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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필 세한도(국보), 조선시대 문인화를 대표하는 작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김정희 필 세한도(歲寒圖, 국보)’이다. 조선후기 문인화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극도의 절제와 생략을 통해 문인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글과 그림이 함께 남겨져 있는 것으로 제주도 유배시절 변함없는 정성을 보여준 역관 이상적에게 그의 신의를 한겨울의 소나무로 표현하였다. 후에 이상적이 북경을 방문했을 때 교유관계를 가졌던 중국 문인들로부터 이 그림에 대한 평가인 많은 발문을 받아와서 더욱 가치있는 작품이다.

그림은 한채의 집을 중심으로 소나무와 잣나무가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주위는 여백으로 처리하여 절제와 간략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 위쪽에 ‘세한도歲寒圖’라는 제목과 함께 ‘완당阮堂’, ‘우선시상蕅船是賞’이라는 글씨를 적고 도장을 찍었다.

<세한도, 추사 김정희, 조선 1844년, 국보>

제주도 유배 중인 스승 김정희에게 제자인 역관 이상적은 연행에서 얻은 최신 서적과 김정희 지인들의 편지를 꾸준히 보내드렸다. 김정희는 이상적의 변함없는 신의를 메마르고 찬 기운이 감도는 속에서도 싱싱한 잎이 솟아 있는 소나무와 잣나무로 표현하여 서화일치의 극치를 보여주는 문인화의 대표작 <세한도>를 탄생시켰다. 이상적은 이에 감격하고 연경으로 가지고 가서 평소 교유관계를 맺고 있던 장락전, 장록 등 청내의 명사에게 글을 받아서 <세한도>의 가치를 드높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1년)

그림 양쪽에는 제주도 유배시절에도 변함없어 추사 김정희와 중국문인들 간의 편지를 전해주면 변함없는 신의를 보여준 역관 이상적에 대한 느낌을 글로 적어놓고 있다.

<오른쪽 글>

<왼쪽 글>

그대가 지난해 계복의 ‘만학집’과 운경의 ‘대운산방문고’ 두책을 부쳐주고, 올해 또 하장령이 편찬한 ‘황조경세문편’ 120권을 보내주니, 이는 모두 세상에 흔한 일이 아니다. 천만리 먼곳에서 사온 것이고, 여러 해에 걸쳐서 얻은 것이니 일시에 가능했던 일도 아니었다. 지금 세상은 온통 권세와 이득을 좇는 풍조가 휩쓸고 있다. 그런 풍조 속에서 서책 구하는 일에 마음을 쓰고 힘들이기를 그같이 하고서는, 그대의 이끗을 보살펴 줄 사람에게 주지 않고 바다 멀리 초췌하게 시들어 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것을 마치 세상에서 잇속을 좇듯이 하였구나! 태사공 사마천이 말하기를 “권세와 이득을 바라고 합친 자들은 그것이 다하면 교제 또한 성글어진다’고 하였다. 그대 또한 세상의 이런 흐름 속에 사는 한 사람 일 터인데, 잇속을 좇는 세상 풍조의 바깥으로 초연히 몸을 빼내었구나. 잇속으로 나를 대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태사공의 말씀이 잘못되었는가?”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되어서야 소나무 잣나무가 더디 시들음을 알 수 있다.”고 하셨다. 추운 계절이 오기 전에도 같은 소나무 잣나무요. 추위가 닥친 후에도 여전히 같은 소나무 잣나무다. 그런데도 성인(공자)께서는 굳이 추위가 닥친 다음의 그것을 가리켜 말씀하셨다. 이제 그대가 나를 대한는 처신을 돌이켜 보면 그 전이라고 더 잘한 것도 없지만 그 후라고 전만큼 못한 일도 없었다. 그러나 예전의 그대에 대해서는 따로 일컬을 것이 없지만 그 후에 그대가 보여준 태도는 역시 성인에게서도 일컬음을 받을만한 것이 아닌가? 성인이 특히 추운 계절의 소나무 잣나무를 말씀하신 것은 다만 더디 시드는 나무의 굳센 정절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역시 추운 계절이라는 그 시절에 대하여 따로 마음에 느끼신 점이 있었던 것이다. 아아! 전한 시대와 같이 풍속이 아름다웠던 시절에 살았던 급암과 덩당시 같이 어질었던 사람들의 경우에도 그들의 형편에 따라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였다. 하물며 하비현의 적공이 대문에 방을 써 붙였다는 것은 세상 인심의 박절함이 극에 다다른 것이리라. 슬프구나! 완당노인이 쓰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1년)

<장악진, 오찬 발문, 조진조의 발문>

<반준기, 반희보, 김준학, 반증위, 품계분의 발문>

반증위의 발문, 반증위는 반준기, 반희보 형제의 육촌으로 그들처럼 대수장가였으며 특히 금석학과 서예를 좋아하여 이 분야를 많이 수집했다.옹방강 문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이상적과 반씨 문사들간의 교유를 주도했다.
“김정희는 바다밖의 뛰어난 영재, 일찍부터 그 명성이 자자했네. 명성은 훼손되어 갈 곳도 없고 세상의 그물 속에 걸려들었네. 도도하게 흘러가는 세속을 보니 선비의 맑은 정신 누가 알리오? 풍진 속 세상을 개탄하다가 일찍이 어린 친구 알게 되었네. 높은 의리 돈독하긴 언제나 같고 겨울에도 그 맹세는 변함이 없네. 소나무와 잣나무를 닮아서인지 타고난 성품마저 곧고 단단해. 시들지 않는 바탕 그림 그려서 도타운 그정에 보답하였네. 우진 선생 부탁으로 반증위가 쓰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11년)

반희보의 발문, 반희보는 소금장사로 큰 부를 축적한 오흥 반씨 집안 출신이다. 이후 청나라 소주의 문학과 예술을 주도하는 대가문으로 성장했다. 반준기와형제로서 함께 서화를 많이 모았으며 이상적에게 집안 문사들의 서화를 선사했다. 그는 발문에서 세한도를 보고 예찬의 필치를 떠올렸다고 썼다.
“원나라 화가 에찬의 필이 담긴 한 폭의 그림 만리 길 배를 타고 건너 왔다네. 동심 담아 고사의 뜻을 전하니 신물이라 태평한 시절 오겠지. 산골짜기 있는 재목 어찌 버리며 얼음 설 겪은 절개 더욱 굳어라. 내가 부친 줄 없는 소리 감상하시고 바다 건너 산마루에서 몸조심하길 <세한도>에 시를 써서 바치고 우선 존형 문단의 교정을 청한다. 오현 반희보”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1년)

<왕조, 조문경, 지경용, 요복중의 발문>

<장목의 발문>

<장요손의 발문>

장요손의 발문(1845년). 장요손은 청나라 학자로 이상적과는 1836년에 처음 만났으며 이후 그에게 보낸 편지가 40~50여 통에 이를 정도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상적과 서화를 주고 받았는데, 그를 통해 김정희의 서화를 요청하기도 했다. 장요손은 전각에도 뛰어나 김정희는 그가 새긴 ‘동해순리’인장을 높이 평가했다.
” 우선 인형과 헤어진 지 8년이 되었다. 갑진년(1844) 겨울에 사신으로 연경에 왔는데, 을사년(1845) 봄 1월에 오찬(장요손의 매형)의 정원에 초청하여 술을 마셨다. 연경의 선비 17명이 모여 옛일을 이야기하고 문장을 논하며 모두 즐거워했다. 우선이 김추사 선생이 그린 <세한도>를 보여주며 제영을 부탁했다. 급히 율시 두수를 짓고, 추사 선생과 한묵을 통한 마음으로의 교유를 생각했다. 언제쯤이나 얼굴을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니 더욱 슬플 따름이다. 양호 장요손이 기록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1년)

장목의 발문(1845년). 장목은 완원에게 실력을 인정받은 학자로서 하소기, 조진조, 진경용 등 당대 명유들과 교유했다. 김정희가 존경했던 명말청초의 실증주의 사상가 고염무의 사당을 짓는 일에 앞장섰다. 그가 저술한 고염무의 연보인 ‘고정림연보’와 완원이 새로 저설한 ‘시서고훈’을 김정희에게 보내겠다고 발문에 적었다.
“예전에 언젠가 서유지에게 완당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네. 기인은 바다밖에서 오고 감춰둔 책 동쪽에서 빛이 났다네.(중략) 완당이 존경한 완원선생이 이 책 보더니 기쁘고 놀라 가져다 출판을 기획했는데. (중략) 원본을 소중히 보관한 곳은 용마루 치솟은 문선루였네. 완원은 그 아래 살았는데 저술을 늙을수록 더욱 많아져 (중략) 옛 주석에서 사라진 경전 발라냈다네. 완원이 새로 저술한 ‘시서고훈’이 완성되었다. (완원께서) 한 질을 멀리까지 보내주시니 속된 귀가 잠시나마 호강했다내. (중략)”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1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