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구황동 분황사 절터에 남아 있는 모전석탑(국보)이다.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서 쌓아 모전석탑으로 삼국시대 선덕여왕대에 세워졌다. 남아 있는 신라 석탑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이나 통일신라의 삼층석탑 등이 화강석을 이용해서 목탑처럼 쌓은 것이라면, 분황사 모전석탑은 벽돌로 쌓은 전탑을 모방해서 만든 것이다.
1층 몸돌에는 4면에 감실을 만들고 입구에 인왕상을 새겨 놓고 있다. 이 인왕상은 이 석탑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인데 조각상이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넘친다. 7세기 신라의 조각수준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기단부 모서리에는 부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사자상이 세워져 있다.

석탑은 자연석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몸돌과 지붕돌을 올려놓고 있다. 1층 몸돌은 큰데 비해 2층부터는 현저하게 줄어드는 모습을 하고 있다. 7층인지 9층인지 알 수는 없지만 전체 몸돌이 남아 있지 않아 지금 남아 있는 모습은 불균형적이다.




돌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1층 몸돌이다. 4면에 감실을 만들고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역사라 불리는 인왕상을 조각해 놓고 있다.

전탑처럼 만든 탑신은 원래는 7층 또는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3층만 남아 있어 불안정해 보인다.

4면에 출입문을 만들어 놓고 금강역사라 불리는 인왕상이 새겨 있으며, 모서리 4곳에는 사자상이 올려져 있다. 매우 입체적이고 생동감이 넘친다. 이 석탑을 조성했던 7세기의 조각 수준이 상당히 높았고, 외부에 노출되어 있는데도 지금도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다. 1915년 이탑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사리갖춤과 각종 공양물들이 발견되었다.








분황사 모전석탑, 국보, 경북 경주시 구황동
이 석탑은 현재 남아 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신라 선덕여왕 3년)634)에 안산암(安山岩)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모전석탑(摸塼石塔)이다. 기단의 규모나 탑의 형태로 보아 7층이나 9층이었을 것을 추정된다. 1915년 일본인이 허물어진 것을 해체.수리하였다. 1층 몸체돌의 사방에는 쌍여닫이 돌문으로 된 불상을 모시는 감실(龕室)이 있고, 감실 양쪽으로 불법(佛法)을 지키는 인왕상(仁王像)이 돋을새김되어 있다. 자연석으로 된 기단 위에는 네마리의 석사자(石獅子)를 배치하였다. 탑에서 나온 돌 사리함(舍利函)을 배치하였다. 탑에서 나온 돌 사리함에는 여러가지 구슬, 가위, 금.은바늘과 은합, 숭령통보(崇嶺通寶), 상평오사(常平五銖) 등이 들어 있어, 고려 숙종.예종 연간에 해체.수리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09년)
이 석탑은 임진왜란 때 크게 훼손되었다고 하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수리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원래 9층석탑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수리를 하면서 현재는 3층만 남아 있다. 수리과정에서 사리갖춤과 각종 공양물들이 발견되었다. 사리는 비단에 싸여 은합 안에 있었으며, 이밖에도 여러 공양물들이 있었는데 그중 바늘.가위.집게 등은 분황사 창건을 발원했던 선덕여왕과 관련을 짓기도 한다. 또한 석탑안에는 북제 동전인 상평오수전과 북송 동전인 송녕중보가 같이 발견되어 고려시대에도 석탑을 해체.수리하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리함, 신라 643년, 경주 분황사 탑
화강암으로 만든 사리함으로, 1915년 분황사 탑을 해체 수리할 때 2층과 3층 사이에서 발견되었다. 몸체는 자연석 윗면을 다듬고 중앙에 네모난 공간을 만든 다음 사리기와 공양품을 넣었다. 바닥 한쪽에는 빗물이 들어갈 경우를 대비하여 배수구를 뚫어 두었다. 또한 뚜껑을 덮었을 때 틀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몸체 가장 자리에 돌기를 만들었다. 뚜껑은 몸체와 다르게 잘 다듬어 만들었으며, 모서리를 깎아내고 윗면 중앙에는 둥근 돌기를 새겼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중국 북제(550~577년) 때 사용한 동전인 상평오수전과 중국 북송의 동전(1102~1106년 사용) 숭녕중보가 발견되었는데, 여러 시기에 걸쳐서 석탑이 해체.수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분황사석탑 사리갖춤,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634년
이 것들은 1915년 분황사 모전석탑을 수리할 당시 발견되었던 석탑 속에 있던 사리갖춤과 각종 공양물입니다. 분황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인 634년에 조성된 절로, 이 사리갖춤이 있던 모전석탑과 역시 같은 때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리는 비단에 싸여 은합 안에 있었으며, 이 밖에도 수정.금바늘.바늘통.가위.집게.조개 등의 공양품도 함께 납입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여성이 주로 사용하는 바늘, 바늘통, 가위, 집게 등이 있어, 분황사의 발원자인 선덕여왕과 이 사리갖춤을 관련짓기도 합니다. 분황사 석탑은 고려시대 때에도 한번 수리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이유는 북송 때의 동전인 송녕중보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09년)


분황사 사리장엄구
선덕여왕 시기에 스무 개가 넘는 절이 세웠는데, 분황사는 이 시기를 대표하는 절이다. 선덕여왕 3년(634)에 세워져 자장, 원효가 머물렀고, 솔거가 그린 천수 관음 벽화, 경덕왕 대에 만들어진 약사상이 있었다고 전한다. 돌을 벽돌 모양으로 잘라 쌓은 탑을 모전석탑이라고 하는데, 분황사에는 가장 오래된 모전석탑이 있다. 원래 7층이나 9층이었을 것이나 지금은 3층까지만 남아 있다. 탑의 2층과 3층 사이에서 돌로 만든 함이 발견되었고, 그 안에서 사리기와 여러 공양품이 확인되었다. 은과 유리로 만든 사리기와 더불어 금동 장신구, 구슬, 조개껍데기, 동전 등이 나왔다. 공양품 구성은 이전 시기 고분 출토품과 비슷한데, 탑을 부처의 무덤으로 인색해 껴묻거리처럼 사리 공양품을 넣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사리장엄구, 공양품, 신라 ~ 고려, 경주 분황사 탑
1) 꾸미개, 2) 합, 3) 침통, 바늘, 4) 가위, 5) 병, 6) 꾸미개
사리장엄구, 공양품, 신라 ~ 고려, 경주 분황사탑
1) 패각.골각류, 2) 숭녕중보, 상평오수, 3) 향나무편, 4) 수정.옥.유리
<출처>
- 안내문, 경주 분황사, 2019년
-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 위키백과,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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