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배동에 있는 신라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154~184 재위)의 무덤이다. 아달라왕은 7대 일성왕의 장남이다. 백제가 침입하여 백성을 잡아가자 친히 출전했으며 백제가 화친을 요청하자 포로들을 석방하였다. 봉분은 지름 18 m, 높이 5.4 m 규모이다. 현재의 무덤은 조선후기 이후 전승된 내용으로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확인된 것은 아니다. 봉분 형태로 볼 때 통일신라 횡혈식석실분으로 추정되고 있다.
<경주 배동 삼릉(사적) 아달라왕릉>
<뒷편에서 본 모습>
아달라이사금이 즉위하다 ( 154년 02월(음) ), 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 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의 장남이다. 키가 7척이며 코가 매우 커 외모가 특별하였다. 어머니 박씨는 지소례왕(支所禮王)의 딸이다. 왕비 박씨 내례부인(內禮夫人)은 지마왕(祇摩王)의 딸이다.
백제에 반격하여 이기자 백제가 화친을 청하다 ( 167년 08월(음) ), 〔14년(167)〕 8월에 일길찬(一吉湌) 흥선(興宣)에게 명령하여 병사 20,000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게 하였다. 왕이 또한 직접 기병 8,000명을 통솔하여 한강[漢水]을 따라 나아가 〔두 성에〕 이르렀다. 백제가 크게 두려워하여 잡아갔던 남녀들을 돌려보내고 화해할 것을 요청하였다.
아달라이사금이 죽다 ( 184년 03월(음) ), 31년(184) 봄 3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삼국사기 권 제2 신라본기 제2 아달라 이사금,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 배동 남산 등산로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배동 삼릉(사적)은 3개의 왕릉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앞쪽에는 신라 8대 아달라왕, 가운데에 53대 신덕왕, 뒤쪽에 54대 경명왕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경주 배동 삼릉(사적)>
<삼릉 주변 소나무숲>
배리 삼릉(拜里 三陵, 사적), 경북 경주시 배동 산 73-1
이 곳에는 신라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제53대 신덕왕 (神德王),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무덤이 한곳에 모여있어 삼릉 이라 부른다. 아달라왕(재위 154~184)은 백제가 침입하여 백성을 잡아가자 친히 군사를 출동하여 전장에 나아갔다. 그러나 백제가 화친을 요청하자 포로들을 석방하였다. 왜(倭)에서는 사신을 보내왔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58m, 높이 5.4m, 지름 18m이다. 효공왕(孝恭王)이 자손이 없이 죽자 백성들이 헌강왕(憲康王)의 사위인 신덕왕(재위 912~917, 박경휘)을 추대하였다. 견훤(甄萱)과 궁예(弓裔)의 침입이 있어 싸움에 진력하였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61m, 높이 5.8m, 지름 18m이다. 두 차례에 걸쳐 도굴을 당하여 1953년과 1963년에 내부가 조사되었다. 조사 결과 매장주체는 깬 돌로 쌓은 횡혈식 돌방[橫穴式石室]으로 밝혀졌다. 경명왕(재위 917~924, 박승영)은 신덕왕의 아들로 고려 태조 왕건(王建)과 손잡고 견훤의 대야성(大邱城)공격을 물리쳤다. 중국 후당(後唐)과 외교를 맺으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50m, 높이 4.5m, 지름 16m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 위키백과, 2022년
- 삼국사기,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