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경주박물관에서 소장, 전시하고 있는 이차돈 순교비(異次頓殉敎碑)이다. 삼국시대 신라의 불교 공인에 큰 역할을 한 이차돈을 기리는 비석으로 통일신라 헌덕왕 때(817년) 세워졌다. 비석은 높이 106 cm 이며, 화강암으로 만든 육면 기둥형태이다. 비석위에 지붕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가운데에는 이차돈이 순교하는 장면이 새겨져 있으며 나머지 면에는 정간(井間)을 치고 글자를 새겼다. 글자는 마모되어 절반 정도만 판독할 수 있으나 <삼국사기> 등에 기록된 내용일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글자를 목판에 새긴 법첩이 전래되어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이차돈 순교비>
<이차돈 순교장면을 묘사한 그림>
<그림에 대한 설명>
이때에 이르러 왕[법흥왕] 역시 불교를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이 믿지 않고 이러쿵저러쿵하며 불평을 늘어놓았으므로 왕이 난감해하였다. 〔왕의〕 가까운 신하[近臣]註 016인 이차돈(異次頓) 혹은 처도(處道)라고도 하였다.이 아뢰기를, “바라건대 소신(小臣)의 목을 베어 여러 사람들의 논의를 진정시키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본래 도(道)를 일으키고자 하는 것인데,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하였다. 〔이차돈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만약 도(道)가 행해질 수 있다면, 신은 비록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註 018 왕이 이에 여러 신하들을 불러들여 물으니 모두 다 말하기를, “지금 승려들을 보면, 박박 깎은 머리에 이상한 옷을 입고, 말하는 논리가 기이하고 괴상하여 떳떳한 도리[常道]가 아닙니다. 지금 만약에 〔승려들을〕 그대로 놓아둔다면, 후회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신들은 비록 중죄(重罪)를 받더라도 감히 명령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차돈이 홀로 말하기를, “지금 여러 신하들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무릇 특별한 사람[非常之人]이 있은 연후에야 특별한 일[非常之事]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듣건대 불교가 심오하다고 하니, 아마도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여러 사람들의 말이 견고하여 깨뜨릴 수 없다. 너만 홀로 다른 말을 하니, 양쪽을 다 따를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관리[下吏]가 장차 〔이차돈의〕 목을 베려고 하니, 이차돈이 죽음에 임하여 말하기를, “나는 불법(佛法)을 위하여 형장(刑場)에 나아가니, 부처님께서 만약 신통력이 있으시다면 내가 죽은 뒤에 반드시 이상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목을 베자, 피가 〔목이〕 잘린 곳에서 솟구쳤는데 〔피의〕 색깔이 우윳빛처럼 희었다. 여러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다시는 불교에서 행하는 일[佛事]에 대해 헐뜯지 않았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법흥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비석에는 3cm 크기로 글자를 새겼는데 대부분 마모되어 절반 정도만 판독할 수 있다. 그 내용은 <삼국사기> 등에 기록된 것과 비슷한 내용인 것으로 추정된다.
<글자가 새겨진 부분>
판독이 가능한 일부 글자와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기록된 글자와 일치하는 부분이 있어 같은 내용임을 알 수 있다.
<글자 중 절반 정도는 판독이 가능하다>
<순교비가 있었던 경주 백률사>
이차돈 순교비(異次頓殉敎碑), 경주 소금강산 백률사, 통일신라 817년
370년대 불교를 공인한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신라는 법흥왕 14년(527)이 되서야 불교를 공인하였습니다. 공인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이차돈입니다. <삼국유사> 원종홍법(原宗興法) 염촉멸신(厭觸滅身) 조(條)에는 사인(舍人)이라는 벼슬을 하던 22살 난 박염촉(朴脈觸, 506-527)의 순교가 묘사되어 있는데, 박염촉이 바로 이차돈입니다. 그의 목을 베자 젖이 한길이나 솟고, 그 머리는 금강산(소금강산)에 떨어졌으며,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헌덕왕 9년(817)에 그의 행적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 비석이 바로 백률사에 있던 이차돈 순교비입니다. 그런데 왜 백률사에 이 비석을 세웠을까요? 다시 <삼국유사>를 살펴보면, 신라 사람들은 이차돈의 머리가 떨어진 곳에 절을 세우고 자추사(刺楸寺)라 했다고 합니다. 가시(刺)가 있는 호두(楸)는 곧 밤(栗)이니, 자추사가 곧 백률사(柏栗寺)를 가리킨다 하겠습니다. 즉 이차돈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절에 그의 행적을 새긴 비석을 세운 것이지요. 비석의 한 면에는 이차돈의 순교 장면을 극적으로 묘사하였고, 나머지 다섯 면에는 정간(井間)을 치고 3cm 크기의 글자를 새겼습니다. 글자는 마멸이 심하여 아쉽게도 판독이 쉽지 않지만, 용케도 이 내용을 목판에 새긴 <흥인군신각김생서>, <원화첩>이 남아 있어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1년)
<출처>
-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1년
-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1년
- 위키백과,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