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통영시 여황로에 있는 통영 충렬사(사적)이다. 임진왜란 극복에 큰 업적을 남긴 충무공 이순신을 모시기 위해 세워진 사당이다. 선조 때(1606년) 왕명에 의해 7대 통제사 이운용이 창건했으며 현종 때(1663년)에 남해 충렬사와 함께 국왕으로부터 사액을 받았다. 삼도수군통제영에서 직접 운영했던 곳으로 교육중심의 서원과는 달리 제사를 올리는 제향 중심 서원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산 현충사, 남해 충렬사와 함께 충무공을 모시는 대표적인 사당으로 구한말 서원철폐령 때 폐지되지 않았던 사당이다. 이곳에는 명나라 신종황제가 내린 ‘명조팔사품’과 정조가 충무공전서를 발간하고 1질을 내리면서 직접 지어내린 제문 등을 소장하고 있는 유서깊은 사당이다.
<통영 충렬사>
통영충렬사(統營忠烈祠), 사적
통영충렬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선조 39년(1606)왕의 명령에 따라 통제사 이운룡(李雲龍)이 세웠다. 현종 4년(1663)에 임금으로부터 ‘충렬사’ 라는 현판을 받은 사액사당이 된 이래로 역대 수군통제사들이 매년 봄,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충렬사는 정당, 내삼문, 동재, 서재, 중문, 숭무당, 경충재, 외삼문, 강한루, 유물전시관, 정문 등의 건물로 이루어 졌다. 경내에는 숙종 7년(1681)에 세워진 ‘통제사충무이공충렬묘비(統制使忠武李公忠烈廟)’와 충무공 후손 통제사 비각이 있다. 또한 유물전시관에는 정조의 명에 의해 발간한 <충무공전서>와 정조가 직접 지어 내린 제문 등이 전시되어 있다. 고종 8년 (1871)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그대로 존속되어 오고 있는 이충무공 사당으로는 통영충렬사가 유일하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충렬사는 충무공 이순신을 모신 대표적인 사당으로 제사를 모시는 제향 중심의 공간배치를 잘 보여주고 있다. 경사진 지형에 누각인 강한루, 외삼문, 제사를 준비하는 강당 성격의 숭무당과 경충재가 공간, 중문과 동,서재가 있는 공간, 내삼과 위패를 모신 정당이 있는 공간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서원과는 달리 동,서재와 강당 건물의 규모가 크지 않아 교육기능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한루와 충렬사 들어가는 길>
<강한루에서 내려다 보이는 모습>
외삼문 양쪽에는 많은 비석들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이항복이 비문을 지은 충렬공비이며 충무공 후손으로 통제사를 지낸 인물들을 기리는 비석 등이 있다.
<외삼문>
<오른쪽 비각>
<왼쪽 비각>
<통영 충렬묘비>
통영 충렬묘비
통영 충렬묘비는 충무공 이순신의 충절과 업적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세운 비다. 비문은 광해군 6년(1614) 좌의정 이항복이 지었고, 비석의 위쪽에 ‘통제사 충무이공 충렬묘비명(統制使忠武李公忠烈廟碑銘’이라고 되어 있는 전서체의 글씨는 김수향이 썼다. 비문의 끝부분에 묘비를 세우게 된 경위를 밝히고 있는데 이것은 송시열이 기록한 것이다. 이후 숙종 7년(1581)에 제60대 통제사 민섬이 머릿돌과 거북받침대를 갖추어 세웠다고 한다. 비문에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공훈에 대한 칭송과 그에 대한 존경과 사몽의 내용이 담겨 있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외삼문과 비각들>
외삼문을 들어서면 큰 규모의 강당건물이 있는 일반적인 서원이나 사당과는 달리 양쪽에 강당 성격 건물인 숭무당과 경충재가 자리잡고 있다. 통영 앞 바다를 향하고 있는 경관을 고려한 공간배치인 것으로 보인다.
<경충재>
<숭무당>
강당 건물들이 있는 공간을 지나면 안쪽에 일반적인 서원과 마찬가지로 양쪽에 기숙사 건물이 동,서재가 배치되어 있다.
<동재>
<서재>
위패를 모신 정당은 충무공 이순신을 모시는 공간으로 일반적인 서원과는 달리 같이 모신 인물은 없다. 국가 주도로 세워진 충렬사의 성격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정당 내부에는 충무공 영정과 팔사품을 그린 병풍이 있다.
<내삼문>
내삼문(內三門)
정당의 출입문으로 삼문 중 가장 안쪽의 문이다. 단아하면서도 정교한 건축양식으로 조선중기 삼문조형(三門造形)의 정화(精華)이다. 솟을삼문으로 신문(神門)의 양쪽 초석을 해태로 조각하고 안팎에 활주(버팀기둥) 8개로 지붕의 무게를 받쳤는데 각 활주 아래의 석자는 8각 돌기둥이다. 통용문인 양쪽 협문(門)을 낮게 만든 것은 몸을 낮추고 삼가는 몸가짐으로 출입하기 위함이다. 익공식 맞배지붕 에 겹처마이며 삼문의 창방 위를 화반(花盤)으로 장식하였고 신문(神門) 양쪽의 봉황은 연화단청문양(蓮花丹靑紋樣:단청으로 그린 연꽃무늬)으로 조각하여 꾸몄다. 제향이 시작되기전에 헌관은 이 내삼문 단하(段下)에서 북향립(北向立 북쪽을 향하여 섬)하였다가 홀창(唱:제 향의 순서 부름)에 따라 집사의 안내를 받아 계단을 오른다. 앞 뜰에는 매년 공의 탄신제(4월28일) 때 중요무형문화재 제21호인 승전무(勝戰舞)가 시연(施演)된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위패를 모신 정당>
<정당 내부>
정당(正當)
정당은 민족의 수호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령에 제향올리고 공의 정신과 위훈을 만대(萬代)에 기리기 위하여 제7대 통제사 이운룡(李雲龍)이 선조(宣祖:제14대)의 명을 받아 세웠다. 이충무공 한분의 위패를 모시고 역대 통제사가 약 300년간 제향을 받들어 온 가장 신성한 장소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맞배지붕으로 1606년에 창건하였는데 정당의 후원은 충절을 상징하는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기와지붕의 용마루에 새긴 주역(周易) 팔괘(八卦)는 음양의 조화(造化)와 만물이 화생(化生)하는 역 (易)의 원리를 담고 있으며 제의(祭儀)는 정통 유교의 법식을 고수한다. 1895년 통제영이 폐영되어 관급(官給)이 끊어지고, 경술국치(庚戌國恥:1910년 한일병탄)를 당하여 제사를 받드는 주체가 없어지자, 이 곳 지방민들이 기미년 독립만세운동(1919)을 계기로 충렬사영구보존회(현 재단법인 통영충렬 사의 전신)를 결성하여 제향의 맥을 이어왔으나 일제강점기에는 왜경이 장군의 위패를 칼로 부수고, 삼문의 태극문 양에 덧칠하여 일장기(日章旗)로 바꾸고 또 제사를 올리지 못하도록 정당에 못질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을 맞아 이승만 대통령,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 선생을 필두로 송진우 · 여운형 · 신익희 등 많은 광복 지사들이 환국 참배하여 건국의 결의를 다진 유서깊은 사당이며 노산(驚山) 이은상(李殷相) 선생이 국역편찬한 ‘이 충무공전서’의 산실이기도 하다. 정당을 향하여 중앙 좌측의 주련은 명나라 진린(陳麟:천린) 도독이 이충무공을 찬양한 어록의 한 구절인 ‘욕일보 천지공(浴日補天之功): 해를 씻어 빛나게 하고 하늘의 구멍을 메운 큰 공’이며, 우측은 이충무공께서 임전결의(臨戰 決意)하신 ‘서해어룡동(誓海魚龍動) 맹산초목지(盟山草木知)’에서 따온 것으로 조선 고종조의 명신이자 예서체의 대가인 신관호(申觀浩) 제187대통제사의 휘필이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내삼문>
<충렬사 동백나무>
통영 충렬사 동백나무
동백나무는 열대 및 아열대에서 자라는 차나뭇과에 속하는 상록교목으로 일본, 중국, 한국 등지에서도 따뜻한 지역에 분포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남쪽 해안이나 섬에서 자란다. 동백꽃은 붉은색 또는 흰색으로 매우 아름답다. 대게 이른 봄에 피지만 가을부터 꽃이 피기 시작하므로 개화시기에 따라 동백꽃을 춘백, 추백, 동백으로 나누어 부르기도 한다. 열매는 늦가을에 붉게 익는다. 열매의 씨앗에서 짜낸 기름은 머리에 바르거나 등잔을 밝히는 용도로 사용되었고 약으로도 쓰였다. 이 동백나무들은 충렬사 입구 길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 나무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본래 네 그루였으나 지금은 두 그루만 남아 있다. 이 나무들은 키와 둘레가 각각 6.3 m, 1m 이다. 또 사방으로 넓게 퍼진 가지는 지름이 7 m나 될 만큼 큰 나무이다. 나이는 400여 년 정도로 추정된다. 이곳 통영에서는 음력 3월이면 거세 바닷바람을 달래기 위해 풍신제인 ‘할만네’를 지냈다. 그때 동네 아낙들이 정한수 물동이에 동백꽃을 띄우는 풍습이 있었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출처>
-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