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서악동 귀부(보물)이다. 통일신라 7세에 만들어진 석비 거북받침돌로 태종무열왕릉비(국보)와 당(唐)의 영향을 받은 초기 석비의 형식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거북은 네발로 땅을 힘차게 딛고 있으며 목을 앞으로 길게 뺴고 있다. 용의 얼굴을 하고 있는 후대 거북받침돌과 달리 거북머리 원형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조각수법이나 형태 등에서 태종무열왕릉비와 쌍벽을 이루는 작품으로 사실적이면서도 생동감이 넘친다. 석비 머릿돌은 남아 있지 않으며 인근 서악서원에서 400여자의 글자가 적힌 비몸이 발련되었다. <삼국사기>에 기록이나 비문의 내용으로 볼 떄 삼국통일에 큰 역할을 한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629~694년)의 묘비로 추정된다.
<경주 서악동 귀부(보물)>
김인문이 당에서 죽다 ( 694년 (음) ), 김인문(金仁問)이 당나라에서 죽었는데, 나이가 66세였다. (삼국사기 권 제8 신라본기 제8 효소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당에서 죽다 ( 694년 04월29일(음) ), 연재(延載) 원년(694, 효소왕 3) 4월 29일 병으로 누워 당나라 서울에서 죽으니, 향년이 66세였다. 부음을 듣고 황제가 매우 슬퍼하며 수의를 주고 관등을 더하였다. 조산대부(朝散大夫) 행사례시(行司禮寺) 대의서령(大醫署令) 육원경(陸元景)과 판관(判官) 조산랑(朝散郞) 직사례시(直司禮寺) 모(某) 등에게 명령하여 영구(靈柩)를 호송하게 하였다.
태대각간에 추증되고 서원에 묻히다 ( 695년 10월27일(음) ), 효소대왕(孝昭大王)은 [인문에게] 태대각간(太大角干)을 추증하였다. 담당 관서에 명을 내려 연재(延載) 2년(695, 효소왕 4) 10월 27일에 서울 서쪽 언덕(西原)에 묻었다. (삼국사기 권 제44 열전 제4 김인문,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머릿돌과 비몸은 없고 거북받침돌만 김인문의 무덤 앞에 남아 있다. 태종무열왕릉비(국보)와 형식이나 모양에서 큰 차이가 없다. 화강석을 다듬은 조각기술이 상당히 세련되어 보인다. 천년이 지났음에도 원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은 화강석 자재의 선택, 조각수법 등 당시 사람들의 뛰어난 조각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반대쪽에서 본 모습>
<뒤에서 본 모습>
정면에서 볼 때 거북의 얼굴이나 자세가 상당히 위압감을 주고 있다. 용의 얼굴을 하고 있는 후대 거북받침돌과는 달리 거북얼굴을 유지하고 있다. 목에 새겨진 다섯가닥의 목주름이 사실적이다.
<정면에서 본 거북 얼굴>
<옆에서 본 모습>
거북이 땅에 발을 딛고 있는 모습을 생동감있게 표현하고 있다.
<땅을 딛고 있는 발>
<비를 올렸던 비좌>
비몸은 인근 서악서원에서 1931년에 발견되었다. 한쪽면에만 약 400여자의 글씨를 새겨놓고 있는데, 그이 업적에 대한 기록들이다.
<김인문묘 비, 경주 서악동 출토, 695년>
김인문(629~694)은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이나 문무왕의 친동생으로, 삼국 통일기 당과의 외교에서 큰 활약을 한 인물입니다. 그의 묘는 경주 서악동 태종무열왕릉 앞에 있으며, 묘 옆에는 이 비석을 꽂았던 귀부가 남아 있습니다. 이 비석은 1931년 서악서원 서쪽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비의 아래 부분인 이 비석은 한쪽 면에만 3.3cm 크기로 네모 칸을 치고 해서체로 약 400여자 새겼습니다. 그 내용은 대체로 태종무열왕이 김인문을 압독주 총관으로 제수한 사실, 백제를 항복시키고 고구려와의 전쟁에 참여한 사실 등이 새겨져 있습니다. 비문에는 비석을 세운 기록은 없지만 ‘삼국사기’에 695년 경주 서쪽에 매장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 비석 역시 695년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1년)
거북등에는 큼직하게 벌집모양의 육각형 무늬를 한줄 새겨 놓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구름문양을 새겨놓았다. 비몸을 올렸던 네모난 홈이 거북등 중앙에 있으며 그 주위로 연꽃무늬를 새겨 놓고 있다.
<겨북받침돌 등>
경주 서악동 귀부(西岳洞 龜趺, 보물), 통일신라시대 7세기
이 거북 모양의 받침돌은 삼국통일에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로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 김인문(金仁問, 629~694년)의 묘비를 세웠던 것이다. 받침돌에 있는 돌 거북은 태종무열왕릉비의 귀부와 비슷한 양식으로 네 발로 힘 있게 나아가면서 목을 앞으로 길게 빼고 이다. 앞 뒷편의 발가락이 모두 다석개인 것이 다를 뿐 기교면에서 태종무열왕릉비의 귀부와 쌍벽을 이루고 있으며, 목에 새겨진 다섯 가닥의 목주름은 사실적이면서도 자연스럽다. 거북의 등에 새긴 큼직한 육각무늬 역시 조각솜씨가 뛰어나며, 등 주위에 구름무늬를 새긴 것과 그 바깥쪽에 구슬을 꿰놓은 듯한 무늬를 돌린 것은 독특하다. 등에는 비석을 받쳐 세웠던 직사각형의 구멍이 뚫어져 있다. 비의 몸돌과 머릿돌은 없어졌는데, 1931년 서악서원에서 비석 조각이 발견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귀부는 7세기 귀부 양식의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용머리로 변화되기 이전 귀부의 원형을 지니고 있어서 한국 석비 받침돌의 초기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7년)
<출처>
- 안내문, 경주시청, 2017년
-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1년
-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 삼국사기,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