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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양천현 관아, 관아터와 겸재 정선의 그림속 양천현아

양천현(陽川縣)은 오늘날 강서구 일대에 있었던 조선시대 행정구역으로 종5품 외관직인 현령이 고을 수령이었다. 고려 충선왕때 양천현이 설치된 이래로 고종때까지 존재했다. 읍치는 양천고성이 있는 성산(城山)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며, 양화진과 공암진을 통해 서울과 행주지역이 연결되었다.

읍치가 있었던 가양동 239번지 주변에는 양천현아지 표지석과 최근에 복원한 양천향교가 이곳에 양천현 관아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지금은 표지석외에는 아파트와 주택 등이 들어서 서 있어 한적한 도심외곽 주택가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양천현 관아는 조선후기 양천현감을 지냈던 겸재 정선이 그린 여러점의 그림에서 당시 양천현 관아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양천현 읍치는 반경 50m 내에 동헌, 내아, 객사, 작청 등 관아를 구성하고 있던 건물들이 모여 있었으며, 삼국시대 이래로 한강을 지키던 중요한 산성이었던 양천고성이 읍치 뒷편에 위치하고 있다.

한강 가을물결 무명베를 펼쳐 놓은 듯,
무지개다리 밟고 가니 말발굽 가벼웁다.
사방들녘 바라보니 누런구름 일색인데,
양천일사(一舍)에서 잠시 군대 쉬어간다.
– 1797년 가을에 정조가 행차하면서 종해헌에 들러 남긴 시 –

<조선시대 양천현 관아가 있었던 가양동239번지 일대>

지금은 아파트와 주택지 등이 들어서 있는 한적한 도심 외곽지역 풍경을 보여주고 있는 곳이다.

<겸재정선기념관에 전시된 옛 양천현 관아의 모습>

겸재 정선이 그린 양천현아 (陽川 縣衙)의 모습을 기준으로 모형으로 복원해 놓았다.

1)동헌(東軒), 지방관이 정무를 집행하는 곳이다. 양천현아의 동헌은 ‘종해헌(宗海軒)’이라 하였다.
2)내아(內衙), 지방관 및 식솔들이 생활하는 공간이다.
3)객사(客舍),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관사로, 객관(客館)이라고도 한다. 양천현의 객사는 ‘파릉관(巴陵館)’이라 4하였다.
4)향청(鄕廳), 지방관을 보좌, 견제하는 자치기구가 위치한 건물이다.
5)길청(吉廳), 관아의 실무관리인 아전들이 집무를 보던 장소로 작청(作廳), 연청(椽廳)이라고도 한다.
6)관청(官廳), 지방관아의 주방으로, 지방관의 식사나 잔치의 음식물을 만들었다. 관주라고도 한다.
7)장청(將廳), 군사업무를 맡았던 기관으로, 장교청이라고도 한다.
8)사령청(使令廳), 지방관의 명령을 수행하던 사령들이 거처하던 건물이다.
9)읍창(邑倉), 관청의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로 직물, 무기 등도 보관하였다.
10)형옥(刑獄), 죄인들을 가두어 두는 감옥이다.
11)향교(鄕校), 지방에서 유학을 교육하기 위하여 설립된 관학 기관이다.
13)홍살문(紅門), 능, 관아, 향교 등의 정면에 세우던 붉은 나무문이다. 향교나 관아의 영역을 표시한다. (안내문, 겸재정선기념관, 2014년)

<양천향교에서 내려다 본 옛 양천현 관아가 있었던 지역>

<객사가 있었던 자리>

옛 양천현 관아 중 객사가 있었던 자리에는 사찰이 들어서 있다.

<관아 건물들이 있던 자리>

양천현 관아 건물들이 있었던 곳에는 아파트와 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소악루>

영조대 동복 현감을 지낸 이유가 양천 관아 뒷산 강변에 세웠던 악양류터에 새로 지은 정자이다. 누각에 오르면 안산, 인왕산, 남산, 관악산 등이 한눈에 보이고 한강하류 풍경이 빼어난 명소였다. 겸재 정선은 양천현령을 지내면서 이곳에서 여러 작품을 남겼다.

<양천향교>

서울에 남아 있는 유일한 향교로서 현재의 건물은 옛터에 1981년에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서울 가양동 궁산(해발74.3m) 상부에 남아 있는 양천고성지(사적)>

이 성은 궁산 정상부에 쌓은 테뫼식 산성으로 안양천과 한강하류가 합류되는 지금 부근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로 행주산성과 함께 한강유역을 장악하기 위해 중요한 요새였다. 지금은 정상부에 건물터 몇곳과 성벽 발굴 흔적 몇곳을 제외하고는 유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성황신을 모신 사당인 성황사>

겸재 정선과 양천 현아 (陽川 縣衙)
겸재 정선(1676~1759)은 진경산수화라는 우리 고유 회화양식을 창안하여 우리국토의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표현해내는 데 성공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이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65세 무렵 원숙한 경지에 올라 절정의 진경산수 작품들을 남겼다. 이때가 바로 정선이 향천현의 현령으로 근무하였던 때이다. 양천현은 오늘날의 강서구 일대로 겸재정선기념관이 위치해 있는 궁산 아래는 정선이 만5년 동안 근무하였던 양천현아가 있던 곳이다.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완성된 곳, 강서구에서 옛 양천현아의 모습과 정선의 작품세계를 감상해 보자. <출처:겸재정선기념관>

<겸재기념관>

양천현 관아가 있던 양천고성지 서쪽편에 자리잡고 있는 겸재기념관. 진경산수화를 완성한 겸재 정선과 양천현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그림 속 양천현아
양천현아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정선이 현령으로 근무하던 당시에 정신이 그린 <양천현아> 등의 그림을 통해서 그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림 속의 양천현아는 동헌인 종해헌(宗海軒)을 중심으로 내아(內衙), 길청(吉廳), 향청(鄕廳), 사령청(使令廳), 장청(將廳), 읍창(邑倉) 등이 둘러져 있다. 현아의 입구인 외삼문과 내삼문을 지나서면 종해헌이 나타나고, 낮은 담으로 둘러싸인 내아의 모습도 보인다. 현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양천향교와 객사인 파릉관(巴陵館)이 위치해 있다. <출처:겸재정선기념관>


<양천현아(陽川縣衙)>

저녁 무렵 관원들이 퇴청한 후의 적막한 양천현아의 전체 모습을 그렸다.


<종해청조(宗海廳潮)>

현아의 뒷산인 궁산에서 한강을 내려다보며 그렸는데, 종해헌과 부속관아의 모습이 보인다.


<소악루(小岳樓)>

궁산 동쪽 기슭에 있는 소악루를 그렸는데, 그 뒷면으로 높이 솟은 양천현아의 홍살문과 객사가 보인다.


<양천현아>

조선후기 화원화가인 김희성이 그린 양천현아 그림으로 정선의 화풍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데, 정선의 <양천현아>보다 좀 더 멀리서 바라본 시점으로 그렸다.

 양천현아지(陽川縣衙址)
양천(陽川)이라는 고을의 명칭은 1310년(고려 충선왕2년)으로부터 시작된다. 가양동 239번지에 있었던 양천현아는 중앙에 현청(동헌)인 종해현, 그 동쪽에 객사(파릉관), 북쪽에 향교가 있었다. 이를 일컬어 읍치라 한다. 우리나라의 읍치 중 양천현 읍치가 50m 반경내에서 이루어진 유일한 곳으로 연구대상이다. 종해헌 남쪽에는 아전들이 있는 길청, 향청의 동쪽에는 장교청, 그 앞의 좌우에 창고가 있었다. 종해헌 부근까지 강물이 들었으며 부근 궁산 기슭에는소악루라는 누각이 산기슭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당대의 시인 묵객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이었다. 지금은 양천현 읍치 중 현청자리는 아파트와 주택지로, 객사 자리는 종교부지로 사용되어 그 원형의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이 부근에는양천향교, 객서터, 고성지, 현령이 제사를 지내던 사직단, 려단, 성황사 등이 있고, 특히 양천현령으로 재직했던 진경산수화풍의 창안자인 겸재 정선선생의 기념관이 개관되어 우리고장의 자랑으로 삼을 수 있다. <출처:양천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