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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원감영(사적), 관찰사가 근무하던 곳

강원 원주시 일산동에 남아 있는 강원감영(사적)이다. 강원도 26개 부,목, 군현을 관할하던 강원감영이 있던 곳이다. 조선 태조 때 강릉도와 교주도를 합하여 강원도라 하고 원주에 감영을 설치하였다. 건물들은 임진왜란때 대부분 소실되었고, 1634년 원주목사가 재건하기 시작하였으며, 1895년에는 55동에 이르는 건물들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군청 등 관공서 건물 등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현재는 강원감영 정청 건물이었던 선화당과 살림집인 내아, 출입문인 포정루가 남아 있다. 2000년대 이후 우체국이 들어섰던 후원에 건물과 연못 등을 복원하였다.

<원주 강원감영(사적)>

조선전기 관찰사는 관할지역을 돌아다니면서 근무하는 순력이 중심이어서 감영 건물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으나, 조선후기에는 지방을 통치하는 상설기관으로 바뀌면서 많은 건물들이 필요하였다. 감영에 설치된 건물로는 국왕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시는 객사가 가장 중요한 건물이었고, 관찰사가 집무공간인 선화당, 숙소인 내아가 있었고 감영에 소속된 관리들이 근무하는 비장청 등과 호적 등 서류를 보관하던 창고 등 설치되었다. 감영은 대도시에 소재했기 때문에 상업지역이나 관공서로 바뀌어 그 흔적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전라감영 전주객사, 공주 충청감영 선화당, 대구 경상감영 선화당 등이 대표적인 감영 관아 건물들이다.

<강원감영 읍성 및 관아 건물 배치>

<강원감영 건물배치, 위성사진>


<원주목지도, 여지도, 18세기,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23년>

<관찰사 및 목사 선정비>

관찰사 및 목사 선정비
강원감영의 중삼문과 내삼문 사이에는 총 17기의 비석이 있다. 이 비석들은 조선시대 때 강원감영과 원주목 관아에서 관찰사와 목사로 재잭하였던 관인들의 업적을 남기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선정비는 관찰사와 목사에게 하나의 모범 사례가 되기도 하였으며, 동시에 새로 부임하는 관찰사나 목사를 경계하는 의미도 깃들어 있었다. 원주지역 곳곳에는 강원도 관찰사와 원주목사의 선정비가 많이 세워졌으나, 대부분 사라져 찾기가 어렵고 강원감영을 복원하면서 일부 남아있던 선정비를 옮겨왔다. 이 중 2기의 비석은 후원 권역에 있던 원주우체국을 철거하면서 찾은 것이다. (안내문, 원주시청, 2023년)

선화당 권역

강원감영 선화당 권역은 관찰사가 집무를 보던 공간으로 일반적인 지방 관아에서는 동헌이 있는 영역이다. 옛 건물로는 관찰사 집무공간인 선화당(보물), 포정루가 남아 있다. 2000년대 이후 강원감영(사적) 복원사업이 진행되면서 내아를 비롯하여 중삼문, 내삼문, 행각, 책방 등의 건물들이 복원되었다. 이외에도 보선고, 비방청, 호적고, 약방 등 실무관리들이 근무하던 사무실과 창고 등이 선화당 권역에 있었다.

<선화당 권역 출입문인 포정루>

포정루는 강원감영 선화당을 출입하는 문루이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전형적인 2층 문루 건물이다. 1층 가운데 칸에 널문을 달았으며 2층은 난간을 두르고 사방을 개방하였다.

<안쪽에서 본 포정루>

포정루(布政樓)
포정루는 강원감영으로 들어가는 첫번째 출입문이다. ‘포정’이란 어진 정사를 베푼다는 의미로 중국 명나라의 지방관청이 포정사에서 비롯된 명칭이다. 원래 있던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없어지고,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다시 세운 것이다. 고종 32년(1895) 강원감영이 폐지된 이후, 원주 진위대가 강원감영을 사용했을 때는 ‘선위루’라 하였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강원감영문루’라고 하였다. <여지도서> 등의 문헌에 근거하여, 1995년 조선시대 강원감영 정문의 명칭인 포정루로 편액을 바뀌 달았다. (안내문, 원주시청, 2023년)

포정루를 지나면 두번째 출입문인 중삼문이 있다. 건물터만 있던 것을 복원한 건물이다. 주변의 담장과 부속건물들은 남아 있지 않다.  건물은 앞면 5칸 규모로 양쪽에 작은 문간방이 있다. ‘관동관찰사영(關東觀察使營門)’이라는 이름이 있다.

<중삼문>

<안쪽에서 본 모습>

중삼문(中三門)
관찰사의 집무실인 선화당으로 출입하는 진입공간에는 포정루.중삼문.내삼문이 있다. 중삼문은 진입공간의 배치상 가운데 위치한 문으로 포정루를 지나온 사람들이 중삼문에서 재차 본인의 신원과 방문 목적을 밝혀야 했다. 중삼문은 ‘관동관찰사영(關東觀察使營門)’이라는 고유한 명칭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강원감영의 관찰사를 만나기 위해 들어서는 문을 의미한다. (안내문, 2023년, 원주시청)

내삼문은 선화당 마당을 출입하는 문으로 ‘징청문’이라는 이름이 있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강원도 관찰사가 근무하는 공간인 선화당 건물이 보인다. 내삼문에서 선화당까지는 박석이 깔린 길이 연결되어 있다.

<내삼문>

내삼문(內三門)
내삼문의 고유한 이름은 징청문(澄淸門)으로, 포정루.중삼문을 지나 관찰사의 집무공간인 선화당과 직접 연결되는 문이다. 내삼문은 강원감영의 진입공간에서 가장 안쪽에 위치해 있으며, 방문자는 이곳에서 관찰사를 만나기 전 마지막 신원절차를 거쳤다. 징청문이란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방문자는 문을 들어서면서 맑고 깨끗한 정신으로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야 하는데, 이는 관찰사를 만나러 온 방문객뿐만 아니라 관찰사를 포함하여 이 문을 들어서는 모든 관인들이 새겨야 할 덕목이었다. (안내문, 원주시청, 2023년)

선화당(보물)은 관찰사가 집무를 보던 강원감영 정당(正堂) 건물이다.  1664년 경에 건립된 건물로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현재 위치에 세워진 이래 여러 차례 중수가 있었지만 실물이 그대로 계승되어 왔으며 조선시대 감영 선화당 건물 중에서 가장 큰 규모를 하고 있다.

<강원감영 선화당(보물)>

내부는 넓은 대청마루로 되어 있으며 온돌시설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양쪽 1칸씩은 누마루의 기능을 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내부공간 배치로 볼 때 판결 업무가 많았던 지방관아 동헌과는 달리 관찰사는 감영에 속한 지방관 등과 회의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중앙부처 정청과 비슷한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선화당 내부>

<선화당 앞 측우대(복원품)>

내아는 관찰사가 기거하는 살림집이다. 조선시대 관찰사는 가족없이 단신으로 부임하는 경우가 많고 임기도 짧으며 관할지역을 돌아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선화당에 비해 건물규모가 상당히 작다.

<내아>

<내아 툇마루>

 

<뒷편에서 본 모습>

내아(內衙)
내아는 관찰사와 그의 가족들이 생활하던 공간이다. 온돌방과 창고가 함께 있는 건물로, 오랫동안 생활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이 건물은 <여지도서>의 기록에는 ‘대은당’으로, <관동지>에 실린 강원감영지 기록에는 ‘내아’로 기록되어 있다. 내아는 17세기 후반에 관찰사가 감영에 머물면서 강원도의 다른 지방을 살펴보던 유영(留營)체제가 자리잡으면서 생겼을 것으로 추측된다. (안내문, 원주시청, 2011년)

선화당 뒷편에는 도서와 출판 업무를 담당하던 책방이 있다. 조선시대 감영에서는 산하 고을에 문서를 작성하여 배포하는 기능과 함께 도서의 수집과 보급, 인쇄와 출판의 기능이 있었다.

<책방>

책방(冊房)
책방은 도서와 출판 업무를 담당하던 곳이다. 책방에는 감영에서 수집한 도서자료 외에, 강원도 각 지역에서 온라온 인구.세금.날씨 등에 대한 보고자료, 분쟁.갈등에 대한 소송관계 문서 등이 보관되었다. 대구 경상감영의 사례로 볼 때, 강원감영에서도 도서의 수집.보급, 인쇄.출판 등이 책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관찰사의 수행비서격인 책사가 선화당과 가까운 거리인 책방에 근무하면서 관찰사에게 조언을 하기도 했다.  (안내문, 원주시청, 2013년)

강원감영 선화당 영역에서 실무관리들이 근무했던 여러 행각 건물들이 있었다. 확인된 건물로는 보선고(補繕庫), 공고(工庫) 등이 있다.

<행각>

행각
행각은 궁궐의 중심건물인 정당(正堂) 좌우에 배치되어 있는 보조 건물을 말한다. 강원감영도에는 선화당 왼편으로 세 채의 건물이 확인되는데 북쪽으로부터 차례로 행각, 보선고(補繕庫), 공고(工庫)가 자리해 있다. 2000년 강원감영터 발굴 당시에는 행각의 건물 흔적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았고, 몇개의 건물구조가 서로 얽혀 있었기 때문에 현재의 행각 자리와 좌측의 공방고지 일대는 옛 지도 기록에서 보이는 행각, 보선고, 공방고지의 여러 건물이 함께 어우러져 있었던 공간으로 추정된다. 행각의 건물 복원은 정면 7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구조로 이루어졌다. (안내문, 원주시청, 2013년)

<공방고 터>

공방고터(工房庫 址)
조선시대 강원감영에는 행정업무를 수행하던 육방(六房)이 있었다. 그중 공방은 공용지를 관리하고, 건축물을 짓거나 보수하는 역할을 했다. 공방고 터는 공방이 있던 자리로 고(庫)는 창고보다는 기관을 뜻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강원감영은 원주목과 같은 관아를 사용했는데, 공방고 또한 원주목과 함께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발굴조사 당시, 바닥에서 온돌시설 일부가 드러나 공방고에 난방 시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원주시청, 2023년)

강원감영 선화당 권역
강원감영 선화당 권역은 감영의 업무가 이루어지던 공간이다. 선화당 권역 안에는 중심건물인 선화당, 진입공간에 해당하는 포정루.중상문.내삼문, 그밖에 내아.공방고 터.행각.책방 등이 있다. 감영의 본청인 선화당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선화당 권역은 진입 공간과 집무 공간으로 나뉘는데, 강원감영의 진입 공간은 포정루에서 시작해서 중상문.내삼문으로 연결되는 삼문(三門) 구성을 이루고 있다. 강원감영을 찾아온 손님들은 각 문을 지날 때마다 신분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중삼문에서 꺾어서 내삼문으로 들어가면 선화당이 정면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선화당으로 들어가는 방식은 경기.전라.황해감영에서도 볼 수 있다. 집무공간의 중심 건물인 선화당은 관찰사가 업무를 보던 공간으로, 관찰사는 이곳에서 강원도에 속한 각 지역의 행정.농정.조세.민원.군사.재판 등에 대한 업무를 수행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에 타고, 17세기 중반부터 선화당을 비롯하여 관찰사가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집무실과 많은 건물들이 세워졌으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도시화 과정을 겪으면서 대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졌다.  (안내문, 원주시청, 2013년)

객사 권역

감영 동쪽편에는 객사를 중심으로 강원감영에 속했던 많은 부속건물들이 있었다. 군사시설인 중영(中營), 화약고(火藥庫), 군기고(軍器庫), 군향고(軍餉庫) 등과 죄인을 매질하거나 잡아오던 나장(羅將)이 일하는 군뇌방(軍牢房), 곡식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사람이 근무하던 사창(司倉)이 이 객사 앞쪽에 있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원주의 대표적인 상업지구로 바뀌었다.

<도심 상업지구에서 볼 수 있는 옛지도를 표현한 그림>

<상업지구로 변한 객사 주변 지역>

후원 권역

강원감영 선화당 뒷편에는 손님들을 접대하는 공간인 후원이 있다. 후원에는 큰 연못을 조성하고 3개의 섬을 조성하여 삼신산을 구현하였다. 일제강점기 이후 후원에는 원주우체국이 자리하였는데 2018년 강원감영 복원사업이 끝나면 옛 후원의 모습을 복원하였다.

<강원감영 후원 권역>

<영주관>

<봉래각>

봉래각(蓬萊閣)
봉래각은 강원감영 후원의 건물들 중 가장 먼저 지어졌다. 1684년 관찰사 신완이 연못 북쪽에 처음으로 봉래각을 세웠다. 그러나 물이 넘쳐 누각이 여러 차례 허물어지자, 1704년에 관찰사 홍만조가 기존 봉래각을 헐어내고 섬을 견고하게 만들어 그 위에 봉래각을 새로 지었다. 봉래각을 처음 건립한 관찰사 신원은 <봉래각상량문>에 ‘봉래’가 강원도에 있으므로 강원도를 신선이 머무는 곳이라 하였다. (안내문, 원주시청, 2023년)

<채약오>

채약오(採藥塢)
채약오는 신선이 먹는 불로초를 캐는 언덕이라는 뜻으로, 봉래산을 비롯한 삼신산에는 영험한 약인 불로초가 있다는 신선세계의 전설을 따른 것이다. 1771년 관찰사 서명선이 연못 속에 6개의 기둥을 세워 건립하였다.  (안내문, 원주시청, 2023년)

<뒷편에서 본 후원>

<후원에서 보이는 선화당 권역>

강원감영 후원 권역
강원감영의 후원 권역은 관찰사의 사적인 공간으로, 후원에는 연못을 조성하여 봉래.영주관 등을 건립하고 손님 접대와 연회의 장소로 사용하였다. 연못 가운데와 한쪽 끝에는 정자를 세워 연못을 내려다보며 후원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강원감영의 후원에서는 다른 감영에서는 볼 수 없는 신선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연못 안에는 전설의 신산인 삼신산을 상징하는 세 개의 섬을 만들어 전각을 짓고, 모두 신선 세계의 이름을 부여하였다. ‘봉래산’인 금강산을 관할했던 강원감영의 후원에 이에 어울리는 신선 세계를 만들었던 것이다. 관찰사들은 후원에서 풍류를 즐기면서 스스로를 ‘봉래주인’, 즉 신선세계의 주인이라 칭했다. 강원감영의 후원은 일제강점기까지는 유지되었으나 이후 후원 자리에는 한때 원주우체국이 자리했으며, 2018년 강원감영 복원사업이 완료되어 아름다운 후원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안내문, 원주시청, 2023년)

원주 강원감영, 사적, 강원도 원주시 일산동
원주 강원감영은 조선시대 강원도 관찰사가 직무를 보던 관청으로 강원도 지방행정의 중심지였다. 조선왕조는 태조4년(1395) 강릉도와 교주도를 합하여 강원도라 하고, 원주에 강원감영을 설치하여 관찰사를 파견하였다. 강원감영이 원주에 설치된 이유는 원주가 강원도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지리적으로 수도인 한양과 가까워서 임무를 수행하기 편리하다는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관찰사는 행정과 군사의 최고 책임자로, 왕의 명령으로 파견되어 각 고을의 수령들이 백성들을 올바르게 돌보고 있는지 살펴보는 역할을 했다. 조선 전기 관찰사의 임기는 1년이었으며, 감영에 잠시 머물면서 강원도 각 지역을 돌아보는 순력(巡歷) 체제로 업무가 이루어졌다. 17세기 중반부터 관찰사의 임기는 1년에서 2년으로 늘어나게 되고, 관찰사는 강원감영에 머물면서 때때로 강원도의 다른 지방을 돌아보았는데 이러한 변화를 유영(留營)이라고 한다. 강원감영의 건물들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으나 1634년 원주목사 이배원이 다시 짓기 시작한 이후 여러 목사와 관찰사들이 계속하여 다시 지었다. 강원감영은 선화당을 비롯하여 포정루.보선고.내아.비장청.호적고 등 40여 동에 달하는 웅장한 모습으로 1395년부터 1895년까지 500년 동안 강원도의 중심역할을 수행했으나, 1895년에 8도 제도가 23부 제도로 바뀜에 따라 그 기능을 잃어버렸다. 1900년 이후 강원감영은 원주의 지방군대인 진위대 본부로 사용되었고,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도시화 과정에서 대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졌다. 한때는 원주군청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2018년 강원감영 복원사업이 완료되어 500년 동안 강원도의 중심 역할을 수행한 강원감영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안내문, 2023년, 원주시청)

<출처>

  1. ‘사적 원주 강원감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2. 안내문, 원주시청, 2023년
  3. 안내문, 원주 강원감영사료관,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