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용강동에 있는 통일신라 고분(사적)이다. 시신을 돌방에 안장하는 굴식돌방무덤이다. 1986년 발굴 당시 중요 유물은 도굴되어 거의 남아 있지 않았으나 토용, 청동십이지신상 등이 출토되었다. 문인상과 무인상, 여인상 등의 토용은 당나라 복식의 영향을 받은 당시 신라의 복식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무덤이 조성된 기록이 없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발견된 유물들로 미루어 보아 7~8세기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경주 용강동 고분(사적)>
용강동 고분은 전형적인 통일신라 중앙귀족들의 무덤형식인 돌방무덤을 하고 있다. 돌방무덤은 무덤방에 문이 달려 있는 구조로 여러 차례에 걸쳐서 시신을 함께 묻을 수 있어서 가족 무덤으로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5세기 후반 지방에서 먼저 등장하고 경주로 전해져 중앙귀족들의 무덤형식으로 정착하였다고 한다.
<호석을 갖춘 봉분의 형태로 복원한 모습>
<뒷편에서 본 모습>
용강동 고분은 봉분이 크게 훼손되어 ‘개무덤’ 등으로 불렸다. 농경지 가운데 있었던 폐무덤이었는데 지금은 도심 공원처럼 보인다.
<용강동 고분 옛날 사진>
<도심공원같은 모습>
토용은 흙으로 사람이나 동물을 본 떠 만든 것으로 옷이나 모자, 표정 등이 사실적이며, 사회적 지위에 따라 색깔이나 크기를 다르게 만들었다. 무덤에 같이 묻힌 토용은 동시대 당나라 무덤에서 출토되는 도용(陶俑)과 그 형태가 비슷하다.
문관상은 통일신라시대 관료의 복식을 잘 보여주고있다. 신라는 김춘추가 당나라를 다녀온 이후 당의 복식을 사용하고 있다. 여인상은 상류층 여자들의 복식을 보여주고 있다.
<문관상, 8세기, 중앙박물관>
<여인상, 8세기, 중앙박물관>
<남녀인물상, 중앙박물관>
<여인상, 중국 당나라, 섬서역사박물관>
관료제와 토용
삼국 통일 이후에 새로운 국가 운영을 위해 관료제를 정비하아였다. 이전에는 왕경인과 지방민에게 각각 차등있게 벼슬을 주었으나, 통일 후에는 동일한 벼슬을 주었다. 이 시기에는 율령에 기초하여 국가기구를 조직하였고 이를 위해 국학 등의 교육기관도 정비되었다. 관료제의 정비는 중국 문화와 복식의 수용으로 엿 볼 수 있다. 당나라에 간 김춘추가 당의 복식을 받아 들여 진덕여왕 3년(649)부터 당나라식 관복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당나라 복식은 무덤에서 출토된 토용과 허리띠장식에서 잘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남자 문관상은 서역 소그드계 인물을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여인상들은 중국 당삼채 등에 볼 수 있는 여인상과 비슷하다.
<남자 문관상, 경주박물관>
<남자상, 경주박물관>
<남자 문관상, 경주박물관>
<여자상, 경주박물관>
남자 문관상은 머리에 복두를 썼고 손에는 홀을 들었습니다. 깊은 눈과 높은 코, 덥수룩한 턱수염은 서아시아 또는 중앙아시아 소그드계 인물의 특징입니다. 턱수염이 난 또 다른 남자 인물상도 비슷한 계통으로 추정됩니다. 여자상들의 틀어 올린 머리 형태와 풍만한 신체 표현은 중국 당삼채나 채색 소조상에 보이는 귀부인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5년)
무덤에서는 여러 여인상이 출토되었는데, 체격이 큰 여인상과 작은 여인상이 같이 출토되었다. 신분 차이를 나타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여인상, 경주박물관>
<작은 여인상, 경주박물관>
<작은 여인상, 경주박물관>
<당나귀와 수레바퀴, 말, 경주박물관>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제 십이지신상은 당시 무덤 호석(護石)을 장식했던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호석(護石)가 같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도교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다. 당나라 고분에서 비슷한 청동제 십이지신상이 많이 출토되고 있어 당시의 문화교류를 보여주고 있다.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십이지신상>
1986년 용강동에 있는 돌방무덤 안에서 쥐, 소, 호랑이, 토끼, 말, 양, 원숭이 형상의 청동 십이지상 7점이 출토되었습니다. 이 십이지상들은 두 손을 앞으로 모으거나 공수한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아랫부분의 돌출된 촉을 어딘가에 꽂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5년)
<뚜껑합>
경주 용강동 고분(慶州 龍江洞 古墳), 사적, 경상북도 경주시 용강동 1130-11
이 고분은 ‘개무덤’, ‘고려장’ 으로 불리던 폐고분으로, 파괴가 심하여 1986년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이 발굴조사하였다. 석실[돌방]의 구조는 남벽의 중앙에 연도가 연결되어 정방형의 단실분으로, 네 벽 모두 장방형의 깬돌로 정연하게 쌓고 시상(屍床) 높이에서 내부로 활모양 상태를 이루게 하였다. 시상은 서벽과 북벽에 붙여 동서로 길게 놓여 있는데, 벽쪽을 제외한 가장자리에 편평한 깬돌을 쌓고, 그 내부를 깬돌과 냇돌로 채운 다음 점토로 두텁게 바르고 회칠을 해서 마무리했다. 석실[돌방] 내에서 사람의 치아와 함께 토용(土后), 흙으로 만든 말, 청동제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 토기, 구슬, 돌베개 등이 출토되었다. 토용은 높이 12~22cm로 전신상을 흙으로 빚어 만든 뒤 백토를 입히고 그 위에 붉은 색으로 채색한 것이다. 신라지역에서 출토된 다른 것들에 비해 매우 사실적이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9년)
<출처>
-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1년
- 안내문, 문화재청, 2011년
-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1년
- 위키백과,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