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배동에 있는 포석정지(鮑石亭址, 사적)이다. 중국 동진시대 명필 왕희지가 즐겼던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하기 위해 조성한 시설이다. 유상곡수(流觴曲水)는 정원에서 술잔을 띄우고 자기 앞으로 떠내려 올 때까지 시를 읊던 연회로, 동양의 선비나 귀족들이 즐겼다. 유상곡수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알려진 것은 4세기 경에 쓰인 왕희지의 난정서로, 문인들을 모아 굽이진 물줄기에 줄서 앉아 시를 지으며 즐겼다는 내용이 있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귀족사회에 유행했던 유상곡수연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경주 남산 서쪽 계곡에 위치하고 있다
<경주 포석정지(사적)>
포석정에는 정자를 비롯하여 별궁건물이 있었다고 하며 지금은 유상곡수연을 즐기던 석조구조물만이 남아 있다. 화강석으로 만든 수로는 길이 약 22 m이며, 높낮이 차는 5.9 cm이다.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 토하는 돌거북이 있었다고 하며, 그 아래 있던 물을 받는 원형석조가 남아 있다. 수로는 전체적으로 곡선이 강조된 타원형이며 수로의 폭은 30 cm, 깊이는 20 cm 정도이다.
<포석지에 남아 있는 수로>
<포석정 수로가 시작하는 지점에 있는 물받이>
<물이 흐르는 수로>
<삼국사기>에 경애왕 4년(927) 왕이 포석정에 잔치를 하다 후백제 견훤의 기습을 받아 왕과 신하들이 죽음을 당한 역사적인 장소로 잘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에 신라 49대 헌강왕 때 왕이 행차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그 이전에 조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포석정지(사적)>
<포석정 정원에 있는 고목>
견훤이 경애왕을 자살하게 하고 경순왕을 세우다 ( 927년 09월(음) )
〔4년(927)〕 가을 9월에 견훤(甄萱)이 고울부(高鬱府)에서 우리 군사를 습격하였다. 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장수에게 명하여 정예 병사 10,000명을 내어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견훤은 구원병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므로, 겨울 11월에 갑자기 왕경(王京)에 침입하였다. 왕은 비빈, 종실 친척들과 포석정(鮑石亭)에 가서 잔치를 열고 노느라 적병이 이르는 것도 깨닫지 못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12 신라본기 제12 경애왕,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또 포석정에 행차했을 때 남산신이 임금의 앞에 나타나서 춤을 추었는데 좌우의 신하들은 보지 못하고 왕이 홀로 보았다. 어떤 사람[신]이 앞에 나타나 춤을 추니 왕 스스로가 춤을 추어 그 모양을 보였다. 신의 이름을 혹 상심(祥審)이라고 했으므로 지금까지 나라 사람들이 이 춤을 전하여 어무상심(御舞祥審) 또는 어무산신(御舞山神)이라고 한다. (삼국유사 권 제2 제2 기이 처용랑 망해사,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 포석정지>
<포석정지 입구>
<포석정지 뒷편 경주남산 해목령 일대>
경주 포석정지(鮑石亭址, 사적), 경북 경주시 배동 454
포석정은 신라 왕실의 별궁으로, 역대 임금들이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지금은 정자 등의 건물이 모두 없어지고, 마치 전복같이 생긴 석조 구조물만 남아있는데, 화강석으로 만든 수로(水路)의 길이는 약 22m이다. 임금은 이곳에서 신하들과 더불어 잔을 띄우며 시를 읊었을 것으로 보인다. 포석정에 대한 기록은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이 신하들과 어울려 여흥을 즐길 때 남산의 신이 왕 앞에서 춤을 추자, 왕도 따라 추게되어 이로부터 ‘어무산신무(御舞山神舞)’ 라는 신라춤이 만들어졌다고 전해 준다. 경애왕(景哀王) 4년(927) 왕이 후백제 견훤(甄萱) 군대의 습격을 받아 최후를 마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유상곡수연(流鶴曲水宴)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있었으나, 오늘날까지 그 자취가 이처럼 잘 남아있는 것은 매우 드문 일로, 당시 사람들의 풍류와 기상을 엿볼 수 있는 장소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 위키백과, 2022년
- 삼국사기,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 삼국유사,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