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도호부 관아는 인천지역을 관할하던 종3품 도호부사가 근무하던 곳이다. 원래의 위치에는 문학초등학교가 있으며 동헌과 객사 일부가 남아 있다. 이 건물들은 인천도호부가 처음 생긴 조선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건물 기와 명문에 숙종대인 1677년에 중수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조선후기에 크게 중수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천시에서 최근에 옛 인천도호부 관아건물들을 문학경기장 건너편 인천향교가 있는 언덕에 복원하였는데, 현재 남아 있는 건물들은 변형이 많이 되어서 그런지 옛 건물들을 문학초등학교 교정에 남겨두고 새로운 건물들을 신축.복원해 두고 있다.
<옛 인천도호부 관아 건물>
인천시 문학동 문학초등학교 교정에 남아 있는 옛 인천도호부 관아 건물이 남아 있다. 고을 수령이 근무하던 동헌과 객사건물 일부가 남아 있으나 후대에 건물이 많이 변형되었다고 한다. <인천부읍지>에 따르면 객사 20칸, 동헌 10칸, 내동헌.삼문 등 많은 관아 건물들이 있었다고 한다.
<관아터에 남아 있는 고목>
문학초등학교 교정에 남아 있는 고목들이 이곳에 관아가 있던 옛터임을 말해주고 있다.
복원된 인천도호부 청사
인천 문학초등학교에 남아 있는 옛 인천도호부청사 건물과는 별개로 문학경기장 맞은편 언덕 인천향교 동쪽편에 인천도호부청사가 복원되어 있다. 보통 지방관청은 객사를 중심으로, 지방수령이 근무던 동헌, 숙소인 내아를 비롯하여 하급관리들이 근무하던 이방청 또는 작청 등이 있으며, 주변에는 지방 공공교육기관인 향교가 배치되어 있다. 인천도호부 청사 중 객사, 동헌 그리고 출입문이 아문이 향교 동쪽편에 복원되어 있어 역사교육의 장이 되고 있다. 지방수령의 숙소인 내아와 이방청 등은 복원되어 있지 않다.
도호부는 조선시대 행정기관의 하나로 상급기관인 목(牧)과 하급기관인 군(郡) · 현(縣) 사이에서 행정을 담당했던 관청이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을 8도(道)로 나누고 도(道)아래 대도호부, 목, 도호부, 군, 현을 두고 지방행정업무를 관장하였다. 인천에 도호부가 설치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초기 학자이자 명신(名臣)인 강희맹(姜希孟)이 쓴 “인천부호승호기(仁川府陞號記)”에 1424년 이미 객사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 최소한 그 이전에 도호부가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천도호부에는 당초 왕권의 상징인 객사(客舍)를 비롯하여 부사의 집무처인 동헌(東軒), 내동헌(內東軒) 등 15~16동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전하는 현재는 문학초등학교 교정에 객사와 동헌 일부만 보존되어 있다. 이 곳에 복원한 건물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花島鎭圖>를 근거로 객사, 동헌, 공수 등 7동의 건물을 복원하였다. (안내문, 인천시청)
<복원된 인천도호부청사>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는 인천광역시 남쪽 문학산 주변에 있었던 조선시대 지방 행정구역으로 종3품 부사가 고을 수령이었다. 부근에 있는 부평도호부가 한강 이남 강서지역을 관장하였기때문에 큰 고을이 아니었으나,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 윤씨의 외향이었던 까닭에 세조대에 도호부로 승격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인천은 인천항 주변 제물포지역, 문학산 주변, 부평과 계양구 일대를 포함하고 있으나 조선시대까지 제물포지역은 갯벌과 습지가 많아 개항전까지 주민이 많이 살지 않은 지역이며, 계양산 주변의 부평, 계양지역의 넓은 평야지대는 부평도호부 관할 지역이었고, 실제 인천도호부는 문학산 주변의 그리 넓지 않은 지역으로 백제가 처음 도읍을 정한 미추홀이 이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인천도호부 읍치 남쪽편에 있는 문학산>
삼국시대 산성이 남아 있는 인천지역의 중심이 되는 산이다.
<관아 건물들을 재현해 놓은 공원>
인천향교 옆 문학경기장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옛 인천도호부 청사 건물들을 재현해 놓고 있다.
<입구에 나란히 전시되어 있는 공덕비>
객사, 국왕의 궐패를 모신 곳으로 지방을 여행하는 관리들의 숙소
도호부는 고려시대부터 설치된 관청으로 군사적으로 중요하거나 변방의 점령지 등에 설치한 군사적 성격이 강한 지방관청이었지만, 조선시대에는 일반관청과 비슷하게 변화하였다. 도호부 수령인 부사는 종3품으로 정3품인 목사보다 한단계 낮은 단계이다. 그래서 목이 설치된 전주나 나주의 객사에 비해서 그 크기가 작지만, 현단위 고을의 객사보다는 크게 지었다. 인천도호부 청사 중 객사 건물은 전체가 남아 있지 않고,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가운데 정청 3칸이 문학초등학교 교정에 남아 있다.
<객사>
원래는 20여칸에 이르는 큰 건물로 아마도 궐패를 모시던 중앙의 정청 건물 일부만 남아 있고, 인천으로 출장온 관리들이 머물던 숙소인 좌.우익랑은 남아 있지 않다.
<객사를 재현해 놓은 공간>
<객사문>
<복원한 인천도호부 객사>
앞면 9칸 건물인 정당이 3칸, 좌.우익랑이 3칸씩으로 되어 있다. 건물칸수는 지방 수령의 직위와 관계없이 보통 9칸으로 구성되나, 그 크기는 직위에 따라서 다른 것으로 보인다.
<정청>
객사 가운데 건물인 정청은 좌.우익랑보다 지붕이 높으며, 임금의 궐패를 모시고 있다. 소성관(邵城館)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정청 내부>
지방수령이 객사 정청에 모셔진 국왕을 궐패에 예를 올리는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보름과 초하루에 지방수령은 국왕을 향해 망궐례를 올렸다고 한다.
<익랑>
좌.우익랑에는 중앙에서 방문한 관리난 외국 사신이 머물렀으며, 숙식을 하는 방과 연회 등을 하는 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인천도호부 객사 좌익랑은 작은 온돌방과 넓은 마루를 두고 있다.
객사는 임금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건물로서 수령의 집무실인 동헌보다도 격이 높았으며 그런만큼 관아 시설 중에서 규모가 제일 크고 화려하며 전망이 가장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객사는 신성한 건물로서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설계되었는데, 가운데 채가 좌우 채보다 한 단 높은 솟을대문 양식의 독특한 지붕이다. 전패를 모시고 있는 가운데 채가 전청이며, 부사가 정기적으로 임금에 대한 충성을 다집하는 곳이었다. 좌우의 익사는 중앙에서 내려온 사신의 접대와 숙소로 이용되었다. (안내문, 인천시청, 2019년)
<인천도호부 객사 부속건물인 공수>
공수는 객사의 부속건물로써 부엌.곳간.온돌방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능으로는 객사를 관리하는 인원과 중앙 사신을 수행한 수행인력들이 유숙하고, 객사에 필요한 물품을 보관하던 곳이다. 이들 업무를 주관하는 곳이 공수청이다. (안내문, 인천시청, 2019년)
동헌(東軒), 인천부사가 근무하는 공간
인천도호부 관청건물 중 도호부사의 집무공간인 동헌이다. 지방 관청 건물배치에 있어서 중심이 되는 객사의 동쪽편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동헌이라고 불린다. 인천도호부 부사는 종3품의 직급으로 지방수령 중에서 목사다음으로 높은 지위이다. 인천도호부 동헌은 앞면 5칸의 건물로서 가운데 3칸은 도호부사가 소송을 비롯한 일상적인 업무를 보던 공간으로 대청마루로 되어 있으며, 좌우에 응접실 용도의 온돌방이 있다. 동헌 앞 마당에는 민원인들이 재판을 받는 공간으로 우리나라 어디를 가던지 동헌마당에는 곤장대가 설치되어 있다. 현재의 동헌 건물과 마당사이에는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으며, 원래 이런 공간배치는 약간 드문 경우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이 곳 건물들이 복원된 건물들이라 원래의 모습과 다르게 지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인천도호부 청사 정문인 아문>
2층 누대로 되어 있으며, 좌.우에 민원이 대기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아문(衙門)은 관아의 정문으로 2층으로 된 누대에 위풍당당한 팔작지붕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문은 세 칸으로 나누어져 있어 외삼문이라 하는 데, 가운데 문은 주로 수령만이 출입하고 좌우문은 일반인이 이용하였다. 이 문에 이르면 수령이하 모든 사람이 말에서 내려 걸어서 출입하는 것이 통례였으며, 좌우에 건장한 문지기들이 지키고 있어 함부로 드나드는 것을 막았다. 또한 대문의 공간 일부를 이용하여 민원인 들의 임시 대기실로 쓰기도 하였다. (안내문, 인천시청, 2019년)
<아문과 연결되어 있는 행각>
온돌방과 창고로 이루어졌다.
<동헌 출입문인 중문과 행각>
<안에서 본 모습>
지방수령을 보좌했던 아전들이 근무했던 것으로 보이는 방들이 동헌 출입문 좌우에 있다.
중문은 수령의 집무실인 동헌으로 들어가기 위한 문으로 6방관속들의 집무처이기도 하였으며, 좌측의 삼문은 임금의 위패를 모신 객사를 출입하기 위하여 설치딘 문이다. 이들 문을 아문인 외삼문과 구별하여 내삼문이라 하였으며 이 문 역시 세 개로 되어 있어 삼문이라 하는데 가운데 부분이 솟아 있어 솟을삼문 이라 한다. (안내문, 인천시청, 2019년)
<내동헌 건물>
앞면 6칸의 건물로 넓은 대청마루와 온돌방으로 구성된 다른 지역의 동헌과는 건물구조상 여러면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이 건물은 1955년까지 인천시 문학출장소 건물로 사용하다가 현재의 위치로 옮길 때 수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왼쪽에서 본 모습>
<다른 지방 관아 동헌을 참조하여 재현해 놓은 동헌>
원래의 모습과는 다른 형태를 하고 있다.
<대청마루>
업무를 보고 있는 인천부사의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중앙에 부사가 앉아서 업무를 보고 있다. 옆에는 서기업무를 보는 지방 아전이 열심히 기록하고 있는 모습이다.
동헌은 부사의 집무실로서 객사의 동쪽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건물의 격식은 객사보다 한 단계 떨어졌으나 그 지역 최고 실력자의 지위에 합당하게끔 위엄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중앙은 마루로 된 대청으로 지방의 일반행정업무와 재판이 여기서 행하여 졌고, 좌우의 온돌방은 숙식공간 이라기 보다는 사무공간이나 응접공간이었다. 수령의 가족이 머무는 내아는 따로 배치되었다. 도호부사는 도호부의 모든 행정을 통괄하는 자로서 그 주된 임무는 수령칠사라 하여 1) 농사와 누에치는 일을 잘 돌볼 것, 2) 인구를 늘릴 것, 3) 교육을 진흥시킬 것, 4)군대에 관한 사무를 바르게 할 것, 5) 부역을 균등히 할 것, 6)민사의 소송을 바르게 할 것, 7)간교하고 교활함이 없도록 할 것 등 지방수령의 공통임무에 속해 있으며 지방관의 치적은 관찰사를 통해 매년 임금에게 보고되었다. 또한 유사시에는 군대를 지휘하여 전투에 임하는 등 군사지휘권도 장악하고 있었다. (안내문, 인천시청, 2019년)
인천도호부청사, 인천시 남구 문학동
세조6년(1460)에 도호부청사가 인천에 들어 설 때 객사의 일부와 19세기 초의 건물인 동헌 남아 있다. 객사는 20칸의 규모였다고 전하나 지금은 중앙부의 정면3칸 측면 2칸만 남아 있다. 지붕의 기와에서 발견된 명문에 숙종 3년(1677)에 수리했다고 한다. 1950년 문학초등학교를 세우면서 동헌과 함께 지금의 위치로 옮겼기 때문에 당초 건물들의 배치형태를 알 수가 없다. (안내문, 인천시청, 2010년)조선시대의 기본적인 지방 행정기구는 도(道)이다. 경기도의 경우, 3개의 목(牧)과 8개의 도호부(都護府), 10개 군(郡)과 12현(縣)이 있었고, 8개의 도호부 가운데 인천도호부와 부평도호부가 포함되어 있었다. 인천이 도호부로 승격된 것은 조선 세조 5년(1459)으로 세조의 비(妃)인 자성왕후 윤씨의 외향(外鄕)이기 때문이었다. 인천도호부청사의 건축 시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객사를 보수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지붕의 기와에서‘강희 16년’이라는 명문(銘文)이 나온 것을 볼 때 숙종 3년(1677)에 중수된 것임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인천도호부의 건물 구성은 《인천부읍지(仁川府邑誌)(1899)》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출처>
- 안내문, 인천시청, 2019년
-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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