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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금당실마을

경북 예천군 용문면에 있는 금당실마을이다. 조선시대 천하명당 십승지로 손꼽혔던 마을이다.  북쪽으로는 용문산을 비롯하여 백두대간에서 뻗어 내려온 높은 봉우리들이 둘러싸였으며 서남쪽으로는 금곡천이, 동쪽으로는 선동천이 흐르고 있어 배산임수의 풍수지리적 요건을 잘 갖추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에 고인돌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청동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지만 기록상으로는 15세기초부터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이후 함양박씨, 원조변씨가 들어오면서 집성촌을 이루었으며 여러성씨들이 모여살고 있는 전형적인 부촌(富村)이다. 마을에는 함양박씨 입향조를 모신 금곡서원을 비롯하여 재실과 사당들이 많이 남아 있으며 상당히 큰 규모의 고택들이 큰 마을을 이루고 있다. 대표적인 고택으로는 추원재, 사괴당, 반송재 등이 있다. 해방이후 고쳐지은 것으로 보이는 시골집에서도 옛 고택의 특징이 많아 남아 있어 화려했던 옛 마을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마을에는 학교와 면사무소, 전통시장 등도 모여있어 이곳이 지역의 중심지임을 알 수 있다.

<예천 금당실마을>

<금당실마을 공간배치>

마을 탐방은 동북쪽에 있는 한옥체험관에서 출발하면 편리하다. 돌담장이 있는 골목길을 따라서 걸어가면 중산층이 살았던 초가집을 비롯하여 마을에 남아 있는 크고 작은 고택들을 살펴볼 수 있다. 고택들은 대부분 대지가 넓고 건물도 비교적 큰 편으로 당시 중상류층이 모여 살았던 마을임을 알 수 있다.

<금당실마을 한옥체험관>

<마을 돌담길>

골목길을 걸어서 들어가면 초가집들을 볼 수 있다. ‘유천초옥’은 최근에 다시 지은 집이지만 앞면 4칸의 비교적 큰 규모의 초가집이다. 당시 중산층이 살았던 것으로 집으로 보인다. 김대기가옥은 1920년대에 지은 건물을 최근 수리한 것이다.

<유천초옥>

유천초옥, ‘-‘자형의 안채와 서편에 아래채가 있으며, 1900년대 고가옥을 2008년도에 개축하였다. 안채는 정면 4칸 목조로서 홑처마에 안방과 사랑방 전면에 마루가 있는 한식 초가이다. 아래채는 정면 3칸의 작은 사랑채로 홑처마에 팔작지붕이며, 1칸은 화장실로 되어 있고 곳간과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안내문, 예천 금당실마을, 2022년)

<김대기 가옥>

김대기 가옥, 독립운동가 김형식 선생의 1920년대 고가옥을 2008년도 개축하였다 ‘-‘자형의 본채를 중심으로 우측에는 아래채, 좌측에는 헛간채로 각각 독립채로 구성되어 있고, 협문과 우물, 담장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초가이다. 본채는 정면 3칸이고 안방 옆에 마루를 설치하였으며, 홑처마로 구성되어 있다. 아래채는 정면 3칸으로 온돌방, 곳간, 마구의 초가 한옥으로 신축하였다. (안내문, 예천 금당실마을, 2022년)

<마을안쪽 초가집>

<마을 돌담길>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중상류층이 살았던 큰 규모의 고택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진사당’은 17세기에 처음 지었다고 하는 안채와 사랑채가 ‘ㅁ’장을 하고 있는 전통적인 한옥으로 비교적 큰 규모의 고택이다.

<진사당>

진사당, 1680년
옛날 권진사가 살았다고 전해지는 ‘ㅁ’자형의 한옥으로 안채가 정면 5칸 측면 1칸 폭이 3량집으로 폭이 좁은 점이 특징이다. 안채와 사랑채가 팔작지붕으로 연결되어 있으나 지금은 허물어져 흔적이 없다. 안채는 정면 5칸 홑집으로 홑처마에 팔작지붕이다. 대청 위 대들보는 자연스럽게 휘어진 곡재를 사용하여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부엌 위에는 마루로 꾸며진 찬방이 있으며 광 위에 마루로 고미반자를 설치하여 공간 활용이 특이하다. (안내문, 예천 금당실마을, 2022년)

마을에는 한옥을 허물고 새로 지은 집들도 있는데 지금은 작은 집처럼 보이지만 문간채가 있는 것으로 볼 때 원래 고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골목길>

<대문채가 있는 집>

‘오미소서’는 19세기에 지은 집으로 안채와 사랑채, 대문, 곳간, 마구간 등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양반가옥이다.

<오미소서>

오미소서, 1871년
오미소서는 오미봉 산 아래 글 읽는 보금자리라는 의미이며, ‘-‘자형의 안채와 행랑채는 남북의 같은 축선으로 배치되어 있고, 1871년에 건축하여 1920년에 중수하였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5량집으로 홑처마 팔작지붕이며, 행랑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3량집으로 흙벽이다. 가장 우측에는 대문이 있고, 대문 좌측으로 온돌방, 곳간, 마구간, 디딜방앗간 등이 갖추어져 있다. (안내문, 예천 금당실마을, 2022년)

‘덕용재’는 20세기초에 지은 집으로 전통적인 ‘ㅁ’자형 형태를 하고 있다. 옛 양반가옥의 형태를 계승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덕용재>

<옆에서 본 모습>

<뒤에서 본 모습>

덕용재, 1920년
덕용재란 ‘덕을 지닌 용’이라는 뜻과 함께 용문에서 그러한 위인이 배출되기를 기원하는 뜻도 담고 있다. 2005년 고가옥을 중수할 때 나온 상량문에 의하면 봉화금씨 매헌 금보의 14세손인 금성락이 그 종택으로 건립하였다고 한다. 전통적인 ‘ㅁ’자 형태로 웅장하지는 않지만 사대부 가옥의 격식을 제대로 갖추었으며, 춘양목을 사용하여 그 짜임새가 견고하다. (안내문, 예천 금당실마을, 2022년)

‘반송재(伴松齋)’는 조선 숙종 때 문신 김빈이 낙향하여 살기 위해 지은 집이다. 이후 구한말 때 원래 살던집이 팔리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건물은 앞쪽에 ‘-’자형 사랑채가, 뒷편에 ‘ㄷ’자형 안채가 있는 튼 ‘ㅁ’자형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영남 북부지역 고위직을 지낸 상류층의 살았던 저택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집주인이 살고 있지 않고 비어 있어 금당실마을을 찾은 탐방객이 마을 고택의 모습을 제대로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반송재>

<사랑채>

<안채>

<반송재 앞 골목길>

‘광서당’은 1850년경에 지어진 집으로 튼 ‘ㅁ’자형을 하고 있는 고택이다. 안채는 앞면 6칸이며, 사랑채는 앞면 4칸으로 비교저거 큰 규모의 저택이다.

<광서당>

<사랑채와 중문>

광서당, ‘-‘자형으로 안채와 사랑채, 곳간채가 전체적으로 튼 ‘ㅁ’자형을 이루고 있는 고가옥이며,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넛방의 외측으로 증량을 걸치고 마루칸을 덧달아서 공간을 확보하였으며 대청 위의 커다란 대들보는 단일부재로 얹고, 보아지는 꽃모양을 새겨 품위를 높였다. 사랑채는 ‘ㄱ’자형으로 2칸의 대청이 있고 좌측으로 2칸의 온돌방을 두고 있다.  (안내문, 예천 금당실마을, 2022년)

‘우천재’는 1870년대에 지어진 집으로 전통적인 양반가옥의 형태를 하고 있다. 사랑채 기단을 낮게 하여 소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천재>

우천재
안채와 사랑채가 서로 연결되어 튼 ‘ㅁ’자형으로 구성되어 조선시대 전형적인 한옥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망와 명문에는 “강희이십년(1681)~”라고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수차례 개수를 거쳐 1870년경 현재의 건물이 건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채는 정면 4.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에 홑처마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는 낮은 기단에 간결하고 소박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손님을 맞이하기에 알맞은 구조이다. (안내문, 예천 금당실마을, 2022년)

<돌담장이 있는 골목길>

<큰 규모의 초가집>

‘월당화옥’은 의병장 박주상이 살았던 큰 기와집이 화재로 소실되면서 작은 초가로 다시 지은 집이다. 일제강점기에 소박하게 다시 지은 집의 형태를 보여준다.

<월당화옥>

월당화옥, 원래 이 터에는 예천지역 의병장 박주상의 출생지인 큰 기와집이 있었으나, 한말 의병활동으로 피신 중에 일본군의 소생으로 집이 소실되고 그 후 1930년대에 지은 초가집을 2008년 개축하였다. 본채와 아래채가 별재로 독립되어 있으며, ‘-‘자형 본채는 목조 한옥 4칸 겹집으로 우측에 부엌과 좌측에 방이 있고 가운데에 소담한 마루가 설치되어 방문객과 대화의 장소로 활용하도록 하였다. (안내문, 예천 금당실마을, 2022년)

돌담장이 있는 마을 골목길을 걸어다니다 보면 일제강점기 이후 옛집을 허물고 지은 작은 시골집들을 볼 수 있다. 현재 살고 있는 집의 규모는 작지만 담장이나 대지의 규모로 볼 때 예전에 큰 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경우가 많다.

<골목길>

<1970년대 모습을 보여주는 시골집>

<골목길>

<골목길>

<허물어진 담장을 볼 수 있는 골목길>

<시골집>

마을 북쪽에는 함양박씨 3인을 모신 금곡서원, 함양박씨 입향조 박종린을 배향하는 추원재 및 사당 등이 자리잡고 있다. 서원, 사당, 재실 등 전통마을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잘 갖추어진 마을이다.

<금곡서원>

<서원 출입문>

<강당>

<마을 북쪽 골목길>

<초가집>

<경당재 및 사당>

마을 큰길에는 오래된 <천주교 용문공소>, 교회들을 볼 수 있다. 양반들이 모여살았던 전통 마을이지만 비교적 이른 시기에 카톨릭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마을 큰길>

<천주교 용문공소>

금당실 전통마을, 조선시대 전통 생활문화의 숨결이 살아 있는 십승지의 땅
우리나라 이상향을 대표하는 십승지의 하나로 꼽힌 길지이자, 조선 태조가 도읍지로 정하려고 했다는 이곳 금당실(金塘室) 전통마을. 병화와 질병, 기근이 없다는 삼재불입지지(三災不入之地)의 금당실마을은 조선시대 양반문화가 서려있는 수많은 고택과 미로처럼 이어진 흙돌담길이 정겨움과 멋스러움을 자아내며, 역사와 문화, 전통을 간직해 오고 있는 우리나라 대표적 전통마을 중 한 곳이다. 조선시대, 세상이 어지러울 때마다 많은 재력가들이 이 곳을 찾음으로써 한때 서울과 같이 번성하기도 했고,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하는 등 유교문화가 활발했던 곳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100여동의 크고 작은 고택과 돌담길, 유적들만이 남아 당시의 모습을 짐작케 해 주고 있다. 조선시대 역학과 천문, 지리에 능통하고 예언가로 유명했던 격암 남사고는 병화를 피해 살만한 곳이라는 이른바 남격암십승승지론(南格菴十乘之論)에서 이곳 금당실을 전국 십승지 중 한 곳으로 꼽았고, 이를 반증이라도 하듯 전국이 전장화되었던 임진왜란 때고 이곳은 온전했다 한다. ‘지형지세가 물위에 연꽃이 더 있는 형국이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가 이곳을 지나면서 중국의 양양 금곡과 지형이 같다.”하여 ‘금당실’, ‘금당곡’, ‘금곡’ 등으로 불리었다 하며, ‘많은 명문권세들이 이곳에 거주하므로써 이곳을 찾는 벼슬아치들이 많아 유교와 양반문화가 번성해 흡사 서울과 같았고, 풍수적 관점에서 금당실과 맛질을 하나로 보면 그 형국이 서울과 흡사하다’하여 ‘금당 맛질 반서울’이라는 말 등 지명 유래와 관련한 많은 이야기도 전해온다. 금당실마을은 마을내 고인돌 무덤이 산재하여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청동기시대부터 이곳에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기록상으로는 600여년전 15세기초 무렵 김천문씨가 이곳에 처음 정착하였고 그후 함양박씨, 원주변씨가 입향하면서 큰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하며 인근마을에 예천권씨, 안동권씨 등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유적으로는 함양박씨 3인을 모신 금곡서원, 함양박씨 입향조 박종린을 배향하는 추원재 및 사당, 원주변씨 입향조 변응녕을 기리는 사괴당고택, 조선 숙종 때 도승지 김빈의 유적지 반송재고택, 구한말 법무대신을 지낸 양주대감 이유인의 99칸 고택터, 남야 선생 사당, 서쪽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해 방풍림으로 조성되었다는 송림(松林)을 비롯해 인근 마을의 초간 권문해의 유적인 초간종택과 초간정, 안동권씨 입향조 야옹 권의를 추모하는 야옹정, 그리고 춘우재고택, 연곡고택, 미산고택 등 조선시대 문화가 서려있는 아름다운 전통마을이다. (안내문, 예천 금당실마을, 2022년)

<출처>

  1. 안내문, 예천 금당실마을,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