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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가야 사람

2019년 겨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국립김해박물관과 공동으로 <가야본성(伽倻本性), 칼(劍)과 현(絃), 2019.12.3 ~ 2020.3.1> 특별전을 개최하였다. 삼국시대 통일된 국가였던 고구려, 백제, 신라와 함께 오랜 기간 존재했던 가야(伽倻) 연맹체에 대해서 다시 한번 살펴볼 수 있는 내용이었다. 가야연맹은 발전된 철기문화와 한,중,일 연안 해상무역로를 바탕으로 번성했다. 진한(辰韓)을 계승한 신라와는 오랜 세월 경쟁관계였으며, 왜(倭)와는 동맹관계에 가까웠다. 가야를 대표하는 유물로는 뛰어난 금속가공기술을 보여주는 철제 무기류와 장신구 등이 있다. 가야의 토기는 지역별로 다양한 특징을 가지고 있어 가야연맹체의 느슨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금관가야 왕족인 김씨 일족은 신라 진골귀족으로 편입되었으며 김유신으로 대표되는 세력은 삼국통일에서 큰 역할을 했다. 김해 김씨는 한국을 대표하는 성씨로 손꼽힌다.

 

<삼국유사, 1281년 편찬, 1904년 인쇄, 국립중앙박물관>

고려 충렬왕 떄의 승려 일연이 정사(正史)에는 없는 내용들을 연대순으로 모아서 엮은 역사서입니다. 이책에 실린 <가락국기(駕洛國記)>에는 가야의 건국에 관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구지가
남쪽 바닷가에 살던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거북을 잡아놓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바다의 신에게 주문을 외며 해산물을 풍성하게 싣고 무사히 귀가하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이 때 마을 사람들은 잔뜩 겁에 질려 머리를 몸속에 숨긴 거북을 협박했습니다. 머리를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겠다고 말입니다. 남쪽 바닷가에 가락국을 세운 수로는 마을 사람들이 부르던 구지가를 새로운 왕을 받아들이는 찬양가로 바꾸었습니다. 구지가는 풍요와 안전이 아니라 새로운 왕을 내려주기를 기원하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구하구하 수이현야 약불현야 번작이끽야)

옛날 남쪽 바닷가에 아직 이름도 없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아홉명의 우두머리가 백성들을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42년 3월, 어느날 구지봉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하늘은 내게 나라를 세우라고 하셨다. 너희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왕을 맞이하라” 아홉 우두머리와 마을사람들은 구지봉의 흙을 파헤치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겠다.” 그러자 하늘에서 붉은 보자기에 싸인 황금상자가 내려왔습니다. 황금상자를 풀자 여섯개의 황금알이 깨어났습니다. 알에서 깨어난 수로는 왕이 되어 나라 이름을 가락국으로 정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김해 구지봉(사적)>

<김해 수로왕릉(사적)>

프롤로그, 신화에서 역사로
‘가야’하면 ‘수로’를 떠올립니다. 수로가 가야를 세운 과정은 신화로 남아 있습니다. 42년 3월, 남해안 바닷가에는 아홉 촌장(구간(九干),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오도간,유수간,신천간,오천간, 신귀간)이 다스리는 마을이 있습니다. 나라 이름도 없고 신분질서도 뚜렷하지 않았던 이곳에서 수로와 형제들은 왕이 되어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또한 수로는 먼 곳에서 거친 풍랑이 이는 바다를 건너온 허황옥과 혼인을 합니다. 수로와 허황옥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남아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파사석탑은 허왕후가 인도에서 건너올 때 바다 신의 노여움을 잠재우기 위해 싣고 왔다는 돌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없는 종류의 돌이라고 한다. 인근 사찰에 있던 것을 원래의 자리로 옮겨야 한다고 하여 조선시대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파사석탑(婆娑石塔), 김해시 구산동 수로왕비릉, 김해시>

<김해 수로왕비릉(사적)>

48년 7월, 허황옥은 머나먼 바다를 건너 김해에 도착합니다. <삼국유사>는 허황옥이 무서운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 파사석탑을 배에 싣고 왔다고 전합니다. 이 탑은 원래 바다를 항해할 때 균형을 잡기 위해 배의 바닥에 실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과학적 분석결과 파사석은 붉은 빛이 도는 기이한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찾기 힘든 암질인 것이 밝혀졌습니다. 전체적으로 변형이 심해 원래의 모양은 알 수 없지만, 거친 바다를 건너 멀리 가야에 오게 된 설화를 전하고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공존, 가야는 어떤 나라인가요?
가야는 하나가 아닙니다. 고구려.백제.신라와 달리 가야가 어우러져 서로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아테네, 스파르타, 테베 등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인 폴리스와 같이 가야는 가락국(금관가야), 아라국(아라가야), 가라국(대가야), 고자국(소가야), 비사벌국(비화가야), 다라국 등 여러 나라가 힘을 합쳤습니다. 가야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전하는 이야기는 공존의 가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존은 비록 통합의 힘에 눌려 사라졌지만, 가야가 누린 공존의 가치는 오늘날에 이르러 새롭게 재해석되고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김해 예안리고분군에서는 북방계와 남방계 사람의 특징, 편두를 가진 인골 등이 발견되어 여러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공존하며 살았음을 알 수 있다.

<머리뼈, 4~5세기,  1.남방형질, 2.북방형질, 김해 예안리고분, 부산대학교 박물관>

<머리뼈, 4~5세기,  3.발치, 김해 예안리고분, 부산대학교 박물관, 4. 편두, 김해 예안리 고분, 국립김해박물관, 복제품>

빗모양 장신구는 왕을 모신 여인의 머리에 꽂은 장신구이다.

<빗모양 장신구, 4세기, 5. 김해 대성동고분박물관>

<빗모양 장신구, 4세기, 6. 복제품>

집모양토기는 가야의 집과 창고를 표현한 토기입니다. 1번과 2번은 습기를 방지하기 위해 지은 창고이고, 3번은 무덤처럼 만든 집입니다.

<집모양토기, 4~5세기, 1. 창원 석동고분, 국립김해박물관, 2. 함안 말이산 45호묘, 두류문화연구원, 3. 김해 봉황동 유적,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일상토기는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가던 가야 사람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토기입니다.

<일상토기, 3~4세기, 1,2, 김해 봉황대유적, 부산대학교박물관, 3,4,5, 김해 부원동유적, 국립김해박물관>

<배모양 그릇, 5~6세기, 1. 김해 여래리 24호묘, 국립김해박물관, 2. 합천 옥전 99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김해의 여러 유적에서는 왜계토기가 자주 출토되는데, 이로써 왜인들의 이주와 생활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왜계(하지키) 토기, 4세기, 1. 김해 대성동 13호묘, 2. 김해 구지로 33호묘, 3. 마산 현동 8호묘, 4. 김해 부원동유적, 국립김해박물관>

부뚜막은 추운 북방지역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가야로 전해졌다. 기원후 1세기에는 일본 북부 규슈에도 부뚜막이 등장하고, 5세기 즈음에는 나라와 오사카 등 기나이(畿內) 지역에서도 확인된다. 가야사람들의 사후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유물이다.

<이동식부뚜막, 4세기, 전 금관가야궁허지, 부산대학교박물관>

5~6세기 가야에서는 일반인들이 자신의 이름을 소유물에 표시할 정도로 한자가 보급되었다. 문자 사용과 관련된 손칼 등의 유물들도 출토되고 있다. 가야 사람들은 사슴뿔로 손잡이를 만든 손칼을 늘 허리에 차고 다녔다고 한다.

<1. 하부사리리(下部思利利)를 적은 단지, , 5~6세기, 합천 저포리 고분, 부산대학교 박물관>

<2. 이득지(二得知)를 적은 토기, , 5~6세기, 김해 예안리고분, 국립김해박물관>

<6. 손칼, 4세기 대성동 91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가야 사람들이 말을 타고 다니던 흔적은 토기의 그림뿐 아니라 실제 사용한 말갖춤으로도 확인이 되고 있다. 후기 가야유적에서는 말갖춤과 관련된 많은 유적들이 출토되고 있다.

<3. 말탄 사람을 새긴 단지, 3~5세기, 김해 양동리 195호묘, 동의대학교 박물관>

<4. 재갈, 3~5세기, 김해 대성동 91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5. 문양을 새긴 흙방울, 5세기, 고령 지산동 5-1호묘, 대동문화재연구원>

이 방울에는 거북, 관을 쓴 남자, 하늘에서 내려오는 금합 등으로 추정되는 그림이 있어 화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추상적으로 그려진 그림이기 때문에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사슴뿔로 만든 이 장식은 관에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사슴뿔로 머리를 장식하는 것은 북방 샤먼의 모습과 유사한 것으로 북방민족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신라 금관에서도 볼 수 있는 흔적이다.

<사슴뿔 머리장식, 4세기, 김해 대성동 91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가야사람 – 다문화
하늘에서 내려와 가락국을 세운 수로왕, 거친 바다를 헤치고 가락국에 온 허황옥은 모두 이 땅이 아닌 다른 곳에서 왔습니다. 김해의 여러 유적에서 다량으로 발견되는 왜계토기는 왜인들의 이주와 생활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말해줍니다. 김해 예안리 유적에서 발견된 사람의 두개골은 북방과 남방계통의 사람들이 뒤섞여 살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창원 석동 유적과 함안 말이산 45호 무덤 등지에서 나온 집모양 토기는 습기가 많은 남방문화에서 자주 보이는 건축 구조입니다. 산청 하촌리 마을 사람들은 그릇에 자신의 이름을 한자로 새길 정도로 학식이 있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 특별전 ‘가야본성, 칼과 현’>

<중앙박물관 특별전 ‘가야본성, 칼과 현’>

특별전을 열며
가야의 존재 방식은 공존입니다. 여러 가야가 함께 어우러져 살았습니다. 삼국시대의 세 나라는 패권을 다투었지만, 가야는 공존을 추구하며 버티어 남았습니다. 작은 것이 강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 뭉쳤기 때문이요, 철을 다루는 첨단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야는 철로 칼과 갑옷을 만들어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가야금으로 완벽한 하모니를 만들어 사람들을 사로 잡았습니다. 칼과 현은 가야의 본성입니다. 우리는 가야를 흩어져 있는 나라들로 기억하지만, 가야는 서로 다양성과 독자성을 인정하면서 공존했습니다. 이제 가야가 탄생하고 사라진 기억을 다시 되돌려 보고자 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문화재청, 2022년
  3. 위키백과,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