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해미읍성(사적)에 잏는 해미현(海美縣) 관아이다. 해미현은 1407년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縣)을 합쳐서 설치하였다. 이 지역은 충남 서해안 연안 해로를 지키고 관리하기 위한 중요한 요충지이다. 왜구의 침입이 빈번했던 조선초에는 충청병영과 충청수영이 모두 이곳에 있었다. 이후 충청병영은 청주로, 충청수영은 보령으로 이전하였다. 해미현 수령은 총6품 현감으로 무관을 임명하여 영장토포사(營將討捕使)를 겸하게 하여 주변 고을의 군사적인 업무를 총괄하였다.
<서산 해미현 관아, 2023년>
해미현 관아 건물로는 읍성내에 동헌, 내아, 객사 등이 있다. 원래 있던 건물들은 아니고 해미읍성을 유적지로 정비할 때 고증을 통해 복원하였다. 충청병영이 있었다고 하나 건물들은 종6품 현감이 수령인 고을의 위상에 걸맞게 아담한 규모이다.
<해미현 관아, 2009년>
<서문 근처에 본 모습>
조선시대 객사는 관아의 중심건물이다. 특히, 병영이나 수영의 객사는 군사작전 등을 위해 건물규모가 상당히 큰 편인데 비해 해미현 객사는 규모가 작은 편이다. 정청과 좌.우익랑의 구분없이 앞면 7칸 규모의 단일 건물이다. 가운데 3칸은 정청이고 좌, 우에 2칸씩 익랑을 두고 있다.
<해미현 객사>
<옆에서 본 모습>
<남문 문루에서 보이는 객사>
<객사에서 보이는 읍치>
해미읍성 객사
객사는 건물의 중앙 정청에 궐(闕)자가 새겨진 위패를 모시고 삭망(매월 초하루, 보름)에 관아의 대소 관원들이 국왕에 대한 예를 올렸으며, 양편 익식은 조정이나 상부에서 파견된 관원 및 귀빈들의 숙소로도 사용했던 곳이다. 해미읍성 객사는 발굴조사와 고증을 거쳐 1999년 7월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안내문, 서산시청, 2023년)
동헌 출입문으로 2층 문루를 두고 있다. 문루에는 ‘충청좌영’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동헌 문루>
동헌은 해미현감겸영장의 집무실로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 등이 행해지던 건물이다. 해미현감겸영장은 인근 12개 군, 현의 병무행정과 토포사를 겸한 지위였다. 동헌 건물은 앞면 5칸으로 약간 큰 편이다.
<동헌 마당>
<동헌>
동헌 뒷편에 있는 건물은 책방 또는 책사라 불렀다고 한다. 현감겸영장의 사적인 일을 돕거나 그들 자제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하던 곳이다.
<동헌 뒷편 책방>
동헌 서쪽에는 하급관리들이 근무하던 부속건물이 있다. ‘ㄱ’자형 건물로 사무실 용도의 방과 창고로 구성되어 있다.
<동헌 부속 건물>
동헌은 병마절도사를 비롯한 현감경영장(縣監兼營將)의 집무실로 관할지역의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 등이 행해지던 건물이다. 해미 현감겸영장은 인근 12개군, 현의 병무행정과 토포사(討捕使)를 겸한 지위였다. (안내문, 서산시청, 2023년)
동헌 옆에는 해미현감 가족들이 생활하던 관사 건물인 내아가 있다. 앞면 5칸의 일자형 주택 건물로 부엌과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의 규모는 크지 않다.
<내아 마당>
<내아>
<내아 앞 부속 건물>
해미읍성 내아
관리와 가족들이 생활하던 관사 건물로 동헌이 고을의 공무를 수행하는 곳인데 반해, 내아는 살림집이다. 해미읍성 내아는 발굴조사와 고증을 거쳐 2000년 11월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안내문, 서산시청, 2023년)
해미현 관아 뒷편 동산에는 정자 건물이 청허정이 있다. 높지는 않지만 멀리 천수만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고 군사작전을 지휘하는 장대(將臺) 역할을 했던 공간이다.
<관아 뒷편 동산>
<언덕에서 내려다 보이는 해미읍성>
<청허정>
<정자에서 멀리 내려다 보이는 서해바다>
청허정
정자는 일반 가옥과 달리 자연을 배경으로 특별히 지은 건물이다. 청허정은 조선 성종 22년(1491) 충청도병마절도사 조숙기가 세웠던 것을 다신 복원한 것으로 조선전기 대표학자 성현의 개인문집 <허백당짐>에 그 유래가 정한다. 정자의 이름인 ‘청허淸虛’는 잡된 생각이 없이 마음이 맑고 깨끗하다는 뜻으로, 이곳에 오는 이들에게 한결같은 마음가짐을 당부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조선초기의 해미읍성은 충청도 육군사령부 역할을 하는 충청병영성으로 최고 책임자는 병마절도사였다. 조숙기가 병사로 부임하여 해미읍성을 수리하면서 숲이 우거진 뒷동산에 청허정을 지었다. 이후 이곳에 온 관리들은 청허정에서 무예를 익히거나 휴식을 취하는 등, 시를 짓고 글을 남겼다. 1494년 방문한 충감사 조위는 청허정 주변 소나무와 멀리 보이는 바다의 풍경에 대한 시를 남겼고, 권오복의 문집 <수헌집>에 절도사와 수령이 일을 마치고 청허정에 모여 지은 시가 전한다. 1579년 충청병영에서 근무했던 이순신, 1790년 해미로 귀양 왔던 다산 정약용도 이 청허정에 머물렀을 것이다. 1872년 <해미현지도>에는 예터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 1800년대에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에는 이 자리에 일본식 신사가 세워졌다가 광복 후 철거되었고, 1976년 복원한 후 2011년 다시 정비하였다.(안내문, 서산시청, 2023년)
해미읍성은 구한말 천주교 박해와 관련이 있는 곳이다. 초기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 옥사에서 투옥되어 문초를 받았다고 하며 옥사 앞 회화나무에는 그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해미읍성 옥사>
<해미읍성 옥사>
해미읍성은 우리나라의 천주교와 깊은 연관이 있는 곳 이다. 교도들을 투옥하고 문초하였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터만 남아 있던 옥사를 발굴 작업 뒤 복원, 재현하였다. 1935년에 간행된 <해미 순교자 약사>의 기록을 토대로 복원하였으며 내옥과 외혹이 있고, 각각 정면 3칸의 건물로 남녀의 옥사가 구분되어 있다. 1790년부터 100여 년간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규정하여 이곳에서 투옥 및 처형을 하였는데,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도 이곳에서 옥고를 치르고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안내문, 서산시청, 2023년)
해미읍성 회화나무는 수령 300년 이상의 고목으로 이곳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을 매달아 고문했던 곳 이라 한다.
<해미읍성 회화나무>
<출처>
- 안내문, 서산시청, 2009년, 2023년
-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 실록위키,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