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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황성동 고분(사적), 통일신라 굴식돌방무덤

경북 경주시 황성동에 있는 황성동 고분(사적)이다. 이 무덤은 인근 용강동 고분(사적)과 함께 고구려와 중국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통일신라의 굴식돌방무덤이다. 발굴,조사 결과 봉분과 호석 주변시설, 석실 내부 등이 확인되었다. 출토 유물등을 통해 7세기 중반 처음 조성되었으며 9세기에 시신이 다시 매장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오래전에 도굴되어 내부에 있던 껴묻거리는 대부분 없어졌으나 일부 남아 있는 유물을 두 번에 걸쳐 장례가 이루어졌음이 확인되었다.  중국 당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남녀 인물상, 가축을 표현한 토용과 축성 연대를 확인해 준 인화문토기, 중국제 해무리굽 청자편 등이 있다.

<경주 황성동 고분(사적)>

무덤의 규모는 봉분 지름 7.75m, 돌방은 남북 2.4m, 동서 1,75m 정도로 크지 않은 편으로 통일신라 때 무덤형태를 잘 보여주는 유적이다. 봉분은 모래흙과 자갈 등을 다져 쌓았으며 바깥쪽에는 호석을 쌓아 마감하였다. 돌방은 남북방향으로 긴 네모형이다. 관이 들어가는 널길이 왼쪽편에 위치하고 있다. 널길이 있는 봉분 앞쪽에는 상석(床石)이 있었던 자리가 확인되었다.

<옆쪽에서 본 봉분>

<반대편에서 본 모습>

<상석이 있던 자리>

<발굴된 상석 받침돌> 

이 유물은 ‘상석(床石)받침 기초석 (基礎石)’으로 상석(床石)의 하단부에 해당된다. 양쪽 모서리에 장대석을 세우고 그 내부에 깬돌을 채운 현재 모습은 상석의 완형이 아닌 보존된 일부 모습이다. 원래 모습은 장방형으로 추정된다. 이 시설물은 후대에 추가적으로 설치됐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 시설물 북서쪽 모서리 부분에서 출토되어 현재 국립 경주문화재연구소에 보관 중인 매납유물 (합)으로 유추해보며, 상석 받침기초석은 고분 축조와 동시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9년)

출토 유물 중 남녀 인물상은 중국 섬서박물관에서 많이 전시되어 있는 당나라 유물인 도용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어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남자는 손에 홀을 들었던 문관상으로 추정되는데 이국적인 인상을 준다. 여자는 소매가 긴 포(袍) 형태의 옷을 입고 허리띠를 매었습니다. 통일 신라 초기 복식을 살펴볼 수 있다.

<남녀 인물상, 8세기 황성동 돌방무덤>

 <여인상, 중국 당나라, 시안시 출토, 섬서역사박물관 소장>

여인상
7세기에 만들어지 경주 황성동의 돌방무덤에서는 인물상과 동물상 등 다양한 토용들이 출토되었습니다. 이 중 여인상은 신라 여인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줍니다. 머리는 가르마가 선명하고 살짝 묶어서 왼쪽으로 틀었습니다. 오른손을 아래로 늘어뜨려 병을 쥐었고, 왼손은 소맷자락에 가린 채 웃음을 머금은 입을 살짝 가리고 있습니다. 치맛자락 밖으로 살작 내민 자그마한 발끝이 수붑은 여인의 미소와 너무나도 잘 어울립니다. 경주 용강동 돌방무덤에서도 여러 여인상이 출토되었습니다. 체격이 큰 여인상과 작은 여인상이 있는데 신분 차이를 나타내는 듯 합니다. 황성동 출토여인상에 비해 중국 당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황성동 보다는 조금 늦은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입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5년)

<소의 형상을 하고 있는 토용>

<말머리 모양 토용>

경주 황성동 고분은 형산강변의 평지에 만든 신라 석실분으로 2005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했다. 조사 결과 석실 축조 이후 몇 차례의 추가장이 이루어졌고, 고분 주변에 시설이 추가되면서 행해진 의례행위가 확인됐다. 석실은 출입구가 왼쪽에 위치한 〈좌편연도식(左便義道式) 석실〉로 규모는 남북길이 2.4m, 동서너비 1.75m로 네 벽은 올라가다가 점차 모죽임을 한 후 뚜껑돌을 덮었으나 도굴로 천정이 무너져서 일부만 확인된다. 석실은 남북으로 긴 장방형 으로 동쪽 벽면에 붙여서 시신을 안치한 시상대를 만들고 서쪽 벽에 붙여서는 통로인 연도(道)를 만들었다. 벽면의 틈에는 회를 발라서 매웠고 바닥에는 점토를 발라서 미장을 했다. 봉분은 흙과 모래, 자갈을 섞어서 층층이 다진 판축기법으로 쌓았다. 규모는 동서 14.1m, 남북 16.4m, 잔존높이 2.0m이며, 호석은 직경 약 9.8m, 높이 약 2.0m로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한 호석보강토가 약 1m 너비로 확인됐다. | 출토유물은 석실 안에서 출토된 인화문토기 뚜껑과 호석 주변에 묻은 제사유물인 유개대부발 그리고 화장묘인 유개호 등으로 고분의 변화 시기를 잘 보여준다. 유적의 연대는 석실 안에서 출토된 인화문토기로 보아 7세기 중반에 축조되었고, 이후 상석설치와 호석보강이 이루어졌다. 마지막 추가장이 이루어진 시기는 묘도에서 출토된 중국제 해무리굽 청자편으로 보아 9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경주 황성동 고분은 석실의 형태가 잘 남아있고 호석 주변에서 상석받침기초와 호석 보강시설 등과 같이 신라 횡혈식 석실분 연구의 새로운 시설이 확인되었으며, 출토유물들은 고분의 연대와 신라토기 편년 연구에 새로운 자료를 제공하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9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9년
  2.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5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