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 경주박물관에서 소장, 전시하고 있는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이다. 이 불상은 경주 백률사에 모셔져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경주박물으로 옮겨졌다. 높이 1.7 m로 현존하는 통일신라 금동불상 중에서는 가장 큰 규모이다. 현재는 약단지를 쥔 손이 없지만, 옛 사진에 약단지를 들고 있는 모습이 남아 있다. 원래는 금도금을 하였던 것을 후대에 금도금이 없어지고 채색을 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머리는 신체에 비해 크지 않으며 얼굴을 단정하고 세련되게 표현하고 있으나 이전 불상에 비해 사실적인 표현이나 생동감은 줄어 들었다.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두팔에 걸쳐 흘러내리고 있으며 앞가슴에는 매듭이 표현되어 있다. 신체의 표인히 평면적이며 도식적인 면이 보인다.
<옷을 입은 신체부분>
<왼쪽에서 본 모습>
<오른쪽에서 본 모습>
<약병을 든 손이 남아 있던 옛 사진,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
중군 남북조시대에는 불상이 토착화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보살상과는 달리 장신구가 많지 않으며, 얇은 천의를 ‘U’자형으로 늘어뜨린 모습이다. 비슷한 형태의 불상이 많이 조성되었으며 도식적인 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채색불상, 북제, 칭저우 용흥사 절터>
<경주 백률사>
약사불(金銅藥師佛立像, 국보), 경주 소금강산 백률사, 통일신라 8세기 후반
이 약사불은 원래 경주 소금강산 백률사(柏栗寺)에 있던 것인데, 1930년에 박물관으로 옮겼습니다. 소금강산은 불교 공인 과정에서 순교한 이차돈(異次頓)의 머리가 날아갔다고 한 곳으로, 신라인들에게는 불교 성지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약단지를 쥔 손이 없는 데도 무슨 이유로 약사불이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일제강점기에 우리 문화재 사진집인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을 보면 왼손에 약단지를 들고 있는데, 경주 사람들은 이 부처를 약사불로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온 몸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외형 틀과 내형 틀을 고정하기 위한 틀잡이(型持) 자국이 있습니다. 뒷면에는 머리 한 곳과 몸체 세 곳에 사각형 구멍이 뚫려 있는데, 모두 턱이 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별도의 구리판을 끼워 마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상의 표면을 자세히 보면, 여러 곳에 붉은색, 푸른색, 녹색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원래는 부처의 몸에서 금빛이 난다는 경전의 내용을 쫓아 금도금하였을 것이지만, 점차 도금이 없어지자 어느 때인가 불상에 채색하였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신체의 양감量感이 두드러졌던 8세기 중엽 불상과 달리 다소 밋밋해졌지만, 입가에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은 얼굴에서 8세기 중엽 불상에서나 볼 수 있는 종교적 숭고미崇高美가 느껴지는 것으로 미루어 8세기 후반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1년)
<출처>
-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1년
-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1년
- 위키백과,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