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신라 제47대 헌안왕(憲安王, 재위 857~861, 김의정)의 능이다. 헌안왕은 신무왕의 이복동생으로 조카인 문성왕의 뒤를 이어서 왕위에 올랐다. 호족세력이 세력을 키워나가던 시기 반란을 통해 집권했던 세력으로 신라 왕실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문성왕릉과 함께 진흥왕릉 비슷한 규모의 작은 봉분을 쌓아 왕릉을 조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 능묘제도의 영향을 받아 석물과 십이지신상 등으로 장식했던 이전 왕릉과는 달리 진흥왕릉의 형태를 따르고 있다. 호족세력이 경주로 들어오는 관문에 해당하는 지역에 왕릉을 조성했다.
<경주 헌안왕릉(사적)>
헌안왕이 즉위하다 ( 857년 09월(음) )
헌안왕(憲安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의정(誼靖)이다 또는 우정(祐靖)이라고도 한다.. 신무왕의 배다른 동생이다. 어머니는 조명부인(照明夫人)인데, 선강왕(宣康王)의 딸이다. 문성왕의 유언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권 제11 신라본기 제11 헌안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헌안왕이 죽다 ( 861년 01월29일(음) )
5년(861) 봄 정월에 왕이 병으로 침상에 누워 위독해지자 좌우의 신하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과인은 불행하게도 아들은 없고 딸만 있다. 우리 나라의 옛일에 비록 선덕(善德)과 진덕(眞德)의 두 여왕이 있었다고는 하나, 그것은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일[牝雞之晨]에 가까우니 본받을 수 없다. 사위 응렴(膺廉)은 나이는 비록 어리지만 어른스러운 덕성을 지녔으니, 그대들이 그를 왕으로 세워 섬긴다면 반드시 조상의 위대한 업적을 떨어뜨리지 않을 것이고, 과인이 죽더라도 또한 이름을 오래 남길[不朽]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달 29일에 죽으니, 시호를 헌안(憲安)이라 하고 공작지(孔雀趾)에 장사를 지냈다. . (삼국사기 권 제11 신라본기 제11 헌안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진흥왕릉, 진지왕릉, 문성왕릉, 헌안왕릉이 있는 능역>
<능역 앞 절터>
김양은 신무왕을 도와 민애왕의 뒤를 잇게 하였으며, 문성왕을 받들었다. 그뒤 헌안왕이 무열왕릉 곁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장보고와 함께 신무왕의 정변을 주도한 인물로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 무열왕릉 옆에 묻은 것으로 보인다. 헌안왕이 문성왕릉과 김양의 무덤을 조성했다.
<태종무열왕릉 앞 김양의 무덤>
신라 헌안왕릉(新羅 憲安王陵, 사적), 경북 경주시 서악동 산 92-2
이 능은 신라 제47대 헌안왕(憲安王, 재위 857~861, 김의정)이 모셔진 곳이다. 진흥왕릉(眞興王陵)과 함께 선도산 (仙桃山)의 남쪽으로 뻗어내린 구릉 말단부의 능선상에 위치해 있다. 지름 15.3m, 높이 4.3m 되는 이 능의 밑둘레에는 자연 석을 이용하여 무덤을 보호하고 봉토(封土)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였으나, 지금은 몇 개만 드러나 있다. 신무왕(神武王)의 동생으로 조카인 문성왕(文聖王)의 뒤를 이은 왕은 저수지를 수리하여 흉년에 대비하게 하는 등 농업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신라진흥왕릉고, 新羅眞興 王陵考」에서 태종 무열왕릉 뒤에 있는 서악동 고분군 4기의 고분을 진흥·진지(眞智)·문성(聖) ·헌안(憲安)왕릉으로 추정한 바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출처>
-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 삼국사기 권 제11 신라본기 제11 헌안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