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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특별전, 대고려] 고려 왕실 미술

고려는 세계에서 중국 다음으로 제기를 만들었는데 비색청자로 불리며 기술적, 예술적으로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고려시대 미술은 왕실을 후원을 받아 회화, 금속공예, 나전칠기, 자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상당히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비색청자라 불리는 고려청자의 빛깔, 상감기법 청자 등은 독창적이면서 높은 예술적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온 개경이 떠들썩하게
고려의 국가적인 행사에는 볼거리와 먹거리가 풍성하게 제공되었습니다. 제례의 한 절차로 연회(宴會)가 개최되었고, 축제의 일환으로도 연희가 열렸습니다. 궁궐에 조성한 인공 정원과 흥을 돋우는 풍악 소리, 맛있는 음식들, 외국에서 들여온 온갖 진귀한 물건들이 한곳에 어우러진, 왕실의 화려한 취향이 담긴 연회 풍경을 재현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은제 금도금 주자와 받침, 고려 12세기, 은에 금도금, 미국 보스턴박물관>


<꽃모양 접시, 남송 12세기, 은,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은제 금도금 잔과 잔받침, 고려 12~13세기, 은에 금도금, 보물>


<청자 기린장식 향로, 고려 12세기, 개인 소장>


<청자 칠보무늬 향로, 고려 12세기, 개성부근 출토, 국보>


<청자 어룡 모양 주자, 고려 12세기, 국보>


<청자 주자와 받침, 고려 12세기, 개성부근 출토>


<청자 연꽃 넝쿨무늬 주자, 고려 12세기, 이홍근 기증>

<청자 풀꽃무늬 꽃모양 잔과 잔받침, 고려 12세기>

봉은사(奉恩寺)로 향하는 등
밤하늘에 하나둘 작은 등불을 수놓습니다. 왕궁과 개경의 주요거리마다 걸린 등과 화려한 비단 장막을 구경하다보면 고려 국왕의 행렬을 만나게 될니다. 고려에서는 건국 초부터 거의 매해 국가 의례로 등불을 켜는 의식인 연등회를 성대하게 열었습니다. 연등회가 열리면 고려 국왕은 태조 초상이 봉안된 개경 봉은사 행차하여 제사를 올리고 향을 공양했습니다. 연등회는 개경에게 가장 볼거리가 많은 축제였고, 동시에 고려 국왕이 태조 왕건을 뵙고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는 의식이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팔관회(八關會)
팔관회는 하늘의 신령과 오악(五嶽), 명산(名山), 대천(大川), 용신(龍神) 등 토속신께 제사를 지내는 고려 최고의 국가 행사입니다. 고려 국왕은 문무백관과 지방관, 외국의 사신단이 위계에 따라 자리한 행사를 주관하며 고려 국왕 중심의 질서를 만들고, 천자국 고려의 위상을 과시했습니다. 팔관회는 여러 물건이 오가는 교역과 문화 교류의 장이기도 했습니다. 사신과 상인은 다양한 물산을 바쳤고, 하례가 끝나면 그에 대한 답례로 연회가 열렸습니다. 이때 송, 여진, 탐라, 일본 등 각국의 상인과 수많은 고려인이 몰려와 물품을 거래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고려시대는 불교가 중시되었지만 국가를 운영하는 정치, 사회분야에서는 유가사상이 반영된 중국 제도를 받아들다. 북송의 예제를 수용하면서 다양한 예기(禮器)들이 만들어졌다.

<개국공신에게 하사한 잔과 잔받침, 고려, 나무, 보물, 안동 태사묘>

태조 왕건이 안동에서 후백제의 견휜을 물리칠 때 큰 공적을 세웠던 세 인물 김선평, 권행, 장정필의 유품으로 전하는 잔과 받침이다. 공로를 인정받아 각각 개국공신과 태사(太師)란 칭호를 받았다. <옥으로 만든 피리>, <여지무늬 허리띠 장식>도 함께 있었다고 하는데, 피리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 잔의 겉과 안은 모두 주칠(朱漆)을 했고, 굽과 가장자리에는 흑칠(黑漆)을 했다. 잔과 받침의 형태가 개성부근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하다. 목제보관함도 함께 전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청자 이룡무늬 잔 받침, 고려, 영국 피츠윌리엄박물관, 청자 용무늬 잔 받침, 고려, 개성부근 출토>

잔을 받치는 받침으로, 두 잔 받침의 형태나 문양구성이 비슷하다. 잔대 아래에는 음각으로 새긴 뇌문(雷紋)이 펼쳐진 손잡이 부분에는 도마뱀처럼 생긴 독특한 형태의 이룡(驪龍)이 새겨져 있다. 이룡무늬는 고려청자 일부 기종에서만 드물게 발견된다. 대부분 양질 청자인 점으로 보건대 왕실 및 귀족의 한정된 계층에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왕실의 제사 공간에서 차를 담는 용기로 사용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으며, 특별한 용도로 제작된 작품으로 생각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1. 잔과 잔받침, 고려, 개성부근 출토, 녹니석, 2. 잔과 잔받침, 고려, 녹니석>

돌로 만들어진 고려의 예기
차(業)나 술을 담을 때 사용하는 잔(또는 완)과 받침으로 구성되어 있다. 돌(石材)로 그릇을 만드는 것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매우 귀중하게 여겨졌다. 『고려사』에는 예종이 서경(지금의 평양)을 방문했을 때 반룡산에서 보옥을 발견하였는데, 옥장(玉匠)에게 명하여 제기를 만들어 태묘(太廟)에서 관제(標察)를 지낼 때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희소성과 미적인 가치를 동시에 지니고 있어서 왕실 의례를 위한 예기로 추정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청자 도철무늬 향로, 고려 12세기, 개성부근 출토>

고려에서는 성종 대부터 본격적인 예제(禮制) 개혁을 시작하여 의종 대 상정고금례(詳定古今禮)를 완성한다. 북송의 예제를 수용하고 북송에서 보낸 제기를 받기도 하였다. 예제 개혁은 체계적인 국가 통치기반을 세워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려 향로의 문양이 중국 청동기에서 가장 높게 평가되는 상대 후기 청동기의 문양을 따른 것이어서 당시 고려왕실에서 주도했던 예제개혁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청자 구름 학 국화무늬 퉁소, 고려 13세기,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청자로 만든 퉁소이다. ‘고려사’에는 퉁소에 여덟개의 구멍이 있다고 적혀 있다. 몸체에는 학과 구름, 국화절지무늬를 흑백 상감으로 새겼다. 여백을 적당히 두어 구성이 여유롭다. 퉁소 윗부분과 아랫부분에는 백상감으로 뇌문(雷紋)을 넣었다. 앞면에는 여섯 개의 구멍이 있으며, 옆으로 살짝 비껴 1개의 구멍을 뚫었다. 의례를 행할 때 이와 같은 악기로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하였을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예기(禮器)
탁월한 기술력과 수준높은 고려의 미감이 결합되어 탄생한 고려청자는 왕실에서 사용하는 예기로도 만들어졌습니다. 고려왕실은 왕권에 대한 명분을 세우고 국가체제를 굳건히 확립하기 위해 중국의 예제(禮制)를 수용하고 선진 사상을 받아들이는데 힘썼습니다. 정밀한 기형, 상징적인 도상, 아름다운 비색은 왕실의 권위와 취향을 대변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고려 왕릉은 대부눈 개경 부근에 조성되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약 80여 기의 왕릉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고려왕릉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상당수가 도굴되었다. 고려 왕릉 중 17대 인종과 19대 명종의 왕릉에 묻힌 부장품들이 일제강점기에 확인되었는데 청자를 비롯하여 상당히 높은 수준의 공예품들이 있었다.

<1.청자 여지 넝쿨무늬 대접, 2.청자 여의두무늬 접시, 고려 13세기, 명종 지릉 출토>

<3.청자 접시, 고려 13세기, 명종 지릉 출토, 4. 청자 연꽃무늬 퇴주기, 고려 13세기, 명종 지릉 출토>

명종 무덤에서 나온 부장품
명종(明宗, 재위 1170~1197)은 고려 제19대 임금으로, 인종의 셋째 아들이다. 명종의 능인 지릉(智陵)은 개성시 장풍군 지릉리에 위치한다. 1916년 도굴 사건을 계기로 조선총독부에서 조사에 착수하여 무덤 구조와 부장품 등을 확인하였다. 조사된 부장품은 발, 완, 접시와 같은 생활 용기가 대부분이며 제기로 분류할 수 있는 타호(唾壺)가 포함되었다. 상감과 틀로 문양을 찍어내는 압출양각(壓出陽刻) 등의 장식기법이 사용되었고 문양은 구름과 학, 연꽃, 연잎, 국화, 여지 무니 등이며, 유색은 전반적으로 맑은 비색을 띠고 있다. 문헌에는 1202년에 지름이 조성되었다고 하지만, 1255년(고종 42)에 몽골군에 의해 훼손되었던 지름을 보수했다는 기록이 있어, 일부 부장품이 새롭게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1. 청자 합, 고려 12세기, 2. 청자 뚜껑 잔, 고려 12세기, 3. 청자 받침대, 고려 12세기>


<4. 청자 참외모양 병, 고려 12세기, 국보>

<1. 청동도장, 고려 12세기, 청동>

<2. 은제숟가락과 청동젓가락, 고려 12세기, 은.청동>

인종 무덤에서 나온 부장품
고려 제17대 임금인 인종(仁宗, 재위 1122-1146)의 장릉(長陵)에서 나왔다고 전해지는 부장품이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일본인 사이에서 고려청자 수집 열풍이 일어났고, 개경 인근의 수많은 왕릉과 무덤이 도굴되었다. 인종 장릉 부장품 역시 1916년에 조선총독부박물관에서 구입한 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인종시책(仁宗諡冊))을 비롯하여 <청자 참외모양 병〉, 〈청자 합〉, 〈청자 뚜껑 잔》, <청자 받침대〉, 〈청동 도장>, <은제 숟가락과 청동 젓가락〉, 〈청동 내함)과 <석제 외함>이 인종의 장릉에서 나왔다고 전한다. 청자는 모두 4점으로, 정제된 기형에 맑고 청아한 느낌을 준다. 12세기 전반 고려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개경의 왕릉
왕릉의 부장품은 고려 왕실 미술의 품격을 보여줍니다. 대몽 항쟁기 임시 수도였던 강화도에 묻힌 몇몇 왕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고려 왕릉은 개경 인근에 조성되었습니다. <고려사>를 비롯한 각종 문헌에는 80여 기의 왕릉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왕릉이 이미 도굴되어 흩어졌고, 그 전모를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17대 인종(仁宗, 재위 1122~1146)과 19대 명종(明宗, 재위 1170~1197)의 무덤에서 나온 청자는 고려 왕릉의 부장품을 살펴볼 수 있는 매우 드문 예로, 왕실의 고상하고 기품있는 취향을 보여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서긍은 고려 중기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하면 당시 고려의 문물을 글과 그림으로 상세히 기록해서 북송 황제에게 보고하였다. 서긍이 작성한 보고서는 글로 적은 내용만 남아 있지만 당시 고려사회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서긍의 고려 견문 보고서 ‘선화봉사고려도경’ 지부족재본, 송 1124년, 청대 재간행>

서긍(徐兢)은 한 달 남짓한 체류 기간 동안에 보고 들은 고려의 역사.정치.경제.문화.종교 등 거의 모든 부분을 글과 그림으로 정리하여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이하 고려도경) 40권을 엮어 송 휘종에게 바쳤다. 안타깝게도 현재 그림 부분은 없어지고 글만 전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 고려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며 <고려도경>이 유통되었고, 중국에서도 고증학의 영향으로 재조명을 받으면서 여러 종류의 목판본이 전하게 되었다. 이 책은 청나라 때 포정박이 편찬한 <지부족재총서(知不足齋叢書)>에 실린 판본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청자 사자장식 향로, 고려 12세기, 국보>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고려의 각종 문물에 대하여 평을 덧붙였다. 그 중 ‘산예출향(狻猊出香) 역시 비색인데, 위에는 쭈그리고 있는 침승이 있고 아래에는 연꽃이 있어 그것을 받치고 있다. 여러 기물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라는 내용이 관심을 끈다. 서긍이 목격했던 연꽃 받침이 있는 예는 아니치만, 이 향로를 떠올리게 하는 기록이다. 뛰어난 조형미와 청자 유색이 어우러져 고려 상형청자(사물의 형태를 만든 청자) 가운데 수작으로 손꼽힌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나전 대모 국화 넝쿨무늬 합, 고려 12세기, 나전,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세 개의 둥그런 잎 윗부분이 서로 연결된 모양의 합으로, 이와 같은 형태는 고려 상감청자나 주칠기(朱漆器)에도 보인다. 뚜껑과 몸체의 옆면은 나전으로 국화 넝쿨무늬를 장식하고, 뚜껑 윗면에는 얇게 저민 대모(玳瑁, 거북 등껍질) 뒷면을 칠해서 자연스럽게 색을 내는 기법으로 꽃무늬 3개를 장식했다. 각 면의 테두리는 끈 금속선을 사용했고, 넝쿨무늬의 줄기는 단선의 금속선을 사용하였다. 서긍은 고려의 나전을 보고 ‘세밀함이 뛰어나 가히 귀하다’고 평가했다. 세밀함과 화려함의 절정을 보여주는 이 나전칠기에서 고려 장인의 창의성과 기술력을 엿볼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청자 꽃모양 발, 고려 12세기, 일본 오사카시림동양도자미술관>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도기의 색이 푸른 것을 고려인은 비색이라고 한다. 근년에 들어와 제작이 섬세해지고 광택이 더욱 아름다워졌다.’라고 적었다. 서긍이 기술했던 비색의 고려청자는 맑고 푸른 빛깔이 은은하게 감도는 최고 수준의 자기였다. 도자기 빛깔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유약이다. 비색청자의 유약층은 초기의 청자보다 2~4배 정도 두꺼워 깊고 푸른 유색을 띤다. 유약 성분과 번조 분위기 조절은 비색청자 제작의 핵심 기술이었다. 고려인은 이 기술을 얻기 위해 오랜 기간 실험과 노력을 하였고 이 작품들은 그 결과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청자 용무늬 발, 고려 12세기, 영국 피츠윌리암박물관>

<청자 용머리장식 붓꽂이, 고려 12세기>

붓을 꽂아 보관하는 붓꽂이(筆架)다. 고려, 청자 문방구 가운데 이러한 예는 많지 않다. 요삼채(還三彩)에 유사한 형태의 붓꽂이가 알려져 있어서 양식적 연관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북송 자기와 다른 특성을 지닌 요삼채 중 일부를 고려 왕실에서 선호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름다운 조형과 유색, 다양한 장식기법이 조화를 이룬 최상급 청자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청자 병, 고려 12세기, 일본 오사카시림동양도자기미술관>

서긍이 본 고려
1122년 예종(睿宗)이 승하하자, 이듬해 6월 북송 휘종(徽宗)은 위로의 뜻을 전하기 위해 200명이 넘는 대규모 사절단을 고려로 파견했습니다. 사절단의 일원으로 고려에 한 달 남짓하게 머물렀던 서긍(徐兢)은 보고 들은 문물을 상세히 기록하고 직접 그림을 그려 황제에게 올렸습니다. 그로부터 4년 후 북송은 금에 의해 멸망하였고 그림은 전란 속에 사라져 문장만이 전하게 됩니다. 이국인의 눈으로 본 고려는 어떤 모습이었고, 우리가 ‘기억하는 고려와 어떻게 달랐을까요?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최상의 아름다움, 왕실 미술
고려 왕실은 최대의 미술 후원자가 되어 가장 높은 수준의 미술문화를 이끌었습니다. 고려가 지향했던 사회는 다원적이고 개방적인 사회였으며, 그러한 분위기는 문화에도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새로운 재질의 물품 제작에도 도전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자기(磁器)입니다. 10세기에 고려에서 자기를 제작하기 전까지, 중국을 제외한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자기를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 했습니다. 이것은 일대 혁신이었고, 이로써 새로운 문화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왕실은 고려만의 빼어난 문화가 꽃필 수 있도록 기술을 발전시키고 아름다움에 대한 안목을 키웠습니다. 다양한 기법과 무늬로 장식된 자기는 고려의 독자적인 미감과 왕실의 취향을 잘 보여줍니다. 고려 왕실은 고급 공예 기술을 보유한 다른 나라의 장인도 적극 받아들이는 포용력을 발휘했습니다. 특히 왕실 주도하에 회화.금속공예품.나전칠기.자기 등 미술 각 분야에 선호되었던 소재와 무늬, 기법을 융합하여 새로운 차원의 물질문화를 창조하였습니다. 발상의 전환을 통해 왕실 미술문화의 수준을 한 차원 더 높이 끌어올렸던 것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백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