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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옥산서원(사적), 회재 이언적을 모신 서원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있는 옥산서원(玉山書院, 사적)이다. 조선중기 유학자 회재 이언적(李彦迪, 1491 ~ 1553년)을 기리기 위해 1592년(선조5)에 경주부윤 이제민이 처음 세웠으며 1573년 국왕으로부터 ‘옥산(玉山)’이라는 이름이 내려져 사액서원이 되었다. 옥산서원은 건축양식이 정형화된 후기의 서원들과는 달리 건물 배치나 건축양식에 있어서 자유로우면서도 형식적이고 절제된 면을 보여주고 있다. 강당건물인 구인당(求仁堂)을 중심으로 한 강학공간이 앞쪽에, 위패를 모신 체인묘(體仁廟)를 중심으로 제향공간이 뒷쪽에 위치한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서원 입구에 위치한 청분각에는 이언적의 <수필고본>(보물), 김부식의 <삼국사기> 완본 9권(국보) 등 많은 서적들을 소장하고 있다. <한국의 역사마을, 양동마을>과 <한국의 서원>의 일부로 유네스코문화유산에 이중으로 등재되어 있다.

회재 이언적(1491~1553년)은 조선중기 문신으로 주로 중종대에 명종대에 관리이자 학자로서 활동했던 인물이다. 이 시기에 일어난 여러번의 사화에서 관직에 물러나거나 여러 사건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이언적은 학자로서 성리학 연구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주자의 주리론에 근본을 두면서 당시 성리학의 거두였던 조한보와 무극태극논쟁을 벌였으며, 이는 조선 성리학사에 최초의 본격전인 논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학설은 이후 퇴계 이황에 의해 계승.발전되어 영남학파의 선구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학문적 성과에 따라 1610년(광해군2)에 명종의 배향공신으로 종묘에 배향되었다.

<경주 옥산서원(사적)>

들어가는 길

옥산서원은 경북 안강읍 옥산천 계곡에 자리잡고 있다. 이언적은 말년에 관직을 그만두고 정혜사지 절터 부근에 독락당을 짓고 거처하면서 학문에 전념했다. 옥산천 계곡에서 경치가 뺴어난 바위 5곳에 이름을 짓고 오대(五臺)라 불렀는데 그 중 독락당 남쪽 600m 정도 떨어진 세심대(洗心臺) 부근에 서원이 세워졌다. 서원 부근에는 오랜 세월 다양한 나무가 심어져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옥산서원 입구의 울창한 숲>

<서원 들어가는 길>

<서원 앞 마당>

세심대(洗心臺)는 서원 앞을 흐르는 개천 가운데 있는 넓은 너럭바위 일대를 말한다. 독락당에서 흘러내려온 개천은 세심대에서 작은 폭포와 용소(龍沼)를 만들어 빼어난 경치를 만들고 있다.

<세심대>

세심대는 옥산서원 앞으로 흐르는 자계천 가운데에 자리한 너럭바위 일대를 말한다. 자계천을 흐르는 물은 세심대에서 떨어져 내려 작은 폭포와 용소(龍沼)를 만들이 빼어난 경치를 이른다.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李彦迪, 1494~1553)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독락당을 지어 머물면서 주변의 산과 계곡에 이름을 붙였는데 이를 사산오대(四山五臺)라고 하며, 그 중 하나가 바로 세심대이다. 세심대는 마음을 씻고 자연을 삼아 학문을 구하는 곳이라는 뜻이며, 바위에 새겨진 글씨는 퇴계 이황이 쓴 것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9년)

서원 정문에 해당하는 역락문 (亦樂門)은 삼문의 형식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주위로는 옥산서원 특유의 흙과 벽돌을 섞어서 만든 토담으로 둘러져 있다.

<서원 정문인 역락문>

강학공간

비교적 이른 시기에 세워진 서원으로 제향공간이 중심이 되었던 후대의 서원에 비해 강학공간과 고직사의 규모가 크고 학문연구에 중점을 둔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서원의 모습을 잘 갖추고 있다. 강학공간에는 강당건물인 구인당(求仁堂)을 중심으로 유생들의 기숙사인 민구재(敏求齋, 동재), 암수재(闇修齋. 서재), 휴식공간인 무변루(無邊樓)로 구성되어 있으며 교육중심의 서원답게 규모가 크고 짜임새 있는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독락문을 들어서면 출입문이자 이곳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의 휴식공간인 무변루가 있다.

유생들의 휴식공간인 무변루는 앞면 5칸의 건물로 가운데 3칸은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에 온돌방을 설치하였다. 건물 양쪽에는 작은 누마루을 설치하였다. 계곡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대청마루에는 판문을 달아 놓고 있다. 경치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지만 학문에 전념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누각 건물인 무변루>

<강당에서 보이는 무변루>

<무변루 내부>

무변루 앞마당에는 계곡에서 물을 끌어 들여 흐를 수 있도록 작은 수로를 만들어 놓고 있다. 이는 궁궐 건물에서 볼 수 있는 금천과 비슷하게 서원 안팎을 구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무변루 앞 마당>

강당건물인 구인당은 유생들이 공부하고 학문을 논하는 강학공간의 중심건물이다. 건물은 앞면 5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데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로, 양쪽에 1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다. 잘 지어진 건물은 아니지만 단정하면서도 절제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구인당은 이언적이 쓴 ‘구인록’에서 이름을 따 왔는데 당대의 명필 한석봉이 글씨를 썼다.

<강당건물인 구인당>

옥산서원은 선조에게 ‘옥산서원’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당대 명필 이산해가 현판글씨를 썼는데 구한말 화재로 소실되면서 추사 김정희가 다시 현판글씨를 썼다.

<옥산서원 현판>

<‘구인당’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 강당 대청마루>

<천정에 걸려 있는 글>

<오른쪽 온돌방>

<왼쪽 온돌방>

<옆에서 본 모습>

<온돌방 아궁이>

강당 앞 마당 양쪽에는 유생들이 기거하면서 공부하던 동.서재에 해당하는 민구재와 암수재가 있다. 민구재는 상급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기거하던 곳으로 앞면 5는 건물로 온돌방 3칸과 작은 대청마루를 1칸씩, 2개를 두고 있다. 유생들을 서열에 따라서 분리하여 공부했음을 알 수 있다. 암수재는 하급생이 기거하는 곳으로 건물구조는 민구재와 똑깥다. 다른 서원에 비해 건물규모가 큰 편으로 교육기관의 역할이 강조되었던 초기 서원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민구재>

<암수재>

<뒷편에서 본 강학공간>

<강당 옆 계곡을 출입하는 작은 쪽문과 오래된 고목>

강학 영역은 학문을 연구하는 공간으로 무변루, 구인당, 민구재(동재), 암수재(서재) 등의 건물로 이뤄져 있다. 유생들의 휴식 공간인 무변루는 ‘끝이 없는 누각’ 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편액의 글씨는 석봉 한호가 쓴 것이다. 처음 이름은 납청루였으나, 노수신이 ‘스승이 남긴 뜻에 맞지 않다’ 며 주돈이의 ‘풍월무변(風月無邊)’을 따와서 무변루로 고쳤다. 무변루를 마주 보고 있는 구인당은 이언적이 쓴 ‘구인록’ 에서 이름을 따왔는데, 이 현판도 석봉 한호가 썼다. 구인당은 헌종 4년 1838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지어졌다. 이곳은 강의와 토론이 열렸던 곳으로, 서원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마루 양쪽의 양진재(兩進齋)와 해립재(偕立齋)는 교수와 유사(有司)들이 기거하던 곳으로 현대 학교의 교무실에 해당한다. 강당의 앞마당 좌우에는 유생들이 학문을 닦으며 기거하던 동재와 서재가 마주보고 있는데, 유생들 간에도 위계가 있어 나이가 많은 유생들이 동재에 기거하였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9년)

제향공간

제향공간은 위패를 모신 사당인 체인묘(體仁廟)를 중심으로 제사를 준비하는 전사청, 서원 소장 목판을 보관하던 경각(經閣), 신도비가 있는 비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당은 내삼문인 체인문 주위로 담장이 둘려져 있다. 사당 건물은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전형적인 사당 건물 형태를 하고 있는데 규모가 크지 않고 단정하면서 절제된 느낌을 주고 있다.

<체인문과 제향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

<사당인 체인묘와 전사청>

사당 옆에는 회재 이언적을 기리는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이 신도비는 이언적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후학들이 건립한 것이다. 비문은 당대 유학지 기대승이 짓고, 글씨는 명필 이산해가 썼다. 원래 신도비는 서원 앞 계곡 부근에 세워져 있었는데, 안전을 위해서 후대에 이곳으로 옮겨졌다.

<비각>

<이언적 신도비>

<신도비에 새겨진 글씨, 명필 이산해의 뛰어난 글씨체를 볼 수 있다.>

문원공 회재 이언적 신도비
문원공 회재 이언적(1491~1553년)은 조선 중종, 명종대를 대표하는 성리학자이자 사림파 관료로 동방오현(東方五賢) 중 한사람으로 꼽힌다. 주자(朱子)의 주리론(主理論)에 근본을 두었으며 그의 이우위설(理優位說)은 이후 퇴계 이황에 의해 계승, 발전되어 영남학파 성리학의 선구가 되었다. 이 신도비는 이언적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후학들이 뜻을 모아 건립한 것이다. 비문은 호남의 거유(巨儒)였던 고봉 기대승이 짓고, 아계 이산해가 썼다. 비의 전체 높이는 320cm 이며, 비신의 높이는 204cm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9년)

경각은 옥산서원이 소장하고 있던 전적을 보관하는 건물로 앞면 3칸, 옆면 1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이곳에는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어서, 어필, 내사본, 퇴계수필, 각종 전적 등을 봉안하고 있었다. 옥산서원은 경주부윤을 통해 국가에서 발행한 중요한 전적을 소장하고 있었다.

<경각>

국보 322-1호 <삼국사기>는 1573년 경주부(慶州府)에서 옥산서원에 보내준 것으로 고려시대 원판, 조선 태조 때 새긴 것, 중종 때 새긴 것 등 3종류의 판이 섞여 있다. 총 9책으로 구성된 완질본으로 인출상태와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서울 성암고서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국보 322-2호 <삼국사기>는 1512년 다시 새긴 것을 찍은 것으로 인출당 당시 원형이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삼국사기, 고려 1145년, 1573년 인쇄, 종이에 인쇄, 국보 322-1호, 경주 옥산서원>

제향 영역은 제사를 지내는 공간과 이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체인문, 체인묘, 전사청, 경각, 비각 등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체인문을 들어서면 회재 이언적의 위패를 모신 체인묘(體仁廟)가 있다. 사당은 신성한 공간이며 위엄을 갖추어야 하기에 내삼문의 주위로 담장을 둘렀다. 전사청(典祀廳)은 제사를 지내기 전날에 제수를 보관하던 곳으로, 평상시에는 제기와 제구를 보관한다. 사당 오른쪽에 있는 경각(經閣)에는 어서(御書), 어필(御筆), 내사본(內賜本), 퇴계수필(退溪手筆), 각종 전적 등을 봉안하고 있다. 사당 왼쪽에 있는 것은 선조 10년(1577)에 세워진 이언적의 신도비각이다. 신도비의 비문은 고봉 기대승이 짓고, 글씨는 아계 이산해가 썼다. 건립 당시에는 이 서원 앞의 계곡에 있었으나 훼손을 막으려고 서원 안으로 옮겼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9년)

고직사를 비롯한 부속건물들

동재인 민구재 옆으로는 살림집 형태의 고직사 건물들이 있는데 다른 서원에 비해 그 규모가 상당히 큰 편이다. 고직사에는 상당히 많은 방을 두고 있는데, 서원을 방문하는 유력인사들이 잠시 머물 수 있도록 건물을 크게 지은 것으로 보인다.

<고직사>

<고직사 본채>

<고직사 행랑채>

<바깥에서 본 고직사>

<민구재와 고직사 사이의 공간>

<고직사에서 서원을 출입하는 작은 쪽문>

<옥산서원 유물전시관>

옥산서원(玉山書院, 사적)
이 서원은 회재 이언적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세웠다. 이언적은 조선 중종 때의 문신으로 그의 성리학은 퇴계 이황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종묘에 명종의 공신으로 모셔져 있다. 그가 타계한 후 1572년에 경주부윤 이제민이 지방유림의 뜻에 따라 서원을 창건하였으며 1574년에는 선조에게서 ‘옥산서원’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 5년(1868)에 흥선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에도 헐리지 않고 그대로 살아남은 47개의 서원과 사당 중 하나이다. 서원 건축의 역사로 보면 옥산서원은 초기의 건축물에 해당하는데, 당시에 지어진 서원들이 비교적 자유로운 구성을 따랐던 데 비해, 이 서원은 틀에 짠 듯 질서 정연한 형식을 보이고 있다. 까다롭기로 유명했다던 이 서원의 원규(지금의 학칙)만큼 이 건축물에서도 긴장과 절제가 묻어난다. 정문인 역락문을 들어서면 누각인 무변루가 있고, 강당인 구인당의 양쪽으로는 동재와 서재가 있으며, 강당 뒤쪽에 서 있는 것이 회재를 모신 사당인 체인묘이다. 동재의 오른쪽으로 지어진 여러 건물들은 서원의 살림을 맡았던 곳이다. 이곳 고직사(庫直舍)는 다른 서원에 비해 유난히 규모가 커서 예전의 재산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고직사 뒤에 있는 문집판각(文集板閣)은 목판을 보관하는 곳이다. 옥산서원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며, 그 현판 뒤에는 아계 이산해가 쓴 또 다른 현판도 걸려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9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