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2021년 <서화 감상의 즐거움>이라는 제목으로 작품을 구성하여 전시하였다. 서화(書畵)은 그림(회화)과 글씨(서예)를 총칭하는 말이다. 회화는 인간의 삶에서 창조의 결과물로 오래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풍부한 의미를 갖고 있다. 중국에서는 “그림 속에 시가 있고, 시 속에 그림이 있다”라고 하여 시와 그림은 불가분의 관계였다. 그림에는 작가의 감정과 사상이 담겨 있으며, 그런 그림을 통해 예술적인 소양이 길러진다. 서예는 문자의 표현이지만 글쓴이의 정신이 표현되는 예술로 인정받고 있다. 그림과 글씨가 합쳐져서 서화(書畵)로서 작가의 정신세계가 표현된다.
강세황(1713~1791년)은 조선후기들 대표하는 문인화가로 시(詩), 서(書), 화(畵)에 모두 능해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다. 75세에 사신단에 참여하여 북경을 다녀왔으며 76세 때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스스로 그림 제작과 화평(花評) 활동을 통해 당시 화단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의 정착에 크게 기여하였다. 진경산수의 발전, 풍속화와 인물화의 유행, 서양화법의 수용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피금정도>, <송도기행첩>, <자화상> 등 다양한 분야의 작품을 남겼다.



엷은 먹으로 바위를 그리고 각각 소나무, 대나무와 모란을 그린 그림이다. 세 폭만 남았지만 본래 네 폭이상의 병풍에서 분리된 일부일 가능성이 크다. 표암 강세황은 젊은 시절 안산의 처가에 머물며 서화에 몰두하였고 서화 감식과 비평에도 많은 힘을 쏟았다. 강세황은 61세에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정2품 한성판윤까지 올랐으며 기로소에 들 정도로 만년에 관운을 누렸다. 이 그림은 74세 때의 작품으로, 먹과 채색의 물을 미묘하게 조절하여 담담하게; 그려내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채용신(蔡龍臣, 1850 ~ 1941년)은 구한말을 대표하는 초상화가이다. 벼슬은 종이품에 이르렸으며 산수, 인물, 영모(翎毛, 동물그림)에 모두 뛰어났다. 고종 어진일 비롯하여 여러 국왕의 어진을 그렸다. 대표작으로 <고종 어진>, <최치원 초상>, <최익현 초상>, <전우 초상>, <황현 초상>, <운낭자상> 등이 있다.

머리를 낮게 쪽진 여인이 아이를 품에 안고 서 있다. 여인은 짧은 저고리 아래 젖가슴이 드러나 있고, 토실토실한 아이는 여인의 두 팔에 안겨 순진무구하게 웃고 있다. 아이가 손에 쥔 귤은 보석처럼 빛난다. 어머니와 아이를 함께 그린 이 초상에서는 마치 성모자같은 신성함마저 느껴진다. 그림의 주인공 운낭자는 평안도 관기로서 기산군수 정시의 첩실이었던 최연홍(1785~1846년)이다. 그녀는 1811년 홍경래의 난 때 정시와 그의 부친이 살해당하자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르고 시동생을 간호하여 살려내었다. 조정에서는 최연홍의 공적을 인정하여 서인으로 신분을 높여주었다. 이 초상은 석지 채용신이 27세의 최연홍을 상상하여 그린 것이다. 고종의 어진화사로 이름 높았던 채용신은 1899년 전주에 낙향한 후 우국지사의 초상을 여럿 그렸는데, 이 상도 그러한 정황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서직수 초상(보물)은 조선후기 유학자 서직수(1735 ~?)를 그린 초상화이다.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인 이명기가 얼굴을 그리고 김홍도가 몸체를 그렸다. 조선시대 초상화는 대부분 앉아 있는 좌상인데 비해 이 그림은 서 있는 모습을 그렸으며,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참여한 작품이다. 형태묘사가 매우 뛰어나며 높은 품격을 보여주고 있다. 1796년 작품이다.

62세의 서직수(1735~1811)가 두 손을 모으고 곧게 서 있다. 그는 선비로서의 자아를 도포와 동파관 차림의 초상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이 그림은 당대 최고의 도화서 화원인 화산관 이명기(1756~1802년 이후)와 단원 김홍도가 합작한 초상이다. 이명기는 얼굴에 옅은 안료를 여러 번 붓실하여 사실적으로 묘사했으며, 눈동자의 홍태가 생생하게 빛나도록 표현했다. 김홍도는 탄력있는 선으로 옷의 구김을 자연스럽게 포착한 후 옅은 음영을 넣어 입체감을 나타내었다. 서직수는 화면 위쪽에 “한 조각 정신은 그려내지 못했다.”라는 평을 썼는데, 실제로 만족하지 못했다기보다 그림이라는 매체 자체가 지닌 한계를 지적하고 내면의 수양에 매진하겠다는 다짐으로 읽을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윤급 초상(보물)은 조선후기 문신 윤급(1697~1770년)을 그린 영정이다. 관복인 사모와 흑단령을 착용하고 표범가죽을 깐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그렸다. 당대 최고의 어진화사였던 변상벽이 윤급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그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관복 차림의 윤급(1697~1770년)이 표범 가죽을 깐 의자에 앉아 있다. 화가는 66세의 주인공 얼굴에 양미간의 주름, 곰보자국과 검버섯, 사마귀까지 숨김없이 그렸다. 얇은 사(紗)를 겹쳐 바른 오사모 날개에 어른거리는 무늬가 비치고, 구름무늬 비단으로 지은 단령은 실물처럼 질감이 느껴진다. 촘촘한 붓질로 그려낸 흉배와 발 받침의 화문석 문양 표현이 탁월하다. 윤급은 영조 때의 문신으로 1762년 종1품 판의금부사에 오르고 기로소에 들어갔으므로 이를 긴며하여 제작된 초상일 가능성이 크다. <근역서화징>에 변상벽이 윤급의 초상을 그렸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하응 초상(보물>은 금관조복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서울역사박물관에 있는 그림과 거의 유사하여 1863년 이한철 등이 그린 그림으로 추정하고 있다. 주인공의 이목구비를 또렷하게 드러내었으며, 금관조복은 매우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흥선대원군 섭정시기에 그린 그림으로 정치지도자로서의 모습을 표현하고 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50세 때 초상으로, 금관조복을 차려입은 모습이다. 화가는 필선과 명암으로 주인공의 이목구비를 또렷하게 드러내었다. 금박을 붙인 금량관은 물론 옷깃 바느질까지 한 땀 한 따 그려 넣은 정교한 묘사가 돋보인다. 이하응은 섭정 시기에 다양한 차림새의 자신의 초상을 남겼다. 정치가의 면모와 문인 서화가로서의 정체성을 복식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 중에서도 이 초상은 가장 격이 높은 예복인 금관 조복 차림으로, 절정의 권력을 과시하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의 이와 흡사한 초상에; 이하응이 1869년에 ‘화사 이한철, 유숙’이라고 쓴 글이 남아 있어 이 초상의 제작 시기와 작가를 추정할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한 승려가 구불거리는 노송 뿌리에 걸터앉아 계곡물을 바라보고 있다. 물줄기는 바위에 부딪혀 물결을 일으킨다. 승려의 무심한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물소리와 소나무 바람소리도 그림 속엣 느껴지는 듯하다. 물은 막힘 없는 도리와 지혜의 상징이어서 물을 바라보는 인물을 그린 그림이 조선시대 내내 그려졌다. 짙은 먹을 사용하고 날카로운 필선으로 사물을 묘사한 수법에 절파 화풍의 영향이 뚜렷하다. 큰 화면을 안정적인 구도와 분명한 형태로 장악한 솜씨가 돋보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김홍도(1745~ 1806년)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천재 화기이다. 풍속화로 잘 알려져 있지문 산수화, 고사인물화, 신선도, 화조화, 불화 등 거의 모든 분야에 뛰어났으며 많을 걸작들을 남겨 놓았다. <신선도>, <군선도(국보>, <선동취적>, <생황을 부는 신선> 등 여러 걸작들을 남겨 놓고 있다.

쌍상투를 튼 어린이가 퉁소를 불고 있다. 등에 맨 붉은 호리병은 신선의 상징으로, 초연한 눈빛과 자연스럽게 흐트러진 머리칼이 신선다운 모습이다. 볼로초와 솔잎을 바구니에 담아 산에서 내려오는 듯, 발걸음은 천천히 앞으로 향하고 있다. 다방면의 그림에 뛰어났던 단원 김홍도는 신선과 부처도 잘 그렸다. 옷 주름의 힘찬 선과 섬세한 얼굴선이 대조되고 옅은 채색이 조화를 이룬다. 불로장생의 의미를 담아 그린 아름다운 신선 그림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김수철은 19세기 중반에 활동한 화가로 당시 화단을 주도한 중인 서화가들과 교유했던 사실이 확인되어 중인신분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산수와 화훼를 잘 그렸으며 간결한 필치와 대담한 생략, 참신한 조형감가, 말고 투명한 채색이 특징이다. 대표작으로 <송계한담도>, <자양화도>가 있다.

바위틈에 집 한 채가 위태롭게 얹혀 있고 주위의 나뭇가지는 철사처럼 거칠다. 먼 산 너머 하늘은 곧 눈이라도 쏟아낼 것 같이 어두워, 산중은 적막하고 쓸쓸하기만 하다. 그러나 나뭇가지 끝에는 매화가 피어나고, 벗이 산중의 서재로 찾아온다. 바야흐로 봄이 오고 있다. 화면 위쪽에 쓴 글에 따라 중국 북송의 처사 임포의 이야기를 그렸음을 알 수 있다. 북산 김수철은 간략한 필치로 대상을 과감히 생략하는 참신한 조형감각으로 조선 말기 산수화에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오세창(1864~1953년)은 일제강점기 <근역서휘>, <근역인수> 등을 편찬한 서예가이자 언론인, 독립운동가이다. 구한말 역관집안 출신으로 <한성순보> 기자, 관료 등을 역임했다. 천도교에 입교하여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하였다. 일제강점기 수집한 문헌과 고서화를 토대로 한국 서화가에 대한 기록을 총정리한 <근역서화징>을 편술하였다.

명나라 말기 사람인 홍자성의 어록 <채근담>의 일부를 쓴 병풍으로, 세상의 도리를 담담하게 밝힌 부분이다. 와당에 전하는 옛 전서와 예서의 상형미를 세련되게 해석한 서체가 돋보인다. 위창 오세창은 한국 서화의 전통을 대한민국으로 이어주었다. 그는 개화파 역관이었던 부친 오경석을 본받아 서화 수집과 연구에 매진하였고 역대 서화가를 망라한 사전인 <근역서화징>을 펴내었다. 오세창의 3.1운동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옥고를 치렀으며 서거 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된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김규진(1868~ 1933년)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서화가이자 사진가이다. 젊은 시절 청나라에 유학하여 당시 청에서 유행하던 화풍을 연구했다. 구한말 관직를 지냈으며 영친왕의 서법을 지도했다. 이후 일본에서 사진기술을 배워 사진관을 개설하였다. 청나라의 영향을 받은 대륙적 필력으로 모든 서법에 뛰어났다고 한다. 그림에서는 묵죽(墨竹)과 묵란(墨蘭)에 뛰어났으며 채색화도 잘 그렸다고 한다.

해강 김규진은 문인 서화의 전통을 근대로 이어준 서화가이다. 그는 평안도 출신으로 18세 때 중국 유학을 떠나 10년 동안 청나라 서화가 오창석 등과 교유했다. 김규진은 중국에서 대나무의 생태를 연구할 정도로 묵죽화에 열정을 쏟았다. 그는 두꺼운 줄기가 V자로 뻗어 오르는 대나무를 큰 붓으로 단숨에 그려냈다. 이 병풍은 난초와 대나무 그림에 이어서 제5쪽에 예서, 제6폭에 초서 글씨를 쓴 것이다. 화분에 심은 난초를 비롯해 사군자를 먹으로 그린 병풍은 20세기 전반에 크게 유행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윤순(1680~ 1741년)은 조선후기 문신이자 서화가로 예조판서와 평안도 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시문을 물론 산수, 인물, 화조 등의 그림도 잘그렸다.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글씨의 대가로 유명했으며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서법을 두루 익혔다고 한다. 중국 왕희지와 미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백하 윤순은 미불(1051~1107년)을 비롯한 옛 대가처럼 ‘메마른 듯 힘 있고, 속된 아름다움에 치우치지 않은’글씨를 추구하였다. 윤순은 중국에서 편찬된 법첩을 널리 모아 당.송 대가들의 서예 이론을 폭넓게 연구했다. 이 글씨는 남송의 문인 주희의 시를 행초로 쓴 것으로 자유로운 붓놀림이 돋보인다. 정열적이면서도 서정적인 중국 남방 문학의 정취와 활달한 필치가 잘 어울린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이광사(1705 ~ 1777년)은 조선후기 서화가로 윤순에게 글씨를 배웠다. 시.서.화에 모두 능했으며 글씨에 특히 뛰어나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표작으로 <고승간화도>, <산수도> 등이 있다.

원교 이광사는 옥동 이서(1622~1723년), 백하 윤순의 글씨를 이어 받아 독자적인 경지를 이룩한 문인 서예가이다. 그는 중국 역대 서예가의 법첩을 연구하여 위진 시대의 소박한 서풍을 자신의 글씨에 녹여 내었다. 구불거리고 꺽이는 멋을 살린 그의 원교체(圓嶠體)는 조선 후기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글씨는 이광사가 남송 문인 육유의 시 <산록>을 행서로 쓴 것으로, 힘이 가득 담긴 재빠른 붓질이 특징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한호 필적 – 석봉진적첩(보물)은 선조 때 활동한 명필 석봉 한호(1543~ 1605년)이 쓴 노년 필적을 모은 것이다. 1, 2첩은 1602년에서 1604년 사이에 쓴 필적이 실려 있다. 내용은 가까운 친구들에게 지어준 시문, 본인의 자작시, 애호하던 중국 시문이다. 흑지나 감지에 금니로 해서,행서,초서로 다양하게 썼다. 3첩은 도교경전을 필사한 것이다. 18세기 유명한 서화수장가 김곽이 수장했던 것으로 각 첩의 이면에는 인장이 찍혀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한호의 필적 가운대 최고로 여겨지는 유물이다.



석봉 한호는 16세기를 대표하는 명필이다. 한호는 왕실 문서에 글씨를 쓰는 사자관(寫字官)으로 활약하며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 한호 이전에는 원나라 조맹부(1254~1608년)의 부드럽고 장식적인 송설체(松雪體)가 유행했다. 한호는 왕희지의 고전적 서풍으로 회기하여 소박하면서 힘있는 글씨를 완성하였다. 한호의 글씨를 새긴 목판본 <천자문>이 유포되면서 그의 석봉체(石峯體)는 조선후기 서예에 새로운 기준이 되었다. 이 서첩은 한호 만년의 글씨를 모은 것으로, 의관이자 서화 수장가로 이름 높았던 석종 김광국이 소장했던 작품이다. 금가루를 개어 써 내려간 유려하고 원숙한 필치가 돋보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비단에 금가루로 매화와 대나무를 그린 이금화(泥金畵)이다. 조선후기에는 일본으로부터 상당량의 금이 유입되어 금으로 그린 그림이 유행했다.

매화와 대나무는 소나무와 더불어 한겨울 추위를 이겨내는 세한삼우(歲寒三友)로 고려시대부터 그려졌다. 이 두 그림은 금가루로 그린 이금화(泥金畵)이다. 이금화는 바탕이 어두워야 금빛이 돋보일 수 있기에 주로 쪽이난 먹을 칠한 비단과 종이에 그려졌다. 금박을 문질러 고운 가루로 낸 후 아교 녹인 물에 잘 섞어 붓으로 그리면서 수묵처럼 농담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금화는 중국과 일본을 잇는 중계무역으로 상당량의 일본산 금이 조선으로 유입되었던 17세기에 특히 유행했다. 한양의 고위 계층은 이금화를 영원성의 상징으로 선호했다고 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오준(1587~1666년)은 조선중기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서예가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인조 때 산신으로 청나라를 다녀왔으며 <인조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당시 글씨로 유명해서 많은 비문과 글씨를 남겼다. <삼전도비>, 아산 <충무공이순신비>, 구례 <화엄사벽암대시비> 등이 그의 글씨이다.

<전적벽부>는 북송의 문인 소식이 황주(黃州) 유배 때 지은 글이다. 유배의 실의를 극복하고 이루어 낸 동아시아 문학의 걸작으로 후대에도 깊은 사랑을 받았다. 소식은 1082년 음력 7월 16일 밤에 적벽에서 뱃놀이를 하고 <전적벽부>를 지었다. 만물이 무상하면서도 영원하다는 상대적 우주관을 대화형식으로 풀어내었다. 물안개 속에서 시공간의 경계가 사라지고 주인공과 자연이 하나로 녹아드는 물아일체의 세계를 낭만적으로 표현하였다. 글씨를 쓴 죽남 오준은 석봉 한호를 이은 명필이었으며, 단정한 왕희지체로 이름 높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북송이 문인 소식(1037~1101년)은 <전적벽부>를 짓고 석 달이 지난 음력 10월 보름에 <후적벽부>를 지었다. 시에는 쓸쓸한 정감이 가득하다. 그사이 계절이 바뀌어 강물이 줄어들고 나뭇가지가 앙상하여 늦여름에 노닐었던 곳과 같은 장소임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강 위를 날아갔던 학이 신선의 모습으로 꿈속에 찾아왔다는 표현은 소식이 몰입했던 도가적 세계관을 잘 보여준다. 오준은 문장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써서 왕실의 길흉책문과 서울 삼전도비, 평택 대동법시행기념비, 구례 화엄사 벽암대사비 등 수많은 비석 글씨를 남겼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1785년 12월, 창덕궁 중희당에서 종조가 친히 관료의 인사를 거행하는 장면을 그린 기록화이다. 전각 중앙의 일월오봉도 병풍 앞에 놓인 빈 의자는 임금의 자리를 상징한다. 탁자 위에는 인사 고과를 기록한 책자가 가득 놓여있다. 마당에 늘어선 호위군관들은 국왕의 위엄을 과시한다. 관료들은 사모 위에 방한모를 덧쓰고 있고, 활엽수들은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어 한겨울 추위가 느껴진다. 정조는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 공평한 인사가 가장 중요하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 세자궁인 중희당에서 인사 행정을 거행했다. 병풍 첫째 폭에는 정조의 어제시와 이에 화답한 신하 19명의 시가 적혔 있었으며, 이들의 명단이 마지막 폭에 있다. 당시 좌부승지였던 홍인호가 이 병풍을 하사 받았고, 그의 양자인 홍희조가 후데 글을 덧붙였다. 홍희조는 제1,2폭 상단에 1820년 동지를 맞아 새해를 축하하는 글을 썼고, 1831년에는 제8폭 왼쪽 여백에 자신의 차운시를 더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중국 당나라 장군 곽자의(697~781년)가 수많은 가족과 함께 잔치를 즐기는 모습을 그린 병풍이다. 곽자의는 안록산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분양군왕에 봉해졌다. 그는 85세까지 장수했을 뿐 아니라 아들과 사위가 모두 입신출세하여 세속의 행복을 남김없이 누린 인물로 기억되었다. 조선후기에는 곽자의가 대저택에서 장수 축하 연회를 즐기는 장면을 병풍으로 많이 그려졌다. 음악과 춤으로 흥겨운 잔치 모습과 아이들이 뛰어노는 장면에 부귀영화와 다산을 향한 소망이 담겨 있다. 곽분양행락도 병풍은 왕실의 가례의식에 사용되었고 민간에서도 유행하여 많은 수가 전하고 있다. 이 병풍은 19세기 곽분양행락도의 전형을 보여준다. 섬세한 묘사와 화려한 채색은 왕실이나 지체높은 짐안을 위해 만든 병풍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조속(1595~ 1668년)은 조선 후기에 활동한 서화가이다. 시,서,화에 모두 뛰어났으며 그림은 매화(梅), 대나무(竹), 산수와 수묵 화조(水墨花鳥)를 잘 그렸다. 대표작으로 신라 시조 김알지 탄설화를 그린 <금궤도>와 <노수서작도>, <고매서작도> 등이 있다. 이 그림은 국왕을 위해 그린 그림으로 섬세하게 풍경을 잘 묘사하고 있다.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의 탄생설화를 그린 그림이다. 나무에 금빛 상자가 걸려 있고 그 아래에 흰 닭이 울고 있다. 관복 차림의 인물은 탈해이사금의 명을 받아 닭 울음소리 나는 곳을 찾아온 호공으로 보인다. 상자 안에는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씨로 하였고, 뒤에 그의 후손 미추이사금이 신라 최초의 김씨 왕이 되었다. 그림 위 인조가 지은 글에 따르면 1636년 그림을 그리도록 명하였지만 병자호란 때문에 실제로는 그 이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사대부 화가 창강 조속은 수묵 화조화에 뛰어났지만 국왕의 감상을 위한 어람용 그림에 알맞도록 이 그림에서는 섬세한 청록산수를 구사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이징(1581~ ?)은 조선후기에 활동한 화가로 문인화가 이경의 서자이다. 산수, 인물, 영모, 초중에 모두 뛰어나 당대를 대표하는 화가로 손꼽힌다.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난죽도>와 <화개현구장도>가 잘 알려져 있다. 이 그림은 청록색으로 봄날을 풍경을 섬세하면서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조선초기 안견파의 화풍을 이어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넓은 수면에 잔잔한 물결이 일고 고깃배와 놀이배가 한가로이 흘러간다. 물가에는 몇의 초가집이 들어서 있다. 사람들은 독서를 하거나 손님을 맞으며 저마다 하루를 보내고 있다. 먼산 아래에는 복사꽃과 버드나무 새순이 빛나고, 숲 사이로 큰 기와집 지붕이 모습을 드러낸다. 화가는 아름다운 청록 채색으로 봄날의 정경을 따뜻하게 묘사했다. 넓은 강물을 중심으로 전경의 언덕에 집과 소나무를 배치하고 원경에 산과 마을을 그려 넣는 3단 구도는 15~16세기 안견파 화풍의 전통을 이은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다양한 소재를 열두폭에 그린 병풍으로 매 폭마다 동식물에 어울리는 옛 시를 농익은 행초 서체로 쓰고 인장을 찍었다. 심전 안중식은 장승업에게 배운 구도와 필법으로 장식정인 화조영모화를 여럿 남겼다. 안중식은 1881년 영선사의 일원으로 중국 텐진을 다녀왔고, 1899년에는 일본 교토 등지에서 서화활동을 하는 등 국제적으로 활동한 서화가였다. 이 그림은 장승업과 해상화파를 계승한 구도와 일본 근대 회화의 사실적 세부 묘사가 융합된 작품이다. 부드러운 붓질과 온건한 구도는 안중식이 추구한 미감을 잘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고대 중국 빈(豳)지방의 농촌생활을 노래한 <시경>의 <빈풍 칠월> 중 겨울에 하는 일을 모아 그린 그림이다. 눈 쌓인 깊은 계곡에서는 얼음을 깨어 옮기고 있고, 먼 들판에서는 새 사냥과 사슴 사냥이 한창이다. 얼어붙은 강을 끼고 두 사람이 사냥감을 옮기고 있다. 소나무 아래 초가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농한기를 맞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마당에는 안주로 쓸 염소가 있다. 조선시대 빈풍청월도는 농사짓는 어려움을 알게 해주는 교훈이 되는 그림으로 인식되어 궁중에서 제작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시경>의 <빈풍豳風 칠월七月>은 주나라의 발상지인 빈 지방 농촌 생활을 철따라 읊은 노래이다. 기야 이방운은 <빈풍 칠월>의 각 장을 소재로 하여 그림을 그리고 시를 썼다. 오른쪽 면은 봄기운을 머금은 들에서 농사를 짓는 장면이다. 농부는 소를 몰아 쟁기질을 하고 아낙은 새참을 한가득 내놓는다. 왼쪽 면에는 꽃이 핀 들판에 쑥을 캐고 뽕잎을 따러 나온 여인들이 그려져 있다. 버드나무 사이에서 지저귀는 꾀꼬리 소리에 잠시 마음을 빼앗긴 이들도 보인다. 문인화가 이방운은 수채화처럼 맑은 색감과 부드러운 필치로 봄날의 정경을 그려내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서화 감상의 즐거움
서화(書畵), 한 글자씩 떼어 읽으면 글씨와 그림일뿐이지만 붙여 놓으면 먹 향기 그윽한 낱말이 됩니다. 상고시대 사람들이 그림 같은 갑골문으로 하늘의 뜻을 점친 이후 동아시아에서 글씨와 그림은 늘 짝을 이루어 왔습니다. 서화 감상은 즐겁습니다. 종이와 비단 위를 쓸고 간 붓 흔적을 더듬어 보아도 좋고, 솜씨 부린 채색의 맛을 보아도 좋습니다. 서화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문학과 상상, 현실과 소망이 한데 뒤섞인 옛 서화가의 마음자리가 드러납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서예와 산수, 화조와 궁중장식화에 이르기까지 조선시대 서화의 향연이 펼쳐집니다. 옛 사람들이 누린 서화감상의 즐거움을 오늘 당신의 마음에 담아가시기 바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출처>
-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