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영남과 중부지방을 연결하는 교통로 중심지에 위치했던 상주는 일제강점기 경부선 철도를 중심으로 한 교통로에서 소외되면서 지방 소도시로 바뀌었다. 구한말 동학에서 분리된 경천교과 상주 지역에 자리잡기도 했으며 상주공립농잠학교가 설립되면서 근대 농업 발전에 기여하기도 했지만 근.현대사에서는 큰 족적을 남기지는 못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간평등 존중의 정신을 알리다.
19세기 말 외세의 침략, 부패한 정치와 봉건적 신분 질서를 타파하고자 최제우에 의해 창시된 동학은 1894년 동학혁명 실패로 교세가 위축되었다. 이후 3대 교주 손병희는 천도교로 개칭하여 교세 확장에 힘썼다. 그러나 남.북접의 내부적 갈등으로 공주에서 활동하던 김주희는 보은에서 경천교라 하고 1915년에 동학 정신을 계승하는 의미로 동학교라 개칭하였다. 1918년 상주 은척면에 동학교당을 창건하고 1922년 조선총독부의 공인을 받아 동학경전, 가사 등 대대적인 간행사업을 하였다. 또한 이념 위주의 교세 확장에 심혈을 기울여 교세가 경북을 중심으로 충청도까지 미쳤으나, 1936년 일제의 탄압으로 교세가 위축되었다. 상주 동학교당은 일제 식민 통치 하에서 자주적인 발전을 하여 동학 본래의 취지를 계승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동학교당 전시관에는 동학가사 및 책판, 생활용품, 인쇄도구 등 2,000여 점에 달하는 기록유산이 보존되어 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동경대전, 조선시대>
<궁을경, 근대>
상주 동학교주인 김주희가 궁을과 동학의 의미, 천도 회복의 원리, 유도와의 관계, 포덕천하 보국안민 등에 대해 문답식으로 풀이한 동학 경전입니다.
<오행기, 근대, 헌성식 때 사용한 실내기>
<오룡기, 근대, 헌성식 때 사용한 실외기>
<동학가사, 근대>
근대의 상주
1895년 상주목은 상주군, 함창현은 함창군으로 바뀌어 안동부에 속하였다. 1905년 전국을 8도로 정비하였는데, 상주군은 31면에서 22면으로 개편되었다. 1906년 31면에서 의성군에 4면, 문경시에 5면을 넘겨주면서 21면이 되었다. 1914년 상주와 함창이 통합되었으며, 1917년 상주역이 설치되어 여객 및 화물운송을 담당하였다. 1919년 3월 23일 상주장터 만세운동에서부터 3월 29일 이안면 소암리 만세운동, 4월 9일 화북면 운흥리 만세운동에 이르기까지 전후 4회에 걸쳐 일어났다. 이후 민족실력양성운동인 청년운동은 물론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였다. 1921년 상주공립농잠학교가 설립되면서 잠업 등 근대 농업의 근간을 형성하였다. 1931년 읍면제 실시에 따라 상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45년 이후 산업화 및 새로운 교통수단인 철도망이 다른 지역으로 나게 된다. 1980년 함창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86년 상주시와 군이 분리된다. 1995년 상주시와 군이 합하여 도농통합의 상주가 되었다. 대한민국의 중심, 갖지로 연결되는 편리한 도로망은 천혜의 자연을 바탕으로 유구한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 상주를 잇는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 호적부, 상주군 외서면의 1960년 호적부이다.>
<식산은행 상주지점 문서, 1921년>
<상주공립농잠학교 졸업증서, 1940년.>
<상주공립보통학교 가정통신문, 일제강점기>
<상주공립농잠학교 1회 졸업사진첩, 1924년>
<출처>
-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