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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고대청동기] 신분에 따른 예기 사용

청동예기는 하나라 때 고대국가의 형성과 함께 출현하였으며 하나라와 서주 이후 정치권력의 상징물이 되었다. <예기(禮記)>에 의하면 신분 계급에 따라 청동기의 매장 수량을 달리했는데 이를 열정제도(列鼎制度)라 한다. 천자는 9개의 정과 8개의 궤를, 제후는 7개의 정과 6개의 궤를, 경대부는 5개의 정과 4개의 궤를, 사는 3개의 정과 2개의 궤를 사용한다. 문헌에 따르면 천자는 9개의 정(鼎) 소, 양, 돼지, 생선, 말린 고기, 위장, 껍질, 신선한 생선, 신선한 말린 고기를 담았다고 한다. 제후는 신선한 생선과 신선한 말린 고기 두 음식을 줄이고 경대부(卿大夫)는 다시 소와 위장 두 음식을 줄이며 사(士)는 돼지, 생선, 말린 고기를 담았다고 한다. 이런 내용들은 허난 성(河南省), 산시 성(山西省) 등지의 왕, 제후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기에 의해 역사적 사실로 증명되고 있다. 열정제도는 비종교적인 것으로 귀족들이 구질서에 충성을 다하는 의식에 해당하며 이러한 우열의 질서는 정치적이면서 윤리적인 것이었다. 열정제도는 망자가 죽은 후 정치적 지위를 나타냈기 때문에 실제로는 신분을 넘어서는 경우가 많았으며 유교에서는 ‘초과의례’라 하여 안타까워 했다고 한다.

“天子用九鼎八簋, 諸侯用七鼎六簋, 卿大夫用五鼎四簋, 士用三鼎二簋,”
(천자는 9개의 정과 8개의 궤를, 제후는 7개의 정과 6개의 궤를, 경대부는 5개의 정과 4개의 궤를, 사는 3개의 정과 2개의 궤를 사용한다.)
– <禮記> “禮器篇” –

소극정(小克鼎)은 서주시대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로 열정제도를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모두 7점으로 구성되어 제후의 지위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24. ‘소극’ 글자가 있는 고기 삶는 세발솥(소극정小克鼎, Ding), 서주 효왕 기원전 10세기 말

왕*(효왕) 23년 9월, 왕은 종주宗周(서주의 수도, 현재의 샨시성 시안 부근)에 있었다. 왕은 선부(膳夫) 극에게 명령하여 동쪽 뤄양을 새로운 도성인 성주(成周)로 정비했다. 이에 극은 성주의 팔사八師(서주왕실의 군대)를 정비하였다. 극은 할아버지인 리계(釐季)를 기념하기 위해 보물 예기를 만들어 사당에 모셨다. 이 예기로 선조에게 제사를 올리고 동시에 왕의 건강과 만수무강을 기원한다. 자손들도 이 그릇을 영원히 보배로 사용하라. (소극정 글 해설)

<옆에서 본 모습>

<반대편>

세발솥의 주인 극은 서주 효왕 때의 귀족으로 주 왕실에서 중요한 벼슬을 하였습니다. 극의 할아버이진 사화보(師華父)가 주 왕실을 세우고 관리하는 공훈을 세워 주나라 왕은 그 공덕을 잊지 않고 손자 극을 중요한 직책에 임명하였습니다. 극은 왕의 은덕과 할아버지의 도움을 잊지 않기 위해 8점의 세발솥을 제작하여 기념하였습니다. 큰 세발솥 1점은 왕이 본인을 임용하고 상을 내린 것과 할아버지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하였고, 작은 세발솥 7점은 후손에게 영원히 명예를 지키라는 의미로 만든 것입니다. ‘극씨 가문이 만든 작은 정’이라는 의미로 ‘소극정小克鼎’이라고 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할아버지를 위해 손자가 만든 보물 소극정(小克鼎)
청나라 덕종(1875~1908년) 때, 샨시성 바오지시 푸펑현에서 7점의 작은 세발솥(소극정小克鼎)과 1점의 큰 세발솥(대극정大克鼎), 편종 6점 등 120여 점의 청동기가 발견되었습니다. 이곳은 서주 왕조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주원(周原)의 일부입니다. 이후 전국으로 흩어졌고 현재는 상하이박물관, 베이징, 고궁박물원, 텐진박물관, 난징대학박물관, 일본 도쿄서도박물관, 교토후지이유린관, 쿠로카와고문화연구소 7개 기관에 나누어 보관되고 있습니다. 7개의 작은 세발솥은 경대부 대귀족의 그릇으로 열정제도에 사용하기 위해 크기별로 제작했습니다. 이중 상하이박물관의 세발솥이 가장 크고 웅장합니다. 몸통에는 변형된 동물얼굴무늬가 장식되어 있으며, 이 세발솥을 만든 목적을 설명하는 글이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고기 삶는 세발솥(變形交龍文鼎)은 열정제도를 잘 보여주는 춘추시대 청동예기이다. 5개로 구성되었는데 형태와 무늬는 같고 크기만 약간 다르다. 이 유물의 주인이 경대부(卿大夫) 지위에 있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경(卿)은 고위관직인 상대부(上大夫)를 말하며 대부는 그 아래 지위인 중대부, 하대부를 말한다.

<34~38. 고기 삶는 세발솥(변형교룡문정變形交龍文鼎, Ding), 춘주전기, 기원전 770년 ~ 기원전 7세기>

다섯점의 세발솥은 형태와 무늬가 같고 크기는 조금씩 다릅니다. 이런 세발솥 세트를 ‘열정列鼎’이라고 합니다. 옛 문헌에 천자는 세발솥 아홉에 소, 양, 돼지, 생선, 말린 고기, 위장, 껍질, 신선한 생선, 신선한 말린 고기를 담았다고 합니다. 제후의 세발솥은 일곱개로 신선한 생선과 신선한 말린 고기 두 음식을 줄입니다. 경대부(卿大夫)가 사용한 세발솥은 다섯으로 다시 소와 위장 두 음식을 줄입니다. 사(士)가 사용한 세발솥 셋에는 돼지, 생선, 말린 고기를 담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세발솥의 주인이 경대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1번째>

<2번째>

궤(簋, Gui)는 정(鼎)과 함께 신분을 드러내는 중요한 예기로 곡식을 담는 그릇이다. 신분에 따라 소유할 수 있는 수량을 엄격히 달리했다. 괵강궤(虢姜簋)는 괵나라 왕과 결혼한 강씨부인을 위해 만들었다는 글자가 있다. 제후국 왕비는 경대부에 해당하여 4개의 궤를 사용했다.

<39, 40, ‘괵강’ 글자가 있는 곡식 담는 그릇(괵강궤虢姜簋, Gui), 서주 후기 기원전 9세기 전반 ~ 기원전 771년>

<괵강궤>

주나라는 신분에 따라 세발솥(鼎)과 곡식 담는 그릇(簋)의 개수를 정해 두었습니다. 천자는 9정8궤, 제후는 7정6궤, 경대부는 5정4궤, 사는 3정2궤입니다. 이런 모양의 곡식 담는 그릇은 서주 후기에 유행한 것으로 그릇과 뚜껑에 글자가 있습니다. “서주의 제후국인 괵나라의 왕과 결혼한 강씨 여성이 이 그릇을 만들었다.”라는 내용입니다. 주나라 때는 예법에 의하면 제후국 왕의 부인은 경대부에 해당되어 5정4궤를 사용해야 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天子九鼎, 諸侯七, 卿大夫五, 元士三 <춘추공양전>

신분에 따른 예기 사용, 열정제도
‘열정제도列鼎制度’란 신분에 따라 의례에 사용할 수 있는 세발솥(鼎)과 곡식 담는 그릇(궤簋)의 개수를 정해둔 것입니다. 천자는 9정 8궤, 제후는 7정 6궤, 경대부는 5정 4궤, 사는 3정 2궤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한편 봉건제후의 무덤에서 9개의 정이 발굴되어 열정제도가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았던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악현제도(樂懸制度)는 신분에 따라 의례에 사용할 수 있는 악기의 종류와 배치 방식을 규정한 제도이다. 편성은 종과 경을 매달아 놓고 연주하는 편종(編鐘)과 편경(編磬), 특정한 한 음만을 매달아놓고 연주하는 특종(特鐘)과 특경(特磬)이다. 천자를 위한 악대는 궁현(宮懸)이라 하여 동, 서, 남, 북의 4면에 배치하며, 제후를 위한 악대는 헌현(軒懸)이라하면 남쪽을 제외한 3면에, 경대부를 위한 악대는 판현(判懸)이라 하여 동,서 2면에, 사(士)를 위한 악대는 특현(特懸)이라 하여 동쪽 1면에만 편성한다.

<41. 종(반룡문박蟠龍文鎛, Bo), 춘추 후기, 기원전 6세기 전반 ~ 기원전 476년>

우리나라에서는 종, 중국에서는 박이라고 부르는 대형 타악기입니다. 보통 용종, 뉴종, 편경과 함께 연주하는데 곡의 시작을 알리거나 보조를 맞추는 역할을 합니다. 이 악기의 저음은 함께 연주하는 다른 악기의 고음과 어우러져 화음을 이루기도 합니다. 걸이는 대칭되는 두 마리의 용이 등을 맞대는 모습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또 돌기 사이의 사이에도 용무늬를 장식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종>

신분에 따른 악기 사용, 악현제도
‘악현제도(樂懸制度)’는 신분에 따라 의례에 사용할 수 있는 악기의 종류와 배치 방식을 규정한 제도입니다. 이때의 악기른 걸어서 연주하는 편종(編鍾)이나 편경(編磬)입니다. 편종과 편경은 크기가 다른 여러 개를 사용하여 다른 음을 내도록 하였습니다. 편종의 하나인 박(鎛)은 천자와 제후만 쓸 수 있도록 하여 차등을 두었습니다. 또 신분에 따른 배치도 달랐습니다. 천자는 4면, 제후는 3면, 경대부는 2면, 사는 1면에 악기를 배치할 수 있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금문(金文)은 청동기에 새겨진 글씨로 상나라 중기 이후 시작되어 서주 시기에 크게 번성하였다. 주로 왕이나 기족들의 활동과 관련된 내용으로 제사, 전쟁, 상훈, 계약 등의 역사적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서주시대 금문은 거의 모든 주나라 왕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어 후대 역사서의 주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대부분의 청동예기에 글자가 남아 있는대 특히 정(鼎)과 종(鐘)에 많이 남아 있어 ‘종정문(鐘鼎文)’이라고도 부른다.

<45. ‘천민부경’ 글자가 있는 세발 술잔(천민부경각天黽父庚角, Jia), 상 후기 기원전 13 ~ 11세기>

상나라 세발 술잔 중에 그릇의 양쪽이 모두 새의 꼬리를 닮은 것을 각(角)이라고 하는데 종종 세발술잔(爵) 대신 나팔모양 술잔과 세트로 발견됩니다. 소머리 모양의 손잡이가 세로로 붙어 있고 그 안쪽에 “天黽父庚”이라는 글자가 있습니다. 천민은 만든 사람의 성씨이고 부경은 아버지가 경일에 사망하였다는 표시입니다. 천족은 황제(皇帝)의 후예를 가리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46. ‘추부정’글자가 있는 곡식 담는 그릇(추부정궤醜父丁簋, Gui), 상 후기 기원전 13 ~ 11세기>

동물얼굴이 장식된 손잡이와 굽다리에 새무늬가 장식되어 있습니다. 내부에 “추부정”글자가 있습니다. 추는 제작한 사람의 성씨이고 부정은 아버지가 정(丁)일에 사망했음을 표시한 것입니다. 글자의 크기가 다르고 선의 굵기가 다른 것은 상나라 금문의 특징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한자의 기원: 금문(金文)
청동기에 기록되어 있는 글자를 금문(金文)이라고 합니다. 금문은 상나라 중기 이후부터 보이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성씨나 가족의 이름, 사망한 날 등 한 두 자만 간단하게 새겨 넣었습니다. 형태는 한자 초기의 상형문자와 비슷하고 크기도 각각 달랐습니다. 기원전 11세기부터 금문은 긴 문장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제도, 전쟁, 상훈 등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였습니다. 특히 서주 왕조의 금문은 마지막 단락에 “子子孫孫永寶用(자손들이 영원히 보배로 사용하기를 기원한다.”는 문구를 넣은 것이 특징입니다. 금문은 중국의 갑골문(甲骨文)과 함께 한자의 기원이 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청동으로 다양한 형태의 무기가 만들어졌다. 그 중 도끼에 해당하는 부(斧)와 월(鉞)은 화려한 무늬로 장식하고 글자를 새겨 절대 권력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창으로는 찌르는 무기인 모(矛), 적을 끌어 내리는 꺽창인 과(戈)가 있으며 칼로는 쪽에 날이 있는 검(剑), 한쪽에 날이 있는 도(刀)가 있다.

<47. 도끼(용문월龍文鉞, Yue), 상 후기 기원전 13 ~ 11세기>

도끼 중 하나인 월(鉞)은 손잡이를 나무 자루에 직각으로 끼우고 끈으로 묶어 사용하였습니다. 이런 도끼는 신석기시대부터 등장하였는데 실제 전쟁에서도 사용했지만 주로 왕의 권력을 상징하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이 도끼의 앞뒷면 양쪽으로 용무늬가 있고 손잡이에는 동물얼굴무늬가 장식되어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48. 칼(도刀, Dao), 상 후기 기원전 13 ~ 11세기>

칼은 전쟁 시 병사끼리 싸울 때 사용한 무기입니다. 이 칼의 자루에는 나무가 붙어 있어 나무 자루에 고정해서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49. 투겁창(모矛, Mao), 상 후기 기원전 13 ~ 11세기>

투겁창은 공간이 비어 있는 자루에 긴 나무 자루를 끼워 상대방을 찌르는 용도의 무기입니다. 창은 방패와 세트로 사용되어 공격과 방어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자루에 두 개의 반원형 고리가 있어 나무 막대와 끝으로 묶으면 투겁창이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자루 입구에 불꽃무늬가 있고 그 위에 변형 매미무늬가 장식되어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50. ‘경’글자가 있는 창(경과京戈, Ge), 상 후기 기원전 13 ~ 11세기>

끝이 뾰족한 꺾창으로 나무자루에 끼워 사용하였습니다. 꺾창은 창끝으로 상대를 찌르거나 날로 상대를 벨 수 있습니다. 전차를 타고 싸울 때는 짧은 자루를 묶어 사용하였습니다. 뒤쪽에 ‘경’이라는 글자가 있는데 만든 사람의 성씨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전쟁의 기록
상나라는 주변국가(方國)와 연합하여 영토를 관리하는 연맹체 국가였는데, 이들은 상의 권력을 수시로 넘보았습니다. 상나라 왕은 이를 견제하고자 청동기로 도끼 등 무기를 만들어 화려한 무늬로 장식하고 글자를 새겨 절대 권력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주나라 역시 무기를 이용하여 권력을 굳건히 하고자 했습니다. 주나라 때까지는 무기를 정교하게 만들긴 했지만 그 종류는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춘추시대 이후 제후국의 세력 다툼으로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무기가 점점 진화하였고, 형태와 종류가 다양해졌습니다. 무기 뿐 아니라 청동기에 있는 글을 통해서도 당시의 전쟁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고사와 관련된 물함지는 역사서에 기록된 내용이 사실임을 확인해 주고 있다.

<51. ‘오왕부차’ 글자가 있는 물함지(와왕부차감吳王夫差鍳, Jian), 춘추후기 기원전 6세기 전반 ~ 476년, 하남성 후이현 출토(傳)>

넓고 깊은 그릇에 물을 가득 채ㅔ워 얼굴을 비춰보는 것이 주된 쓰임새입니다. 또 얼음을 담고 그 안에 술병을 두어 술을 차갑게 하는 용도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그릇 안쪽에 “功吳王夫差擇厥吉金, 自作御鍳”이라는 13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오나라는 희(姬)씨 성으로 주나라의 제후국입니다. 부차는 춘추오패 중 한명인 오나라 왕 합려의 아들로 부차는 와신상담의 주인공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와신상담
와신상담(臥薪嘗膽)은 춘추시대 말 오나라와 월나의 전쟁에서 비롯된 고사성어입니다. 오나라 왕 합려는 군사를 일으켜 월나라를 침공하였는데, 월나라 왕 구천에게 크게 패한 후 죽으면서 아들 부차에게 반드시 원수를 갚아 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이에 부차는 거친 땔나무 위에 누워 자며 복수심을 키웠습니다. 마침내 전쟁에서 부차는 구천을 사로잡았지만, 구천은 월나라 재상 범려의 지혜로 목숩을 건졌습니다. 이후 부차는 오나라 충신 오자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구천을 놓아주게 됩니다. 풀려난 구천 역시 쓸개를 곁에 매달아 두고 쓰디쓴 쓸개를 맛보며 복수를 다짐하였습니다. 또한 서시라는 미녈르 부차에게 보내서 정사를 소흘하게 합니다. 마침내 구천은 오나라를 멸망시키게 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3. 권력의 상징
주나라는 의례에 사용하는 음식그릇과 악기를 신분에 따라 구분하였습니다. 천자를 정점으로 한 신분 질서를 강화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청동기읭 제작 목적이 신에서 인간으로 옮겨졌습니다. 주나라의 등장과 함께 술 바치는 의례가 서서히 쇠퇴하고 음식 바치는 의례가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이 때문에 상나라에서 발달했던 여러 술그릇은 사라지거나 모양이 바뀌게 되고 그 대신 음식그릇이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음식그릇은 조리기와 차림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조리기는 아궁이가 없어도 내부를 가열할 수 있도록 그릇 아래에 발이 달렸습니다. 고기 삶는 세발솥과 찜통이 대표적입니다. 차림기로는 곡식담는 그릇, 장조림 같은 음식을 담았던 굽다리 접시 등이 있습니다. 한편 서주 때에는 음식그릇과 함께 여러 악기도 발달합니다. 음식그릇과 악기는 신분에 따라 사용방법을 구분하였고, 천자를 정점으로 한 신분 질서를 유지하는데 쓰였습니다. 상나라 때에는 신을 위해, 주나라 때에는 인간의 권력을 위해 청동기를 사용한 것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3. 위키백과, 2023년
  4. 실록위키, 2023년
  5. 바이두백과(https://baike.baidu.com/),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