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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충청감영 측우기(국보), 현존하는 조선시대 측우기

서울 종로구 국립기상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공주충청감영측우기(국보)이다. 조선후기 헌종 때(1837년)에 제작되어 공주에 있던 충청감영에 설치되었던 측우기이다. 현존하는 유일한 조선시대 측우기로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1971년 환수되었다. 중앙정부에서 제작하여 전국에 배포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던 기상관측 관련 제도와 기술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 국보, 현종 3년(1837), 높이 31 cm 지름 15 cm>

이 측우기는 높이 31.2 cm, 지름 14.5 cm 크기이다. 표면에 금영측우기라는 명칭과 ‘높이 1자 5치, 직경 7치’라는 크기, 제작연대 등을 표현한 글자가 새겨져 있다.  ‘도광정유제(道光丁酉製)’란 글자는 헌종 3년(1837)에 제작되었음을 표현하고 있다. 조선 세종 때 강우량을 관측한 이래 그 전통이 이어져 왔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충청감영계록>에는 1836년부터 1895년까지 약 300건의 관측기록이 남아 있다.

<표면에 새겨진 글씨>

호조에서 아뢰기를,
“각도 감사(監司)가 우량(雨量)을 전보(轉報)하도록 이미 성법(成法)이 있사오니, 토성(土性)의 조습(燥濕)이 같지 아니하고, 흙속으로 스며 든 천심(淺深)도 역시 알기 어렵사오니, 청하옵건대, 서운관(書雲觀)에 대(臺)를 짓고 쇠로 그릇을 부어 만들되, 길이는 2척이 되게 하고 직경은 8촌이 되게 하여, 대(臺) 위에 올려 놓고 비를 받아, 본관(本觀) 관원으로 하여금 천심(淺深)을 척량(尺量)하여 보고하게 하고, 또 마전교(馬前橋) 서쪽 수중(水中)에다 박석(薄石)을 놓고, 돌 위를 파고서 부석(趺石) 둘을 세워 가운데에 방목주(方木柱)를 세우고, 쇠갈구리[鐵鉤]로 부석을 고정시켜 척(尺)·촌(寸)·분수(分數)를 기둥 위에 새기고, 본조(本曹) 낭청(郞廳)이 우수(雨水)의 천심 분수(分數)를 살펴서 보고하게 하고, 또 한강변(漢江邊)의 암석(巖石) 위에 푯말[標]을 세우고 척·촌·분수를 새겨, 도승(渡丞)이 이것으로 물의 천심을 측량하여 본조(本曹)에 보고하여 아뢰게 하며, 또 외방(外方) 각 고을에도 경중(京中)의 주기례(鑄器例)에 의하여, 혹은 자기(磁器)를 사용하던가, 혹은 와기(瓦器)를 사용하여 관청 뜰 가운데에 놓고, 수령이 역시 물의 천심을 재어서 감사(監司)에게 보고하게 하고, 감사가 전문(傳聞)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93권, 세종 23년 8월 18일 임오 4번째기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측우기를 올려놓았던 측우대는 남아 있지 않으나 대구 경상감영에 있던 측우대가 남아 있어 그 형태를 추정해 볼 수 있다.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국보, 영조 46년(1770), 높이 46 cm, 국립기상박물관>


<옆에서 본 모습>


<뒤에서 본 모습>


<옆에서 본 모습>


<위쪽에서 본 모습>

<공주 충청감영 선화당>

1837년(헌종 3)에 제작된 측우기로 측우대는 소실됐다. 조선시대 충남 지역 감독관청이었던 공주감영 (금영錦營) 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1915년경 일본인 기상학자 와다 유지에 의해 국외로 반출되었다가 1971년 환수되어 기상청에서 보관해왔다. 측우기는 땅에 스며든 물의 깊이를 측정하던 이전의 강우 측정 방식에서 벗어나 강수량을 정량적으로 측정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측우기는 중앙에서 제작해 전국 감영에 보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까지는 본 측우기만이 전한다. 조선시대 측우 제도를 증명하고 있는 본 측우기의 제작 시기와 크기 등이 중단 바깥 면에 새겨진 명문에 있다. 이는 측우기가 일련의 제작 지침에 따라 제작되었음을 나타낸다. 측우기의 평균 높이는 31.2cm, 지름은 14.5cm인데 이를 주척으로 환산했을 때 명문에 표기된 ‘높이 1자 5치, 직경 7치’ 와 근사한 값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측우기가 주척을 기준으로 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곧 측우기 각 동체(胴體)가 약 5치의 크기로 제작되어 자를 대지 않고도 대략적인 강수량을 알 수 있는 척도로 기능했음을 말해준다. 19세기에 제작되었지만 세종 대 이후 강우를 과학적으로 측정하는 전통이 그대로 이어져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측우기는 전국적인 관측 체계를 구축한 것은 물론 지속적 관측을 통해 농업 생산량을 증가시키는 데도 기여했다. 공주충청감영측우기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유물일 뿐만 아니라 국가의 관측 제도 정비, 과학의 발달, 도량형의 통일 등 중앙집권화된 국가 체제의 완비를 의미한다. (안내문, 국립기상박물관, 2022년)

<출처>

  1. 안내문, 국립기상박물관,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5. 세종실록 93권, 세종 23년 8월 18일,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