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시대를 지나면서 천자를 중심으로 한 신분질서는 느슨해지고 신분에 따른 사용을 규정한 열정제도도 지켜지지 않으면서 청동예기의 제작이 크게 줄어든다. 또한 철기가 대량생산되면서 무기나 공구 등은 철기로 대체된다. 반면에 일상 생활용품은 여전히 청동기로 제작되었다. 서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향로나 등잔, 사치품으로 사용된 거울이나 허리띠 등이 새로이 청동기로 만들어진다. 예기로 사용되었던 세발솥(鼎)이나 술통(壺) 등 여러 기물들도 일상생활 용품으로 사용되면서 화려한 장식 등은 간소화되고 실용성을 중시하게 된다.
<52. 고기 삶는 세발솥(용문정龍文鼎, Ding), 춘추 중기 기원전 7세기 전반 ~ 6세기 전반>
춘추시대가 되면 청동기는 의례보다 실생활에서 사용하기 위해 많이 만듭니다. 이런 실생활 청동기는 화려함보다는 기능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용무늬는 가장 중요한 무늬 중 하나입니다. 이 세발솥에 장식한 용무늬는 사방으로 연속되면서 겹칩니다. 혀를 내밀고 있는 용의 모습이 재미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53. 곡식 담는 그릇(반룡문보蟠龍文盙, Fu), 춘추후기 기원전 6세기 전반 ~ 기원전 476년>
여러 기록에 따르면 기장, 벼, 조 등의 곡식을 담는 그릇 보(簠)는 서주 전기에 출현하였습니다. 뚜껑과 몸체는 모양이 같아 서로 뒤집어도 될 정도입니다. 몸체에 뚜껑을 닫으면 직육면체와 비슷한 모습이 됩니다. 뚜껑의 네 변에는 동물머리 모양의 작은 고리가 달려있고 경사진 벽에는 사방으로 연속하는 용무늬가 장식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청동 예기의 변화
청동예기는 춘추시대에 급격한 변화를 맞이합니다. 많은 종류의 그릇이 사라지거나 형태가 변하고 새로운 예기가 등장하였습니다. 음식물을 담는 그릇인 대(敦)는 고기 삶는 세발솥인 정(鼎)과 곡물 담는 그릇인 보(盙)의 특징이 결합된 새로운 그릇입니다. 술병인 호(壺) 역시 몸통이 납작한 모양이 유행합니다. 전국시대를 거쳐 한나라에 이르면 대부분의 청동예기가 사라집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54. 사슴 모양 돗자리 문진(녹형진鹿形鎭, Zhen), 서한 기원전 202년 ~ 기원후 8년>
<54. 사슴 모양 돗자리 문진(녹형진鹿形鎭, Zhen), 서한 기원전 202년 ~ 기원후 8년>
한나라 때까지 사람들은 대개 바닥에 앉아서 생활하였습니다. 이에 일어나고 앉을 때 돗자리 모서리가 말리거나 옷이 걸리는 것을 막기 위해 자리의 네 모서리를 누르는 돗자리 문진이 발달합니다. 이 사슴 모양 문진은 청동을 도금한 것입니다. 사슴의 등에는 조개껍질을 끼워 넣었으며, 흰색과 옅은 노란색 바탕에 크기가 다른 흑갈색 반점이 있어 열대나 아열대 바다의 조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겁게 하기 위해 문진 속에 납을 가득 채웠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55. 술단지(쌍룡락문령雙龍絡文령_Ling), 춘추후기 기원전 6세기 전반>
몸통에는 끈무늬로 네모 칸을 두었는데, 서로 연결되는 곳에는 매듭을 만들었습니다. 네모 칸 안은 용무늬를 장식하였습니다. 모든 용무늬는 작은 원점무늬를 바탕으로 하여 배열이 가지런합니다. 이런 장식은 진(晉)나라와 연나라 청동기에 많이 보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등잔은 음식을 담는 용도의 예기인 두(豆)에 기름을 태워 불을 밝히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중국에서는 전국시대 이후에 제례의 용도 등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한나라 때 다양한 형태의 등잔들이 만들어졌다. 아마도 서역의 영향을 받아 종교적인 의미가 더해진 것으로 보인다.
<56. 새모양 등잔(주작등朱雀燈, Deng), 서한 기원전 202년 ~ 기원후 8년>
한나라 때에는 동물 모양 등잔이 유행했습니다. 이 등은 주작 모양으로, 머리를 들고 꼬리는 세운 채 날개를 펴서 막 날아오르려는 모습입니다. 주작은 신령스러운 새로 상서로움을 나타냅니다. 청룡, 백호, 현무와 함께 사방을 지키는 신을 상징합니다. 비슷한 주작 모양 등잔이 허베이성의 유승 무덤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57. 기러기 다리 모양 등잔(양신가안족등 陽身家雁足燈, Deng), 서한 기원전 36년>
다리 모양 등잔은 한나라의 궁전에서 자주 사용되는 등잔의 하나였습니다. 이 등잔의 접시 중심에는 원통형의 삽입구가 있어 기름으로 불을 붙여 사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초를 사용할 수도 있었습니다. 등잔에는 서한 원제(元帝) 때인 기원전 36년 궁궐에서 사용한 뒤, 기원전 24년 성제(成帝)가 양평가(楊平家)에게 하사했던 사실을 기록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58. ‘림광궁’ 글자가 있는 등잔(림광궁등林光宮燈, Deng), 서한 기원전 38년>
이 등잔은 원래 행등(行燈)이라 부르던 것입니다. 긴 손잡이가 붙어 있어 들고 걸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등 접시의 벽이 곧고 깊이는 얕으며 중심에는 심지 고정 못이 있습니다. 25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림광궁은 서한 시기의 이궁(離宮)으로, 건소(建昭) 원년(기원전 38년)에 사용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등잔과 마찬가지로 향을 피우는 향로는 주나라 말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한나라 때에는 박산향로가 크게 유행하였다. 향로는 인도에 성행했는데 불교의 전래와 함께 널리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59. 향로(훈로薰爐, Lu), 서한 기원전 202년 ~ 기원후 8년>
향로는 받침, 몸통, 뚜껑으로 구성됩니다. 일부 받침은 쟁반으로 제작되어 물을 담아 윤기 나게 하고 청결을 유지하였습니다. 이 향로는 ‘豆’와 닮았는데, 모양이 우아하고 곡선이 아름답습니다. 뚜껑의 정중앙은 불무늬를 표현하였고, 그 주위에 투조한 세 개의 양 머리를 장식했습니다. 얇고 짧은 손잡이 아래의 받침에는 용무늬가 장식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청동거울(銅鏡)은 중국 상왕조부터 만들어졌는데 제사, 주술 등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상이나 동물문양으로 장식하여 종교적인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춘추전국시대 청동예기가 쇠퇴하면서 얼굴을 비치는 치장용으로 청동거울이 만들어졌으며 전국시대부터 당나라 때까지 많이 만들어졌다.
<60. ‘대락부귀’ 글자가 있는 거울(대락부귀반룡문경大樂富貴蟠龍文鏡, Jing), 서한 기원전 202년 ~ 기원후 8년>
청동거울은 한나라 때 가장 많이 만들어진 청동기로, 당시 일상용 청동기가 점차 칠기와 도자기로 대체될 때 청동거울은 오히려 중요한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뒷면에 3개의 꼭지를 만들고 주위에 용무늬를 두었습니다. 그 바깥에는 “大樂富貴, 千秋萬歲, 宜酒食”이라는 글을 둘렀습니다. 즐겁고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희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61. 거울 (사호문경四虎文鏡, Jing), 전국 기원전 475년 ~ 기원전 221년, 허난성 뤄양 진춘>
이 거울의 뒷면 가운데 다리 모양의 꼭지가 있습니다. 뒷면을 가득 채운 네 마리 호랑이의 머리는 가운데 꼭지 주위를 깨무는 모습입니다. 이런 호랑이무늬는 진(晉)나라 특유의 청동기 장식으로, 산시성 허우마 청동기 생산 유적에서 출토된 거푸집의 무늬와 굉장히 비슷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대구(帶鉤)는 고대 귀족과 군인 등이 고대에는 ‘서비(犀比)’라고도 불렀다. 주로 청동을 주조하여 만들었는데 금, 은, 철, 옥 등으로 만들기도 했다. 대구는 서주 때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진나라와 한나라 때 크게 유행했다. 대구는 허리를 매는 일상적인 용도뿐 아니라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으로도 사용되었다. 용, 동물, 새 등의 형태로 만들어졌는데 다양한 가공기술을 적용하여 예술적으로 수준이 높은 유물이 많다. 한반도에서도 호랑이나 말 형태를 하고 있는 허리띠고리가 출토되고 있다. 당시 중국과의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62. 허리띠 고리(용문대구龍文帶鉤, Daigou), 전국 기원전 475년 ~ 221년>
허리띠 고리는 허리띠에 달아 옷의 매무새를 다듬는 것으로 춘추시대에 출현하였습니다. 이 허리띠 고리는 전체적으로 삽 또는 숟가락 모양입니다. 머리는 길고 뾰족한 부리를 가진 새머리 모양이며 긴 목으로 몸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삽날과 비슷한 형태의 몸통에는 두 마리의 용이 장식되어 있으며 한 마리의 머리는 위를 향하고 다른 한 마리의 머리는 아래쪽을 향하여 몸통을 휘감고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63. 허리띠 고리(조문대구鳥文帶鉤, Daigou), 전국 기원전 475년 ~ 221년>
이 허리띠 고리는 물새 모양으로, 고리의 머리는 새의 머리 모양이고 몸통은 새의 몸통 모양입니다. 이처럼 날개를 편 물새 모양 허리띠 고리는 전국시대의 초나라 무덤에서 많이 발견되며, 대개 허리띠 위에 끼워 검을 차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전국시대와 서한시대의허리띠 고리는 물새 모양이 가장 많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64. 허리띠 고리(은상감기하문대구銀象嵌幾何文帶鉤, Daigou), 전국 기원전 475년 ~ 221년>
이 허리띠 고리는 머리는 짧고 작으며 목은 가늘고 깁니다. 몸통은 좁은 비파 모양입니다. 이런 형태의 허리띠 고리는 주로 전국시대에 조나라, 위나라, 한나라에서 유행합니다. 전체적으로 금박과 은박을 상감하여 구성한 기하무늬는 화려하고 눈부십니다. 인체의 허리 부분과 딱 맞는 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65. 허리띠 고리(도금녹송석용문대구鍍金綠松石龍文帶鉤, Daigou), 전국 기원전 475년 ~ 221년>
이 허리띠 고리의 몸통은 용모양이며 꼬리는 용의 머리입니다. 구불구불한 용 몸통 위에 터키석을 상감하였으며, 용의 발톱을 정교하게 새긴 뒤, 전체를 도금하였습니다. 이런 허리띠 고리는 전국 전기에 출현하며 전국 후기에 유행하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66. 호랑이 모양 허리띠 고리(호문대구虎文帶鉤, Daigou), 전국 기원전 475년 ~ 기원전 221년>
사람 또는 동물 모양을 본떠 만든 허리띠 고리는 대칭을 이루지 않아 한 방향으로 걸 수밖에 없습니다. 고리의 머리는 짧고 작으며 목은 비교적 길고 몸통은 머리를 돌린 호랑이 모양입니다. 이런 허리띠 고리는 허난성과 산시성에서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생활 청동기의 발달
전국시대 이후에는 춘추시대에 등장한 철기와 함께 칠기가 생활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지만, 황실과 귀족층에서는 여전히 청동기를 사용하는 습관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청동기의 제작 방식 역시 변모합니다. 고기 삶는 세발솥인 정(鼎)과 술통인 호(壺)와 같은 전통적인 청동기는 예기로서의 특징이 사라지게 됩니다. 또 청동기에 있는 명문은 이전과 달리 무게나 용량 같은 실용적인 용도로 변하고 무늬가 없는 청동기의 제작수량도 늘어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전국시대와 진한시대에는 다양한 장식이 더해진 청동기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용, 새, 호랑이, 물고기 등 다양한 동물과 연꽃 같은 식물 등 화려한 무늬로 장식하거나 상감기법과 도금, 투조 등 새로운 기법을 적용하여 장식성을 극대화하였다.
<67. 상감 납작 술병(상감반사문편호 象嵌蟠蛇文編戶, Hu), 전국 후기 기원전 3세기 전반 ~ 221년>
납작 술병은 전국시대에 출현한 새로운 형태입니다. 앞면과 뒷면은 구리선으로 네모 칸을 만들고 그 안을 당시 유행하던 인모법(印模法)으로 만든 날개무늬로 장식하였습니다. ‘인모’란 흙을 구워 만든 무늬본입니다. 각종 무늬를 진흙판에 새겨 구워 무늬본을 만듭니다. 이런 무늬본은 반복해서 사용할 수 있어 청동기 제작 시간을 크게 감소시켰습니다. 청동기 주조 기술의 큰 발전으로서 청동기 장식에 예술성보다 효율성에 무게를 두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68. 상감네모술병(상감기하문방호 象嵌幾何文方壺, Hu), 전국 후기 기원전 3세기 전반 ~ 221년)>
이 술병은 가로 단면이 네모 모양으로 입술이 작고 목이 곧습니다. 곡선인 양쪽 어깨에는 짐승 얼굴에 연결된 고리를 붙였습니다. 몸통은 우아한 곡선을 이룹니다. 전체 무늬는 마름모무늬가 서로 교차하여 겹치는데 위아래로 맞물려 복잡한 구조를 이룹니다. 굵은 무늬와 가는 무늬 모두 구리로 상감했는데 일부는 탈락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69. 물고기 모양 술병(어형호 魚形壺), 서한 기원전 202년 ~ 2022년>
이 술병은 입이 작고 목은 가늘며, 둥글게 부푼 몸통에는 비늘 무늬를 두었습니다. 밖으로 벌어진 굽다리는 꼬리지느러미를 선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전국시대에 청동기의 표면에 끌과 정 같은 금속공구를 사용하여 점과 선을 새기거나 면을 파내어, 인물이나 동물 또는 생활 장면을 묘사하는 기법이 출현하였습니다. 이는 완전히 새로운 장식 기술로 서한시대에 유행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70. 거북이와 봉황받침 박산향로(龜鳳座博山爐, Lu), 동한 25년 ~ 220년>
<옆에서 본 모습>
뚜껑은 전설 속의 박산이고, 기둥은 날개를 펼친 봉황입니다. 봉황은 머리를 위로 들고 부리로 향로의 받침을 받치고 있습니다. 발로 머리를 든 거북이를 밟고 있으며 쟁반으로 연결됩니다. 봉황으로 만든 기둥은 진한 무덤에서도 보이는데, 기둥 아래에 연결된 거북이 받침은 전설 속 바다에 있는 산을 거북이가 등에 이고 있다는 것과 연결됩니다. 한나라 사람들의 신선사상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장식 청동기의 유행
전국시대와 진한시대에 유행한 일상용 청동기에는 다양한 장식이 더해집니다. 청동기 장식의 특징은 크게 두 갈래입니다. 하나는 화려한 무늬를 장식하는 것으로 용, 새, 호랑이, 물고기 등 다양한 동물과 연꽃 같은 식물을 사용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상감기법과 도금, 투조 등 새로운 기법을 채택하여 청동기의 장식성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발전은 거푸집 제작에 밀랍을 사용하는 실랍법(失蠟法)의 등장으로 가속화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4. 일상 속 청동기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주나라의 봉건질서가 약해지고 대량으로 철기도 대량으로 생산되기 시작합니다. 신분 질서를 유지하고자 만들었던 청동기는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들어옵니다. 춘추시대 중기가 되면 서주의 봉건제가 약해집니다. 이에 따른 천자를 정점으로 하는 신분 질서 역시 느슨해집니다. 신분에 따른 청동기 사용 규칙인 열정제도 역시 엄격하게 유지되지 않아, 전통적인 청동예기의 제작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또한 새롭게 철기가 등장하여 청동기 문화는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전국시대가 되면 철을 생산하는 기술이 더욱 발전하여 무기나 공구 등은 급속히 철기로 대체됩니다. 무기나 공구가 아닌 일상 생활용품은 청동기로 제작되었습니다. 향로나 등잔 등 연회용구가 새롭게 등장하였고, 개인의 치장에 사용한 거울이나 허리띠 고리도 만들어집니다. 철기와 함께 청동기 제작기술도 발달하여 전국시대는 상나라 이후 가장 수준 높은 청동기가 제작되었습니다. 신분 질서를 유지하는 수단이었던 청동기는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출처>
-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 위키백과, 2023년
- 바이두백과(https://baike.baidu.com), 2023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청동 예기의 변화
청동예기는 춘추시대에 급격한 변화를 맞이합니다. 많은 종류의 그릇이 사라지거나 형태가 변하고 새로운 예기가 등장하였습니다. 음식물을 담는 그릇인 대(敦)는 고기 삶는 세발솥인 정(鼎)과 곡물 담는 그릇인 보(盙)의 특징이 결합된 새로운 그릇입니다. 술병인 호(壺) 역시 몸통이 납작한 모양이 유행합니다. 전국시대를 거쳐 한나라에 이르면 대부분의 청동예기가 사라집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