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는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인 이후 신라인이 신성시여겼던 7곳의 숲에 세워진 칠처가람 중의 하나로 궁궐이었더 동궁(임해전) 동쪽편에 위치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진흥왕이 21세가 되던해에 월성 동쪽에 궁궐을 지을려고 하다고 사찰로 고쳐지면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진평왕대에 금당을 비롯한 주요 건축물들과 금당에 모셔진 삼륙존상이 조성되었으며, 선덕여왕대에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의 건의로 9층목탑을 세웠으며, 이후에 종루와 경루가 세워졌다고 한다. 황룡사는 삼국시대에 처음 조성되기 시작하여 9층목탑이 세워짐으로서 국가를 대표하는 호국사찰로서 위용을 갖추게 되었다. 황룡사에는 자장, 원효 등의 승려들이 강당에서 설법을 전파했으며, 금당에는 솔거가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경주박물관에 전시된 황룡사 모형.>
황룡사지에 1976~1983년까지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전체적인 가람배치와 변천상이 밝혀졌다. 황룡사는 총면적 2만여평에 이르는 넓은 부지에 중문.탑.금당.강당이 남북으로 일렬로 배치된 일탑식가람배치로 지어졌으며 회랑으로 둘려져 있다. 이는 불교가 서역에서 중국을 통해 전해지면서 형성된 전형적인 가람배치로 탑을 제외하고는 궁궐과 큰 차이가 없는 건물배치라 할 수 있다. 이후 사찰이 확장되면서 동.서 금당이 새로 지어졌으며, 중문 안쪽에 경루와 종루가 들어섰다. 반면 불국사의 경우는 대웅전 영역이 이런 가람배치를 적용하면서 바깥쪽에 당시 성행했던 아미타불 신앙과 비로자나불 신앙을 반영하여 별도의 불전들을 세워두고 있다.
<황룡사 가람배치>
황룡사 절터에서는 구층목탑 심층석 사리구멍안에서 사리를 모시는 사리갖춤이 출토된 것을 비롯하여, 땅의 기운을 누리기 위해 묻어두었던 지진구 등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또한 용마루 끝을 장식하는 치미를 비롯하여 수막새, 암막새를 비롯한 각종기와와 전돌 등이 2만여점 출토되고 있다. 특히, 이런 건축자재들은 삼국시대부터 황룡사가 몽고군에 의해 불타버린 고려 고종대까지 다양한 시대에 만들어진 것들이 출토되고 있는데, 이는 고려시대까지 황룡사가 큰 사찰로서 유지되고 있으면서, 계속 중건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문, 회랑
황룡사는 총면적 2만여평에 이르는 규모로 중문, 탑, 금당, 강당이 일렬로 배치된 일탑식가람배치였으나, 후대에 금당 좌우에 작은 금당이 들어서면서 1탑, 3금당의 가람배치로 바뀌었다. 황룡사 모형을 보면 황룡사는 전체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문을 통해서 출입하면 회랑으로 둘러싸인 황룡사 경내를 들어가는 출입문인 중문이 있고 중문을 들어서면 황룡사의 상징인 거대한 목탑이 자리하고 있고 양쪽에 종루와 경루가 배치되어 있다. 이런 건물배치는 불국사 대웅전 영역 자하문 양쪽에 종루와 경루가 세워진 것과 비슷한 건물배치라 할 수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에 나타난 경향이라 할 수 있다.
주택가들이 들어선 도심 한가운데에 황룡사 목탑이 우뚝 솟아 있다. 랜드마크가 되었던 9층목탑이 멀리서부터 경외감을 주었을 것이다.
<경주박물관에 전시된 통일신라 전성기 경주의 모습>
남문은 사찰 경내를 들어서는 단순한 출입문으로 주위는 담장으로 둘러져 있다. 황룡사 모형을 보면 황룡사는 전체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문을 들어서면, 신성한 영역인 회랑으로 둘러싸인 황룡사 경내를 들어가는 출입문인 중문이 나타난다.
<황룡사 남문터>
황룡사 남문터에서 양쪽으로 담장이 이어져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남문 건물터 크기와 초석을 볼 때 상당히 큰 규모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황룡사 남문터 양쪽 담장 흔적>
중문은 앞면 5칸에 2층문루가 있는 형태인 것으로 추정하고 복원해 놓고 있다. 중문은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과 비슷한 규모로 이를 참조하여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9층목탑이 있는 황룡사 경내로 들어가는 출입문인 중문>
중문터에는 앞면 5칸 건물이 들어설 수 있는 초석이 놓여 있고, 초석 크기로 2층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 것 같다.
<황룡사 중문터.>
<중문터 뒷쪽으로 우뚝 솟아 있는 9층목탑 건물터>
황룡사는 탑, 금당, 강당이 있는 영역 전체가 회랑으로 둘러져 있다. 회랑은 신앙의 중심이 되는 탑을 중심으로 신자들이 오가는 통로이자 신앙심을 표현하는 장소이다. 궁궐 정전 영역과 비슷한 건물배치를 하고 있으며, 로마시대 공공건축물에서 볼 수 있는 바실리카의 영향을 받은 구조인 것으로 보인다.
<중문과 연결된 회랑이 있던 건물터>
<모형으로 본 남문, 중문, 중문과 연결된 회랑.>
황룡사 9층목탑
신라 제일의 보물이었던 황룡사 구층목탑은 선덕여왕 12년(643) 당나라에서 유학한 자장의 권유로 지었다고 한다. 목탑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바램으로 지었는데 9층은 신라를 둘러싸고 있는 적국을 상징하고 있다. 황룡사 목탑을 세운 내력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출토된 목탑의 조성경위를 기록한 찰주본기에 적힌 내용과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 백제 장인 아비지가 주도로 건축한 이 목탑은 높이가 80m나 되는 거대한 건축물로 현재 기준으로 30층 정도의 높이라 한다. 찰주본기에 따르면 경문왕 13년(873)에 크게 중건된 것으로 비롯하여 몽고군에 의해 완전히 불타버릴 때까지 여섯차례에 걸쳐서 중수되었다고 한다. 목탑건물터에서는 찰주본기가 적혀 있는 사리함을 비롯하여 큰 건물을 세울 때 땅의 기운을 누리기 위해 묻은 지진구도 함께 발견되었는데 금.은 등 칠보와 거울.칼 등 다양한 형태의 물건들이 출토되었다.
황룡사 9층목탑은 경주 중심가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으면서 천년 가까이 이정표 역할을 했던 거대한 건축물로 당시 경주를 처음 방문한 사람이 황룡사 구층목탑을 처음 봤을 때 감동은 우리가 파리에 갔을 때 에펠탑은 보고 느끼는 감동보다 훨씬 웅장한 감동을 느꼇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황룡사 9층목탑이 있었던 건물터>.
한가운데에 사리함을 모셔두었던 심초석을 덮은 큰 돌이 보인다. 황룡사구층목탑을 세운 내력은 삼국유사와 이곳에서 발견된 찰주본기에 적혀 있다. 선덕여왕 때인 645년에 승려 자장의 권유로 세운 높이 80여m에 이르는 거대한 건축물로 몽고의 침입으로 1238년에 불타버리기까지 약 600여년의 세월 동안 경주 도심에 우뚝서 있으며 경주의 랜드마크가 되었던 웅장한 구조물이었다.
<황룡사 구층목탑 모형>
선덕여왕때 완공된 이후 몽골에 의해 불타버리기까지 천년 가까운 세월동안 경주의 이정표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황룡사 구층목탑 모형. 목탑의 9개층은 신라 변방이 나라들을 의미하며, 탑을 세움으로써 이런 위협을 누를 수 있었다고 한다. 목탑은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치면서 유지되어 왔으나 1238년 몽고의 침입으로 건물 전체가 불타버렸다고 한다.
<높이 80m에 이르는 9층 건물을 지탱하였던 커다란 초석들>
목탑터에는 64개(가로 8 x 세로 8)의 초석과 심초석이 남아 있다.
<부처의 사리를 모셨던 심초석>
찰주본기와 사리함 등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황룡사 목탑 찰주본기
흔히 황룡사 찰주본기로 일컬어지는 금동판은 황룡사 구층목탑 심초석의 사리구멍 안에 있던 가리갖춤 가운데 내함입니다.1964년 도굴된 것을 1966년에 되찾은 것입니다. 금동판 네 개를 경첩으로 연결시켜 네모난 상자를 만들었는데, 한 면은 문고리가 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의 앞뒷면에는 부처와 불법을 수호하는 인왕과 신장이 각각 2구씩 새겨져 있습니다. 나머지 세 면에는 황룡사 구층목탑을 만든 경위와 탑이 기울어 경문왕 때인 871년 탑을 고친 내용을 새겼습니다. 이와 함께 중건에 참여한 관리와 승려들의 명단도 기록하였습니다. 구층목탑을 세운 경위는 ‘삼국유사’ 등에 기록된 내용과 큰 차이가 없는데, 자장이 삼한의 통일과 국가의 안녕을 위해 황룡사 구층목탑을 세우자고 선덕여왕에게 건의하여, 이간 용수를 감독으로 하고 백제 장인 아비지를 대장으로 삼아 높이 225자(약 80m)의 목탑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2년)
<황룡사 목탑 찰주본기>
황룡사 목탑 찰주본기라 불리는 금동판이다. 목탑 심초석 사리구멍 안에 있던 사라갖춤 중 내함에 해당하는 것으로 1964년에 도굴된 것을 되찾았다고 한다. 4개의 금동판으로 되어 있는데 탑을 조성한 경위와 871년에 중수한 내용을 새겨놓고 있다. 구층목탑을 세운 경위는 삼국유사와 큰 차이가 없으며, 삼국유사의 신빙을 더해 주는 유물이다.
<찰주본기를 복원한 모습>
사리함 내함으로 4개의 동판을 연결하여 함을 만들고 있으며, 앞면에 문이 있다.
<사리갖춤을 구성하는 금합, 은합>
<구슬>
<청동방형 사리함, 청동원통형 사리함>
<은제 장식판, 은합>
황룡사 지진구
지진구는 큰 건물을 세울 때 땅의 기운을 누리기 위해 땅에 묻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보통 금.은수정.진주.호박.유리.마노 등 칠보 외에 거울, 칼 등을 묻었습니다. 황룡사에서는 목탑터와 서 금당터에서 지진구가 나왔습니다. 목탑 터 지진구는 기단 흙과 적심석 사이, 심초석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 종류는 청동그릇, 침통, 칼, 가위, 청동거울, 중국에서 수입한 백자 등 일상생활용품을 비롯하여 귀걸이, 팔찌, 허리띠 장식, 곱은옥 등 장신구, 금동관불 등 매우 다양합니다. 특히 이 지진구는 목탑이 세워졌던 선덕여왕 14년(645) 이전의 것으로 밝혀져, 7세기 중엽 신라의 문화수준을 이해하는 귀중한 자료가 됩니다. 서금당 터에서도 지진구가 나왔는데, 특히 서아시아문화의 영향으로 새 두마리가 대칭으로 새겨진 은장식관이 출토되기도 하였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2년)
황룡사에 목탑을 세우기 전에 땅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묻은 지진구들이다. 가위,칼,팔찌,방울,허리띠 장식 등 일상생활용품들을 묻고 있다. 아마도 토지신에서 선물을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황룡사 목탑 지진구들>
<수정.옥, 곱은옥>
<수정.옥>
<청동거울>
<금동항아리>
황룡사의 종루에는 754년(경덕왕 13)에 구리 497,581근을 들여 만든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종이 있었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몽고의 침입시에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황룡사 9층목탑 동쪽편에 있는 종루>
<황룡사 동금당과 종루>
<황룡사 목탑 서쪽편에 있었던 경루터>
<황룡사 경루와 서금당>
장륙존상이 있었던 금당
현재 남아 있는 황룡사 절터는 1탑, 3금당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원래는 신라의 3대 보물 중 하나였던 장륙존상을 모시고 있었던 중앙의 금당만 있었는데, 후대에 아미타신앙, 비로자나신앙 등이 성행하면서 좌.우 양쪽에 금당이 새로 들어섰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불국사의 가람배치에서 기존의 가람배치를 따르고 있는 대웅전 영역 외에 미륵전, 비로전 등을 따로 두고 있는 것에서 추론해 볼 수 있다. 금당건물은 화엄사 각황전, 금산사 미륵전처럼 단층건물이면서 외형상 2층건물처럼 보이게 하면서 거대한 불상을 모시고 있는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황룡사 금당은 백제장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나라의 동대사(도다이지) 금당 건물에서 옛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황룡사 금당에는 신라 삼보로 일컬어지는 장륙존상이 모셔져 있었는데, 지금도 금당터에는 불상이 있었던 석조대좌가 남아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장륙존상이 진흥왕대에 완성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금당이 진평왕대(584년)에 새롭게 건물을 중건한 것으로 볼 때 7세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삼륙존상은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협시보살을 두고 삼존불인데 북조의 석가불신앙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황룡사 금당터>
황룡사는 원래 1탑, 1금당식 가람배치였으나, 후대에 황룡사가 신라의 중심사찰로 자리매김하면셔 동.서양쪽에 금당을 세웠다. 황룡사 금당에는 신라의 3대보물 중 하나인 장륙존상과 솔거가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황룡사 금당 모형>.
오늘날 금산사 미륵전이나 화엄사 각황전에서 볼 수 있는 구조로 1층 건물이나 외부에서는 2층 건물처럼 보인다.
<황룡사지 출토 치미>
황룡사 금당 규모와 건물구조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게 해주는 망새라고도 불리는 치미(7세기)가 절터에서 출토되었다. 용마루 끝을 장식하는 치미는 궁궐의 전각 등 대형 건물에서만 볼 수 있는데,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건물에서 많이 사용했던 것 같다. 지금은 중국 자금성에서 치미를 사용한 건물을 볼 수 있으며, 일본 최대의 목조건축물인 동대사 금당이 황룡사 금당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일본 나라 동대사 금당>
삼국시대 사찰 금당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는 일본 나라 동대사 금당이다. 최대의 목조건물로 앞면 7칸의 건물이다. 백제계 장인들이 처음 세웠던 건물이 중수를 거치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황룡사도 백제 출신 장인들이 설계하고 세웠다고 한다. 내부에도 황룡사 장륙존상처럼 거대한 불상이 세워져 있다.
<금당터에 남아 있는 석조대좌>
신라 3대보물로 여겨졌던 거대한 장륙존상을 비롯한 삼존불상을 받쳤던 곳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는 삼륙존상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신라 진흥왕 30년에 인도 아육왕이 보낸 금.구리 등으로 만들었다고 하나 학자들은 대체로 7세기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황룡사 금당은 진평왕대(584년)에 기존의 금당을 허물고 새로 지었다고 하며, 장륙존상은 그 이후에 북조의 석가불신앙이 받아들여지면서 삼존불로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장육존상은 무게가 35,007근으로 높이가 4.5~5m에 이르는 거대한 불상이었다고 하며, 양쪽에 보살상을 같이 세웠다고 한다. 황룡사 금당에는 장륙존상 외에도 화가 솔거가 그린 그림이 걸려 있기도 한 곳이다.
황룡사에서 나온 기와와 전
황룡사에서 나온 4만여 점의 출토품 가운데 3만여 점이 기와인데, 그 종류뿐만 아니라 만든 시기도 매우 다양합니다. 이로써 신라 진흥왕에서 고려 고종 23(1298년) 불탈 때까지 여러 차례 중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수기와와 암기와 끝에 붙는 수막새와 암막새는 꽃무늬 등 식물 무늬를 장식한 것이 대부분 이지만, 사자.용 등을 장식한 것도 있습니다. 마루 끝을 장식하던 용얼굴무늬 기와는 매우 다양합니다. 특히 황룡사 출토 기와 가운데 네모난 연꽃무늬 사래기와는 삼국시대 기와 가운데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바닥에 까는 전도 많이 출토되었는데 금당터와 강당터의 민무늬 전은 창건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학 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2012년)
황룡사 절터에는 무려 3만여점에 이르는 기와가 출토되었는데 만든 시기도 삼국시대 진흥왕대부터 고려 고종대까지 다양하다. 이는 황룡사가 여러차례 중수를 거치면서 몽골에 의해 불타버릴때까지 존속했음을 보여준다.
<황룡사지 출토 전돌>
<황룡사 절터에서 출토된 기와>
다양한 문양을 새겨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황룡사 동금당터.>
본당보다는 약간 작은 규모이다. 황룡사는 원래 1금당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었는데, 후대에 사찰이 확장되고, 신앙의 대상이 변화하면서 추가로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불국사 극락전, 비로전 등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황룡사 서금당터.>
강당
경주 황룡사지에서 오늘날 사찰과는 제일 뒷쪽편에 있는 강당이 자리잡고 있다. 이는 선종이 크게 성행한 통일신라 후기 이전에 세워진 평지 사찰의 전형적인 가람배치라 할 수 있다. 황룡사 강당에서는 원효대사 등 당대의 유명한 승려들이 설법의 강의했던 역사적 의미가 큰 장소이기도 하다. 강당 뒷편에는 복원한 황룡사 우물이 있고, 그 외에 여러 건물터가 남아 있으며, 강당 뒷편으로 분황사로 연결되는 길이 있다.
<황룡사 강당터>
강당은 불법을 전파하는 장소로 원효대사 등 당대의 유명한 승려들이 설법의 강의했던 역사적 의미가 큰 장소이기도 합니다.
<황룡사 강당 모형>
단층으로 지어진 3동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대부분에 사찰들은 강당을 주불전 앞에 두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비해 통일신라시대까지 지어진 평지사찰은 가람배치의 원칙에 따라 뒷편에 두고 있다.
<황룡사 동쪽편 회랑 건물터>
강당은 단층건물로 금당이나 목탑 초석에 비해서 작은 돌을 사용했다.
<동쪽편 강당 건물터>
<서쪽편 강당 건물터>
<황룡사 우물>
<황룡사 우물 주위에 있는 작은 건물터>
<절터 한쪽편에 모아 놓은 석재들>
<연꽃무늬수막새, 황룡사터 출토>
<황룡사라는 글자가 적혀 있는 암키와>
<뒤꽂이.뚜껑 거푸집,>
<금속판 거푸집>
황룡사
국립경주박물관 북쪽에는 옛 절터가 남아 있습니다. 바로 황룡사입니다. 진흥왕 14년(553) 짓기 시작하여 선덕여왕 때인 645년에 완성된 신라에서 으뜸가는 절이었던 황룡사. 왜 황룡사라고 부르게 되었을까요? 진흥왕 때 새로운 궁궐을 월성 동쪽에 지으려 하였으나, 그곳에서 황룡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절을 짓고 황룡사라고 하였답니다. 이 곳 황룡사에는 신라의 세가지 보물 가운데 두가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진흥왕 35년(574) 금당에 안치한 금동장륙존상과 선덕여왕 14년 (645) 자장의 권유로 세우기 시작한 구층목탑입니다. 그 높이가 무려 480cm 정도나 되었으니까요. 현재 남아 있는 신라 금동불 가운데 가장 큰 백률사 약사불이 180cm 정도에 지나지 않은 것을 생각해 볼 때, 당시 황룡사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구층목탑은 신라를 둘러싼 아홉 나라의 침략을 막기 위해 조성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적국이던 백제의 아비지를 초빙하여 나무와 돌로 탑을 만들게 하였다는데 그 높이가 무려 225척(약80m)에 다다랐다고 합니다. 이 구층목탑은 당시 경주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기 때문에 쉽게 벼락을 맞기도 하였습니다. 효소왕 7년(698) 벼락 맞은 이래 다섯 차례나 벼락을 맞았다고 합니다. 황룡사는 고려시대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다가 안타깝게도 고려 고종 25년 (1238) 몽고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 버리고 말았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2년)
* 참조:
1. 황룡사지, 고고학사전, 2001.12, 국립문화재연구소 [네이버 지식백과]
2. 황룡사터, 답사여행의 길잡이 2 – 경주,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네이버 지식백과]
3. 황룡사 장륙존상,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삼국유사 사전/박물지 시범개발), 2007, 한국콘텐츠진흥원
4.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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