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거제시 둔덕면에 있는 둔덕기성(屯德岐城, 사적)이다. 거제도 섬의 관문이자 연안 해로의 중요한 거점이 견내량이 내려다 보이는 우봉산(해발 325 m) 정상부를 둘러싸고 있는 테뫼식 산성으로 7세기 신라 때 처음 쌓았으며 고려 때 보수하여 다시 사용하였다. 발굴조사 결과 ‘상사리(裳四里)’라는 글자가 있는 기와를 비롯하여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어 신라 문무왕 때 설치된 상군(裳郡)과 경덕왕 때 거제군의 치소(治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중기 무신란 때 폐위된 의종이 유배되었던 곳으로 폐왕성(廢王城))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초 고려 왕족들이 유배된 장소로 기록에 남아 있다. 남해안 연안 해로를 통제하기 위해 주요 거점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거제 둔덕기성(사적)>
둔덕기성은 우봉산 정상을 둘러싸고 있는 테뫼식 산성으로 둘레는 약 526 m 정도이다.성벽의 높이는 최고 4.95 m 정도로 중간크기의 납작한 돌을 촘촘히 쌓은 통일신라 산성의 축성방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동, 서, 남문 3곳에 성문을 두고 있는데 서문은 통일신라 산성에서 볼 수 있는 현문식 산성의 특징이 잘 남아 있다. 고려시대에도 보수하여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문루을 올렸던 초석들이 성문터에 남아 있다.
<둔덕기성 공간배치>
<둔덕기성 내부로 올라가는 탐방로>
<복원작업하는 과정에서 만든 내부로 들어가는 통로(성문터는 아님)>
동문과 남문 사이 성벽 일부를 복원했는데 판석 형태의 돌을 촘촘히 쌓아 올린 신라 산성의 축성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성벽 위에는 목책을 올려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복원된 성벽(바깥쪽)>
<복원된 동남쪽 성벽(위)>
<복원된 성벽 끝부분>
<남문 부근 성벽>
<남문 부근>
남문은 동쪽으로 거림리 일대, 서쪽으로는 견내량과 한산대첩이 있었던 통영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남쪽 거림리 일대에서 성안으로 출입하는 성문인 것으로 보인다. 발굴조사 결과 고려 때 성벽을 보수하면서 성문을 새로 낸 것으로 밝혀졌다. 성문터 내부에는 앞면 1칸, 옆면 1칸 규모의 문루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초석이 확인되었다.
<남문터>
<남문과 주위 성벽(바깥쪽)>
남문지
둔덕기성의 남문지는 동쪽으로는 거림리 일대, 서쪽으로는 견내량(見乃梁)을 비롯한 통영 일대가 조망되는 곳이다. 발굴조사를 통해 남문지는 고려 제18대 의종(재위 1146~1170)이 무신난으로 폐위된 뒤, 거제도(둔덕기성)에 유배된 시기(1170년)를 전후하여 축조된 것으로 밝혀 졌다. 둔덕기성 남문의 경우, 고려시대에 삼국시대 성벽 바깥쪽으로 성벽 일부를 확장하면서 새로 문을 낸 것으로 밝혀졌다. 문지는 허튼층쌓기하여 삼국시대 문지에 비해 정교함은 떨어 진다. 통로부 내측에 전면 1칸, 측면 1칸의 초석이 남아 있어 작은 문루(門樓)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동문지와 서문지 사이의 간문(間門)으로 보인다. 한편, 고려시대 남문지 안쪽에서 확인된 삼국시대 성벽은 바른층쌓기 하였으며, 하부에는 성벽 보강시설인 기단보축이 확인되었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남문터 서쪽 성벽(바깥쪽)>
<남문터 서쪽 성벽(안쪽)>
서문은 서쪽 견내량과 통영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발굴조사 결과 둔덕기성이 처음 축조될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고려 때 성을 수리하면서 성문을 크게 하고 문루를 세웠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문터 내부에는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큰 문루가 있었던 초석이 남아 있다. 견내량과 통영 방향에서 성안을 출입할 때 사용된 성문으로 보인다.
<서문 터>
<서문과 문루 건물 초석>
<서문 남쪽 성벽(안쪽)>
<서문 남쪽 성벽(바깥쪽)>
<서문과 북쪽 성벽(바깥쪽)>
<서문 북쪽 성벽(안쪽)>
서문지(西門址)
둔덕기성 서문지는 서쪽으로 견내량(見乃梁)을 비롯한 통영일대가 한눈에 조망되는 곳이다. 발굴조사 결과, 서문지는 둔덕기성이 처음 축조된 삼국시대부터 있었으며, 고려 제18대 의종(재위 1146~1170)이 무신난으로 폐위된 뒤, 거제도(둔덕기성)에 유배된 시기 (1170년)를 전후하여 동문지 및 남문지와 함께 수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통로부의 고려시대 계단시설 아래에 삼국시대의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서문지도 붕괴된 삼국시대 문지를 고려시대에 수축하여 사용 하였는데, 출입이 용이한 평문식으로 조사되었다. 문지는 비교적 정교함이 떨어지는 허튼층 쌓기 하였으며, 통로부 내측에 전면 3칸, 측면 2칸의 초석이 남아 있어 웅장한 문루가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서문 북쪽으로는 주위를 감시하고 군사를 지휘할 수 있는 장대역할을 정상부가 있다. 정상부에는 전투에 사용하기 위해 몽돌을 모아 놓은 석환군과 식량 등을 저장했던 저장고가 있다. 정상부 전망대에 북쪽으로 고성 앞바다와 견내량 해협, 서쪽으로는 통영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임진왜란 때 격전지였던 한산대첩 당시 견내량을 지나는 배의 움직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이다.
<북쪽 성벽>
<정상부 전망대>
<북쪽 고성 앞바다>
<견내량과 통영 앞바다>
<석환군>
석환군(石丸群)
석환은 인근 바닷가의 몽돌을 투석용 무기 등으로 사용하기 위해 성내에 가져다 놓은 것이다. 대부분 직경 10~20cm 크기의 원형 및 타원형 몽돌로서 성내 곳곳에 산포되어 있다. 특히, 성내 정상부 암반의 남쪽에 연접한 장타원형의 넓은 범위에서 약 2,000여 개 정도로 추산되는 석환군이 조사되었다. 우리나라의 삼국 ~ 조선시대 성곽에서 성내 농성시 방어용 투석자로 사용된 석환이 흔히 발견되는데 이와 같이 대량으로 확인된 경우는 거의 없으며, 남해 임진산성에서 석환군이 확인된 바 있다. 한편, 우리나라 산성 중 성내에 성황당을 짓고 마을을 수호하는 성황신에 제사를 지내거나 산천에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으로서의 기능을 겸비하는 사례도 있어 둔덕기성의 제사장으로 이용하였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주변에서 출토된 기와 및 도기편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저장고 터>
저장고
둔덕기성의 성내 최북단에 위치하는 저장고는 성내에서 소요되는 여러 가지 식품류와 경작 등을 위한 씨앗류 등의 지장을 위해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저장고는 먼저 고려시대 북쪽 성벽 하부의 자연암반층 및 기존 대지조성 층을 1~1.7m 깊이까지 방형으로 굴착한 후, 굴착면에 덧대어 방형석축을 조성하였다. 그 후 바닥과 사방에는 0.6~0.7m 두께의 점토를 발라 방온、방습처리를 하였다. 그리고 내부 에는 정방형으로 ‘田’자 형태의 목곽을 설치하고, 내부에 ‘十’ 자상으로 구획된 4개 의 공간에는 평평한 할석을 깔아 바닥면을 조성하였다. 저장고는 크게 1회 이상 수리, 보수한 흔적이 확인되었으며, 내부에서 출토된 토기, 철기, 기와류 등으로 보아 삼국 ~ 통일신라시대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둔덕기성 저장고는 삼국시대에 축성된 인근의 고령 주산성 의 저장고(목곽고)와도 동일한 구조 및 성격을 보이고 있어 삼국시대 산성의 성내 저장고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동문은 조선시대 오양역이 설치되었던 북쪽의 오량성과 남쪽 거림에서 올라오는 길이 만나는 지점에서 성안으로 들오은 출입문이다. 동문은 사다리 등을 이용하여 출입하는 현문식 성문 구조가 남아 있다. 성문 안쪽에는 고려 때 문루를 설치했던 초석들이 남아 있다.
<동문과 남쪽 성벽>
<동문터>
<현문식 성문>
<동문 북쪽 성벽(안쪽)>
<동문 북쪽 성벽(바깥쪽)>
<동문 남쪽 성벽(바깥쪽)>
동문지
둔덕기성 동문지는 북쪽의 오량리와 남동쪽의 거림리에서 이어지는 두 갈래 길이 만나는 종착지로서, 삼국 ~ 고려시대의 거제 치소지가 위치하는 거림리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주요 통로로 추정된다. 발굴조사 결과,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 되었 으며, 고려 제18대 의종(재위 1146~1170)이 무신난으로 폐위된 뒤, , 거제도 (둔덕기성)에 유배된 시기(1170년)를 전후하여 서문지 및 남문지와 함께 수축된 것으로 밝혀졌다. 고려시대 문지 아래에서 확인된 삼국시대의 동문지는 사다리 등을 통해 성내로 진입할 수 있는 현문(懸門, 일명 다락문) 구조이다. 통로부 너비는 약 8.8m에 이르며, 문지의 성벽 두께도 7~9m로 주변 성벽보다 훨씬 두껍게 축조하였다. 외벽은 바른층쌓기로 정연하게 축조 하였으며, 기저부에는 성벽이 무너지지 않게 기단보축시설로 보강하였다. 고려시대의 동문지는 붕괴된 삼국시대 문지를 수축하여 현문식으로 사용하였다. 문지 성벽은 비교적 정교함이 떨어지는 허튼층쌓기 하였으며, 통로부 내측에 전면 3칸, 측면 2칸의 초석이 남아 있어 상당히 웅장한 문루였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둔덕기성은 통일신라때 거제군의 치소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내부에는 통일신라와 고려 때 치소역할을 했던 건물터가 있으며 식수로 사용하기 위해 물을 모아 두었던 연못 형태의 집수조가 남아 있다.
<둔덕기성 내부>
<건물터>
<건물터>
<복원된 집수조>
성내 건물지
성내 건물지는 둔덕기성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시설로서 둔덕기성 운용 당시의 정치, 행정, 생활, 제의 등과 관련된 시설로 구분된다. 특히, 성내 중심 지역에 위치한 이곳은 기성의 핵심시설이 위치할 것으로 추정되어 2016년 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삼국 ~ 고려시대에 해당하는 건물지의 기단석열, 초석 및 적심, 수혈 등의 유구가 남아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둔덕기성 남쪽>
거제 둔덕기성, 사적
거제 둔덕기성(屯德崎城)은 7세기 신라 시대 축조 수법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현문식(懸門式) 구조인 동문지와 삼국시대에 처음 쌓고 고려 시대에 보수된 성벽 등은 축성법의 변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학술적 자료이다. 이 유적에서 인화문 토기, ‘상사리’라는 글자가 새겨진 명문기와, 청자 접시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됨에 따라 이 성은 신라 문무왕대 설치된 상군(裳郡) 및 경덕왕대 거제군의 치소성(治所城)으로 추정된다. 또한 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에 따르면, 고려 의종이 3년간 거제도에 유배됐고 조선 초 고려 왕족들이 유배된 장소로도 기록되어 있는 등 역사성을 지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사등면과 둔덕면의 경계가 되는 우봉산 자락에 위치하는데, 성벽의 둘레는 약 526 m이고 최고 높이가 4.85 m이다. 성 안에는 여러 곳에 건물터와 연못 터가 남아 있고, 북쪽에는 기우제와 산신제를 지냈던 제단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의종이 배를 타고 건넜던 수로 변에는 아직도 ‘전하도목(殿下渡目)’이라 불리는 지명이 있으며 ‘고려골’이라 부는는 곳에는 고려인들의 무덤이 남아 있다. 왕을 받들어 왔던 반씨 성을 가진 장군의 후손들이 지금도 둔덕면에 살고 있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출처>
-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 위키백과,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