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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청송도호부 관아, 객사 운봉관(雲鳳館)과 누각

청송도호부(靑松都護府)는 경북 청송군 일대를 관할했던 지방행정조직으로 현재의 청송읍, 주왕산면, 부남면 등을 관할하였다. 경북 내륙 산악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고을의 규모가 크지 않은 고려 때 까지 청부현(靑鳧縣)이 있었는데 세종 때 왕비 소왕후의 관향이라 하여 인근 진보현(眞寶縣)과 통합하여 청보군(靑寶郡)이 설치되었다. 이후 지리적인 이유로 진보현이 분리되고 인근 송생현(松生縣)을 합쳐 청송군이라 했다. 이후 세조는 어머니의 관향인 청송군을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종3품 도호부사(都護府使)가 고을 수령이었으며, 규모에 비해 위상이 높았던 고장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청송심씨 시조 심홍부의 무덤이 읍치에서 2 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청송도호부 관아가 있는 소현공원>

<역대 청송도호부사 공덕비>

청송도호부 읍치(邑治)였던 청송읍 일대는 고을의 중심지이기는 하나 주변에 농경지와 인구가 많지 않으며 진보면소재지와는 약 15 km 정도 떨어져 있다. 산악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읍성(邑城)이나 산성(山城)이 없으며 군사조직인 진보(鎭堡)도 없었다. 관아 건물로는 객사(客舍)인 운봉관(雲鳳館), 동헌(東軒), 향사당(鄕射堂), 누각인 찬경루(讚慶樓, 보물) 등이 있었는데 지금은 운봉관과 찬경루만이 남아 있다.

<청송도호부 객사인 운봉관>

운봉관(雲鳳館)은 청송도호부 관아 객사 건물이다. 건물은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신 정당(正堂)과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된 좌·우익사를 두고 있다. 정당은 앞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동.서익사는 각각 앞면 5칸으로 넓은 마루와 온돌방을 두고 있다. 일제강점기 정당과 서익사는 철거되고 동익사만 남았으나 최근에 고증을 통해 원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국왕의 전패를 모신 정당>

<일제강점기 이후 철거되지 않고 남아 있던 동익사>

<복원된 서익사>

<서익사 마루>

<온돌방>

<동쪽에서 본 운봉관>

운봉관(雲鳳館)
운봉관은 세종 10년(1428)에 청송 군수였던 하담이 찬경루와 함께 건축한 것인데 객사로 사용하였다. 선조(宣祖) 때 한차례 손보고 고쳤으며, 숙종 43년(1717)에 부사 성환(成)이, 순조 12년(1812)에는 부사 강휘옥(革)이, 고종 8년(1871)에 부사 윤현기(尹顯岐) 가 각각 중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객사는 고을에서 가장 권위가 있던 건물이며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나 외국의 사신들이 머무는 공공 숙박의 기능을 한다. 그리고 객사의 중당(中堂)에는 임금의 전패를 모셔놓고 출장 중인 관원과 고을의 부사가 임금께 예를 올렸다. 특히, 이곳 운봉관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이 내린 이후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날 무렵인 1896년 3월 12일에 청송의 유생들이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일으킨 역사적인 장소이다. 이후 운봉관은 일제강점기인 1918년 무렵에 중당(堂)과 서익사가 강제로 철거 되었고, 동익사에 ‘운봉관’ 이란 현판을 달아서 보존하여 왔다. 현재의 운봉관의 모습은 철거지에 대한 발굴조사와 고증을 거쳐 2008년에 중당과 서익사를 원형대로 복원한 것이다. (안내문, 청송군청, 2020년)

찬경루(讚慶樓, 보물)는 세종 때(1428년) 군수 하담이 객사와 함께 관아에 속한 누각으로 처음 세웠다. 관아에서 사신접대나 연회 등을 위해 세운 큰 규모의 누각 건물이다. 청송은 작은 고을이었지만 권문세가였던 청송심씨 관향이었던 까닭에 많은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큰 규모의 건물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건물은 1972년 중건한 것이다.

<찬경루>

<객사에서 본 찬경루>

<찬경루 옆 작은 부속건물>

<출처>

  1. 안내문, 청송군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