍은 것이다. 각 폭은 선조가 당시 가운데 좋아하던 시구를 적어 놓은 것으로, 위응물, 맹호연, 장적, 한악 등이 지은 오언시로 이루어져 있다. 초서의 각 글자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서 쓰는 연면초로 쓰여져 있다. 마지막 폭에는 의장군의 집에 보관되었던 어필의 판본을 다시 찍어내게 된 경위가 기록되어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스스로를 훈계하고 맹세하는 글, 임장원(1734~1804), 조선 1800년, 종이에 먹

1800년에 임장원이 지은 잠을 행초로 쓴 여덟 폭 병풍이다. 잠이란 한문 문체의 하나로, 경계하는 뜻을 서술한 글이다. 이는 임장원이 자신을 반성하고 후손에게 교훈을 전하기 위하여 쓴 글을 병풍으로 만든 것이다. 규암 임장원은 전라남도 보성 옥평 출신으로 40세에 이르러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 지방에서 급제하는 선비들이 드물었던 사실과 이후 그가 몸담았던 중요 직책을 감안하면 그의 학식이 매우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20년 가까이 직접 임금에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간관으로 활동하면서 정조를 보필하였다. 이 병풍을 포함하여 그의 기개와 철학이 담긴 <규암집>, <규암만경>, <삼도선생행장> 등은 장흥 임씨 문중에 의해 국립광주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출처>

  1.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