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백제 견훤이 전주에 도읍을 정하기 전까지 호남지방을 수도로 삼은 국가는 없었지만, 삼한 중 마한이 이 지방에 터를 잡고 살았으며, 위만에 쫓겨난 고조선 준왕의 세력이 내려왔으며 삼국시대 백제 무왕이 익산에 별궁을 세우는 등 호남지방에 큰 관심을 가졌었다. 후삼국시대 견훤이 호남지방에 자리를 잡고 삼국이 세력을 다투면서 지역이 결집하고 정체성이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
금동제사리외호, 백제 익산미륵사지 서탑, 국보
‘전라도’ 이전의 전라도를 일군 사람들
전라도에는 후기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청동기.초기철기 시대에 들어서면 삼한 중 마한의 세력이 이 지역까지 미쳤고, 같은 시기 고조선의 준왕이 내려와 새로운 문명을 전해주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백제의 무왕이 전라도 경영에 관심을 가지면서 또 한번 새로운 문명이 유입되어 이 지역 문화는 더욱 다채로워졌습니다. 오랜 세월 왕조의 수도가 번창한 적이 없는 곳이었지만, 10세기 초 견훤의 후백제 건국은 이 지역에도 하나로 결집될 수 있는 문화적 공동체가 존재하였음을 보여줍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인골, 기원전 1세기경, 광주 신창동
가장 오래된 전라도 사람
천년전, 이 땅이 ‘전라도’라 불리기 훨씬 이전부터 사람들은 이곳에서 ‘전라도’를 일구어 왔습니다. 전라도 각지의 발굴 현장에서 종종 발견되는 인골들이 바로 그들일 것입니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인 여수 안도패총에서 출토된 부부의 인골, 기원전 1세기 광주 신창동 유적지에서 출토된 여성의 인골 등은 지금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전라도 사람입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한국식 동검, 청동기.초기철기시대, 익산 평장리
전한경, 청동기.초기철기시대, 익산 평장리,
익산 평장리의 널무덤에서 한국식동검 2점과 청동꺾창 1점 청동투겁창 1점과 함께 발견되었다. 거울은 초엽문과 반리문이 중심이 된 ‘운문지사엽사리문경’으로 전국말에서 한나라 초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시기에 고조선의 준왕이 위만에 쫓겨 남쪽으로 내려왔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0
청동꺾창, 청동기.초기철기시대, 익산 평장리
한국식 투겁창, 청동기.초기철기시대, 익산 평장리
중국식 동검, 청동기.초기철기시대, 완주 상림리
옹관, 3세기 후반 ~ 6세기 전반, 전남 영암
금제사리봉영기, 백제, 익산 미륵사지 서탑, 보물
익산 미륵사지 서탑에서 발견된 사리갖춤 가운데, 기해년(639)에 백제 왕실의 후원으로 미륵사를 창건한 내용이 기록된 금제사리봉영기이다. 백제 무왕의 세력이 전북 익산까지 남하하였음을 증명해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금제판, 백제, 익산 미륵사지 서탑, 국보
금제구슬, 유리구슬, 금제 꽃모양구슬, 백제, 익산 미륵사지 서탑, 국
청동합, 백제 익산미륵사지 서탑, 국보
은제관꾸미개, 백제 익산미륵사지 서탑, 국보
금제사리내호, 백제 익산미륵사지 서탑, 국보
금제사리함, 백제, 익산 왕궁리 석탑, 국보
백제 무왕(재위 600~ 640)의 궁궐터로 알려진 왕궁리 유적의 오층석탑에서 발견된 금제사리함이다. 이외에 녹색의 유리사리병과 금강경의 내용을 19장의 금판에 새긴 은제도금금강경판이 함께 발견되었다. (안내문,광주박물관, 2018년)
소조상편, 백제, 익산 왕궁리
흙으로 만든 손, 흙으로 만든 악귀 머리, 백제, 익산 제석사지,
흙으로 만든 천부상 머리, 백제, 익산 제석사지,
백제 무왕 때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왕궁리 제석사 터에서 발견된 소조천부상의 머리 부분이다. 절반정도 파손되었던 것을 복원하였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마한의 진왕, 고조선의 준왕 그리고 백제의 무왕
넓은 물길이 바다로 이어지고, 낮은 언덕과 평야가 펼쳐져 농사 짓기에 적합한 전라도에는, 다양한 문명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들어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한반도의 북쪽 지역을 근거지로 하였던 고조선의 준왕이 위만에 쫓겨 남쪽으로 내려와 정착한 곳도 전라도 땅이었습니다. 또한 영산강 주변의 넓은 평야 지대에서는 진왕을 중심으로 하는 마한이 세력을 유지하였습니다. 그들은 한반도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옹관고분이라는 독특한 매장 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백제의 초기 정치 권력은 한강 유역과 충청도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백산맥을 넘어 신라 영역까지의 확장을 노렸던 무왕은 전라도로 눈을 돌려 익산에 별도를 경영하였습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봉림사지 출토 기와와 청자편, 9세기말 ~ 10세기초
봉림사지에서는 전주 동고산성 등 후백제 유적지로 알려진 곳과 유사한 기와편이 출토되었고, 10세기 초 선해무리굽청자완과 중국식해무리굽완이 확인되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진안 도통리 출토 청자편, 9세기말 ~ 10세기초,
진안 도통리 가마는 봉림사지에서 출토된 자기면과 유사한 자기의 생산이 확인되어 후백제 시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순천 해룡산성 기와, 9세기말 ~ 10세기초
익산 미륵사지 ‘금마저’명 기와, 9세기말 ~ 10세기 초,
후백제는 ‘금마저’와 같은 백제의 옛 지명을 사용하여 백제 계층의식을 나타내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전주 동고산성 ‘전주성’ 명 기와, 9세기말 ~ 10세기초.
900년 견훤이 후백제의 새로운 도읍으로 삼은 전주 동고산성에서 발견된 기와이다.
전주 동고산성 기와, 9세기말 ~ 10세기초
나주 자미산성 기와, 9세기말 ~ 10세기초
나주 자미산성 기와, 9세기말 ~ 10세기초
광주 무진고성 기와, 9세기말 ~ 10세기초
부처, 9세기말 ~ 10세기 초, 익산 왕궁리 석탑, 국보 123호
봉림사지 삼존불 중 협시보살상, 10세기, 석재.
봉림사지 석조삼존불의 좌.우협시보살이다. 왕궁리 오층석탑에서 발견된 금동불입상과 유사한 양식적 특징을 보이거나, 6세기 후반 보살상에서 자주 볼 수 있는 x자 천의를 걸치는 등 복고적 요소가 눈에 띄어 ‘의자왕의 숙분을 풀겠다’고 천명한 후백제 정권의 제작이라 판단된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후백제의 견훤
7세기 중반 이후 전라도는 통일신라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나통일신라의 세력이 완전히 기운 9세기 말, 반란 세력을 일으킨 견훤은 광주에서 스스로 후백제의 왕을 칭하고 이어 효공왕 4년(900)에는 전주에 도읍을 정하였습니다. 이처럼 견훤은 매우 짧은 기간에 백제의 옛 영토 대부분을 회복하고 후백제를 건국하였습니다. 이는 오랜 세월 다른 지역에서 발생한 권력의 지배를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던 전라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 이었을 것입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출처>
-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