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배동에 있는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 917~924 재위)의 무덤이다. 경명왕은 신덕왕의 아들로 고려 태조 왕건(王建)과 손잡고 견훤의 대야성(大邱城)공격을 물리쳤다. 중국 후당(後唐)과 외교를 맺으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신덕왕광 경명왕 재위 기간 신라는 경주 주변 지역만 다스리는데 그쳤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죽은 후 황복사에서 화장하여 뼈를 뿌렸다고 한다. 신덕왕릉과 함께 조선후기 이후 왕릉으로 지정되었다.
<경주 배동 삼릉(사적) 경명왕릉>
경명왕이 즉위하다 ( 917년 07월(음) ), 경명왕(景明王)이 즉위하였다. 이름은 승영(昇英)으로 신덕왕(神德王)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의성왕후(義成王后)이다.
왕이 죽다 ( 924년 08월(음) ), 〔8년(924)〕 가을 8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諡號)를 경명(景明)이라 하고 황복사(黃福寺) 북쪽에 장사 지냈다. 태조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12 신라본기 제12 경명왕, 한국사 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뒷편에서 본 모습>
경주 배동 남산 등산로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배동 삼릉(사적)은 3개의 왕릉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앞쪽에는 신라 8대 아달라왕, 가운데에 53대 신덕왕, 뒤쪽에 54대 경명왕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경주 배동 삼릉(사적)>
배리 삼릉(拜里 三陵, 사적), 경북 경주시 배동 산 73-1
이 곳에는 신라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제53대 신덕왕 (神德王),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무덤이 한곳에 모여있어 삼릉 이라 부른다. 아달라왕(재위 154~184)은 백제가 침입하여 백성을 잡아가자 친히 군사를 출동하여 전장에 나아갔다. 그러나 백제가 화친을 요청하자 포로들을 석방하였다. 왜(倭)에서는 사신을 보내왔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58m, 높이 5.4m, 지름 18m이다. 효공왕(孝恭王)이 자손이 없이 죽자 백성들이 헌강왕(憲康王)의 사위인 신덕왕(재위 912~917, 박경휘)을 추대하였다. 견훤(甄萱)과 궁예(弓裔)의 침입이 있어 싸움에 진력하였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61m, 높이 5.8m, 지름 18m이다. 두 차례에 걸쳐 도굴을 당하여 1953년과 1963년에 내부가 조사되었다. 조사 결과 매장주체는 깬 돌로 쌓은 횡혈식 돌방[橫穴式石室]으로 밝혀졌다. 경명왕(재위 917~924, 박승영)은 신덕왕의 아들로 고려 태조 왕건(王建)과 손잡고 견훤의 대야성(大邱城)공격을 물리쳤다. 중국 후당(後唐)과 외교를 맺으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50m, 높이 4.5m, 지름 16m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 위키백과, 2022년
- 삼국사기,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