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상은 부처를 형상화한 것을 말하며 불교가 전래된 이래로 부처의 사리를 모신 탑과 함께 중요한 신앙의 대상이었다. 불상은 크게 그 재료에 따라서 석조불상, 목조불상, 철조불상, 금동불상 등이 있으며, 새겨진 부처님의 모습에 따라서 석가여래, 비로자나여래, 아미타여래, 약사여래가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많은 불상들을 소장,전시하고 있는데 석굴암 본존불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2점의 삼국시대 반가사유상을 소장하고 있다. 이외에 경주 감산사터에서 발굴된 미륵보살입상(국보)과 아미타여래좌상(국보) 등이 있으며,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초기에 만들어진 철불상이 여러점 볼 수 있다. 불전에 모시는 불상들은 유명 사찰에서 대대로 전해내려 오기때문에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경우는 많지 않고, 주로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 크게 융성했다가 폐사된 절터에서 발굴된 불상들을 볼 수 있으며, 개인들이 소장했던 작은 금동불상들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발굴되고 있어 박물관이나 개인들이 소장하는 경우가 많다.

석조불상
삼국시대 석조불상은 암벽에 돋을새김을 하여 표현했는데 중국의 영향을 받은 삼존불상 형태가 많았다. 7세기 중엽부터는 불상의 표현에 입체감이 강조되었으며 측면이나 뒷면의 묘사에도 관심을 두게 되었다. 통일신라 때에는 화강암을 조각하여 입체적인 모습을 보이는 석조불상이 주류를 이루어 신라 특유의 조형미와 조각 기법을 보여준다. 고려시대 석조불상은 신라 불상 양식을 계승하고 있으나 세부적인 표현이나 조각수법 등에서 뒤떨어진 면을 보이며 호족의 영향을 받아 강한 지방색을 보여준다.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석조 아미타여래입상(국보)은 통일신라 성덕왕 때(719년)에 김지성이 부모의 명복을 위해 조성한 불상이다. 신체의 비례는 인체에 비례와 비슷하며, 각 비례에서 주는 전체적인 조형미도 뛰어난 편이다. 얼굴의 세부 표현도 섬세하며 사실적이다. 광배 뒷면에 불상을 조성한 내력에 대해서 기록해 놓고 있다.

감산사 미륵보살.아미타불,
두 불상은 경주의 감산사(甘山寺) 터에서 옮겨온 것으로 광배 뒷면에는 이 불상을 만든 사람, 만든 목적 등이 자세하게 새겨져 있다. 명문에 따르면, 이 불상들은 집사부시랑(執事部侍郞) 김지성이 부모의 은혜와 임금의 언덕에 보답하고자 성덕왕 18년(719)에 만들기 시작한 아미타불과 미륵보살이다. 불상을 만들던 도중 성덕왕 19년(720)에 김지성이 죽자 김지성의 명복을 비는 내용도 아미타불 광배 뒷면에 함께 새겨졌다. 미륵보살은 온화한 표정과 허리를 약간 비튼 자세를 보이며, 이미타불은 엄숙한 표정으로 곧게 선 자세를 하고 있다. 통일신라 8세기 전반 석조 조각의 수준을 잘 보여 주는 빼어난 작품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石彫 毘盧遮那佛 坐像)은 경북지역 절터에서 있었다고 전해지는 불상이다.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지권인 손갖춤을 하고 있는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하고 있다. 사실적인 조각수법, 화려하고 생동감 넘치는 광배와 대좌 등 통일신라말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비로자나불은 온 누리에 가득 찬 진리의 빛을 형상화한 부처이다. 우리나라에서 비로자나불상은 8세기에 등장하여 9세기에 크게 유행하였는데,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보관을 쓰지 않은 부처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이 특징이다. 손갖춤으로는 한쪽 손으로 반대편 손가락을 감싸 쥔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다. 이 비로자나불상은 얼굴이 동그랗고 표정이 현실적이며, 신체는 둔중하고 옷주름은 계단 모양으로 규칙적이다. 화려하고 생동감 넘치는 광배와 대좌는 통일신라 후반기 석불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부처가 설법한 진리가 태양 빛처럼 우주에 가득 비치는 것을 형상화한 것이 비로자나불이다. 화엄신앙의 비라자나불은 진리 그 자체를 뜻하는 법신불(法身佛)이기 때문에 형상화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나, 7세기 무렵 중국에서 불상이 만들어졌으며 우리나라에서는 9세기 널리 유행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경주 남산 삼릉곡 6번째 절터에 있던 불상을 옮겨온 것이다. 석조약사여래좌상은 석가여래가 도를 깨닫는 순간을 표현한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약사여래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약사여래는 질병을 고쳐주는 부처로 둥근 약단지를 들고 있어 쉽게 구분할 수 있다. 광배에는 불상과 꽃무늬, 불꽃무늬로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으며 대좌에는 향로와 공양천인상을 새겨놓고 있다. 신체의 표현이나 옷주름 등에서 통일신라 전성기 불상의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화려한 광배 장식 등 9세기 불상의 특징도 같이 가지고 있다.

석조 약사불 좌상(石彫 藥師佛 坐像), 통일신라 9세기, 경주 남산 삼릉곡
이 불상은 원래 경주 남산 삼릉곡 정상 가까이에 있는 마애대불(磨崖大佛) 건너편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약사불은 질병을 고쳐주고 재난에서 구해주며 음식과 옷을 주는 부처로 왼손에는 약단지를 들고 있다. 통통한 얼굴, 건장한 신체, 얌전하게 흘러내린 계단식 옷주름 등에서 통일신라 절정기인 8세기 불상의 여운이 보인다. 그러나 엄숙한 얼굴표현, 고개를 앞으로 숙인 자세, 화려하고 장식적인 광배와 대좌 등은 9세기 불상의 특징이므로 800년을 전후한 시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약사불(藥師佛)
약사불은 모든 육체의 질병뿐만 아니라 무지의 병까지도 고쳐주는 부처로서 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도 불린다. 이 부처는 둥근 약단지를 들고 있어 쉽게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철조불상
철조불상은 중국 수나라 때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 때 등장하여 고려 때까지 유행하였다. 철불을 만들던 시기는 왕실의 권력이 흔들리고 지방 호족들이 세력을 키우던 시기이다. 지방호족들이 후원하여 많은 불상을 조성하면서 청동 대신 철을 이용하여 불상을 조성하게 되었다. 이전의 불상에 비해 투박하면서도 웅장한 모습을 보여준다.
하남 하사창동 철조석가여래좌상(보물)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철조불상으로 높이 2.8.m의 거대 불상이다. 석굴암 본존불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으나 세부표현이나 조각수법이 떨어지는 고려초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무릎에 옻칠 흔적이 남아 있어 불상 전체에 옻칠을 한 다음 도금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초기 지방 호족세력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조성했던 거대 불상 중 하나이다.

“보이지 않는 절대의 힘이 방안 분위기의 장엄함을 한층 조성해 준다는 느낌이다. 정면을 바라보는 얼굴을 앞에서 우러러도 좋지만 고요한 시간에 먼 곳에서 옆 얼굴을 바라보노라면 일점 속기(俗氣)없는 신비로운 검은 영상이 마치 슬픈 마음처럼 가슴을 일렁이게 해 줄 때가 있다.”
– 최순우, 『철조석가여래좌상』(1980년) –철조불 좌상(鐵造 佛 坐像), 고려 10세기, 경기 하남 하사창동 절터, 보물
쇠로 만든 이 부처는 경기도 하남시 하사창동의 한 절터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지금도 하사창동의 절터에는 돌로 만든 대좌의 일부가 남아 있다. 이 부처는 높이가 2.88m에 무게가 6.2톤에 달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철불이다. 석굴암 본존불과 같은 형식의 옷차림과 손갖춤을 하고 있으나 허리가 급격히 가늘어진 조형감과 추상화된 세부 표현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불상을 계승한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부처의 양 무릎에는 딱딱하게 굳은 옻칠의 흔적이 남아 있어, 원래 불상 전체에 두껍게 옻칠을 한 다음 도금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포천 철조 여래좌상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으며, 편단우견의 착의법 등 석굴암 본존불의 특징을 계승하고 있다. 조각수법이나 조형미가 통일신라 불상에 비해 떨어지며 부자연스러운 점 등은 고려초기 경기 북부 지방 불상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경기도 포천에서 출토된 불상으로 어떤 사찰에 있던 불상인지는 알 수 없다.

철조 불 좌상, 鐵造 佛 坐像, 고려 10세기, 경기 포천 출토
두 손이 모두 없어졌지만, 오른 손목의 위치로 보아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석가모니가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도를 깨닫는 순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손갖춤)의 손갖춤을 취한 것으로 추정된다. 편단우견(偏袒右肩, 오른쪽 어깨는 드러내고 겉옷인 대의를 왼쪽 어깨와 오른쪽 허리에 걸친 모습)의 착의법, 무릎 앞의 부채꼴 주름 등에서 석굴암 본존불의 모습을 따르고 있으나, 허리가 길어진 부자연스러운 조형미 등으로 미루어 석굴암 본존불을 계승한 고려 초기 불상임을 알 수 있다. 이 부처에서 볼 수 있는 둥글고 온화한 얼굴, 항마촉지인의 손갖춤, 대의의 깃이 왼편 어깨에서 뒤집힌 점, 대의의 물결식 옷주름 등은 개성을 중심으로 한 경기 북부지역 불상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은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불상으로 여래(如來)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단정한 얼굴, 뛰어난 주조기술 등에서 통일신라 불상의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형식화된 옷주름 등 세부표현에서 사실성이 떨어지는 편이다.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초에 조성된 불상으로 추정된다. 출토 지역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 鐵造 毘盧遮那佛 坐像, 통일신라 말 ~ 고려초
비로자나불은 온 누리에 가득 찬 진리의 빛을 형상화한 부처이다. 우리나라에서 비라자나불상은 8세기에 등장하여 9세기에 크게 유행하였는데,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여래(如來, 부처를 부르는 다른 말로 ‘진리의 체현자’ ‘열반에 다다른 자’라는 뜻)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이 특징이다. 단정한 얼굴, 안정감 있는 자세, 표면에 이음매가 보이지 않는 뛰어난 주조 기술 등에서 통일신라 불상의 전통이 엿보인다. 그러나 형식화된 옷주름 등 세부 표현에서는 사실성이 떨어지는 고려 철불의 특징도 함께 나타낙 있어, 통일신라 말 고려 초에 제작된 불상으로 보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보원사지 철조여래좌상은 쇠로 만든 불상으로 고려초인 11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두 손은 없어졌지만 손목의 형태 등으로 볼 때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석가모니를 형상화한 불상으로 보인다. 몸에 비해 큰 머리, 부자연스러운 옷주름 등 투박하면서, 호족세력의 힘을 과시하는 고려 초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부처, 철조 불 좌상(鐵造 佛 坐像), 고려 11세기, 충남 서산 보원사 터 출토
쇠로 만든 이 부처는 충남 서산시 운산면 보원사 터에서 옮겨온 것이다. 두 손이 모두 없어졌지만 오른 손목의 위치로 보아 손갖춤은 석가모니가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도를 깨닫는 순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항마촉지인으로 추정된다. 몸에 비해 큰 머리와 부자연스러운 옷주름 등은 고려 철불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특히 강원도 원주에서 출토된 철불3구와 얼굴모습, 왼쪽 어깨에서 한 번 접혀져 있는 편단우견(偏袒右肩, 오른쪽 어깨는 드러내고 겉옷인 대의를 왼쪽 어깨와 오른쪽 허리에 걸친 모습), 왼팔이 접히는 곳에 표현된 리본 형태의 옷주름, 항마촉지인의 손갖춤 등에서 거의 동일한 수법을 보이고 있어 같은 조각가 집단이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이 부처님을 보는 순간 가벼운 마음의 흥분을 감출 수 없을 만큼 대번에 좋아졌다. 너그럽고도 앳된 얼굴의 싱싱하면서도 그윽한 미소 속에 스며진 더도 덜도 할 수 없는 참사랑의 간절한 뜻이 내 마음을 훈훈하게 어루만져 주었던 것이다. 마음이 어두울 때 바라보면 그 얼굴은 내가 네 마음 속을 헤아리노라 하는 듯, 혹은 이해하는 듯한 표정으로 굽어보는 것 같다.”
– 최순우, 『철조여래불두』(1980년)
금동불상
금동불상은 동을 부어 만든 후 금도금을 한 불상이다. 불교가 전래된 시기부터 만들어져 왔으며 석조불상과 함께 대표적인 불상을 만든 재료였다. 오늘날 예술적인 조형미와 작품성을 보여주는 불상들이 많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이후 급격하게 사라지면서 소조불상과 목조불상으로 대체되었다.
금동 아미타삼존상은 서방 극락정토을 관장하는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양쪽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서 있는 삼존상이다. 발원문에 따르면 고려시대(1333년)에 조성되었으며 다양한 계층의 많은 사람들이 불상 조성에 참여하였다. 인체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정형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금동 아미타삼존상, 고려 1333년
서방 극락정토를 관장하는 아미타불, 관음보살, 대세지보살의 삼존상이다. 양옆 두 보살상의 바닥판에 쓴 글에 따르면 1333년 장현과 부인 선씨의 시주로 불상이 제작되었다. 불상 안에 넣었던 복장물 조성 발원문에는 신분이 높은 사람부터 낮은 사람까지 다양한 계층의 많은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금동 관음보살 좌상이다. 초선초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수월관음을 표현하고 있다. 기존의 불상과는 달리 세부적인 내용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중국 명나라의 영향을 받은 불상이다.

금동 관음보살 좌상, 조선 초 15세기 경
관음보살이 가진 자비의 마음이 예술로 발현되어 성스러운 미의 경지에 도달한 상이다. 세운 무릎 위에 오른팔을 올리고 왼손으로 바닥을 짚은 자세은 수월관음 모습에서 연유하며, 전륜성왕이 취하는 자세라는 의미로 윤왕좌(輪王坐)라 부른다. 역삼각형 얼굴과 가늘고 긴 상체, 원형의 커다란 귀걸이와 온 몸을 휘감은 화려한 장신구는 명나라 영락 연간(1403~1424) 불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2016년 조사에서 조선 15세기와 17세기 두 차례 복장물이 납입된 것이 확인되었으며, 조선 전기 직물 편 일부와 “뎡향(정향)”, “인삼(인삼)” 등 옛 한글이 표기된 포장 종이 등도 함께 발견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목조불상
목조불상은 나무를 조각하여 만든 부처와 보살의 형상이다. 목조불상은 주변에서 재료를 구하기 쉽고 조각하기도 용이하여 이른 시기부터 만들어졌으며 석조불상이 많은 우리나라와는 달리 일본은 목조불상이 주를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소조불상과 함께 많이 만들어 졌다. 조형적인 예술성이나 종교적인 표현 등이 돋보이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특색있는 고유의 불상의 형태를 보여준다.
조선후기(17~18세기)에 조성된 목조여래좌상이다. 조선후기 사찰 주불전인 대웅전에 모셔졌던 삼방불 중 동방 유리광(琉璃光) 정토의 약사불로 추정된다. 신체에 비해 머리를 크게 표현하고 있으며, 얼굴이나 신체를 단순하면서 간략하게 표현하고 있다. 고개를 앞으로 숙인 모습을 하고 있는데 불전에서 기도를 올리는 신도들이 불상의 얼굴을 올려다 볼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어떤 사찰에 있었던 것인지는 설명이 없다.

부처, 목조불좌상(木造佛坐像), 조선 17~18세기
조선 후기에 널리 제작된 삼방불(三方佛) 중의 한 점이다. 삼방불은 일반적으로 가운데 석가불, 석가불의 왼쪽에 약사불, 오른쪽에 아미타불로 구성된다. 각기 중방, 동방, 서방을 관할하는 삼방불은 조선 후기 사찰에서 가장 중요한 전각인 대웅전에 봉안되었으며, 이 불상은 석가불의 왼쪽에 봉안된 동방 유리광(琉璃光) 정토의 약사불로 추정된다. 불상의 머리는 신체에 비해 크고 어깨는 움츠렸으며 고개를 앞으로 숙인 모습이다. 이러한 불상의 형태와 자세는 높은 불단에 봉안된 불상을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예불자의 시선을 고려하여 제작한 결과로 추정되며, 조선후기 불상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목조 보살입상은 조선후기 17세기에 조성된 높이 93cm의 비교적 큰 규모의 불상이다. 삼존불상 중 좌협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머리에 쓴 보관, 장신구 등 장식성과 화려한 세부표현이 특징인 불상이다.

목조 보살입상, 조선 17세기 전반
화려한 의복과 장신구를 걸치고 손에 연꽃 가지를 든 보살입상으로, 조선 후기 불교미술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는 상이다. 왼손을 위로 올리고 오른손을 내려 연꽃 봉오리가 달린 가지를 든 자세로 미루어 보아, 삼존상의 일부였다면 좌협시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 보살상은 상체에 내의와 천의, 하체에 군의와 요포를 겹겹이 입었고, 머리에 보관을 쓰고 가슴, 팔, 허리에 모두 장신구를 걸쳐 장식성이 풍부한 것이 특징이다. 두 팔의 좌우로 물결치며 흘러내리는 천의 자락과 통통한 얼굴 표현, 신체 구조의 뛰어난 조형성에서 조선 17세기 전반에 제작된 상으로 추측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도제불상
도제 여래 좌상은 흙으로 빚어 유약을 발라 구운 도제 불상으로 문헌 상에서 남아 있는 도제 불상의 사례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조선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도제 여래 좌상, 조선후기
흙으로 빚고 유약을 발라 구운 도제불상이다. 유약이 없는 부분을 보면 백자용 백토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634년(인조12) 청의 사신이 요구한 물건 중 “번조석불(燔造石佛)”이 포함돼 있고, 정시한은 그의 <산중일기>에서 1687년(헌종 13) 금강산 보덕굴에서 “번자불(燔磁佛”을 보았다고 기록했다. 이 상은 문헌기록 속 도제불상의 존재를 입증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불교조각
우리나라에 불상이 처음으로 소개된 때는 불교가 전래된 4세기 후반이지만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한 것은 6세기부터이다. 불상제작 초기에는 단순히 중국 불상을 모방하였으나, 점점 우리나라 특유의 조형감각이 두드러진 불상을 만들게 되었다. 삼국시대 고구려 불상이 사실적인 인체표현보다 강건한 기상을 강조하였다면, 백제불상은 정교함과 세련미가 돋보이며, 신라 불상에는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다. 통일신라는 삼국 불상의 특징을 하나로 아우르는 한편 8세기에는 중국 당나라의 사실적인 조각 양식인 성당양식을 받아들여 조화와 균형을 이룬 이상적인 불상을 만들었다. 9세기부터는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새로운 불상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특히 중국이나 일본에서 유행하지 않던 항미촉지인(降魔觸地印, 석가모니가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도를 깨닫는 순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손갖춤)을 한 불상이나 지권인(智拳印, 곧추세운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싼 손갖춤)을 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눈에 보이지 않는 진리의 빛을 형상화한 부처)이 유행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새 왕조의 활력을 반영한 거대한 불상과 지역별로 특색있는 불상을 만들었다. 고려 후기에는 중국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불상을 만들기도 하였다. 조선시대는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누르는 정책을 따르던 시기였다. 그러나 초기에는 왕실이나 상류계층에서 불상 제작을 후원하였으며, 조선후기에는 여성과 지역민의 후원 아래 전국 각지에서 승려 조각가들이 집단을 이루며 불상을 제작하였다. 불교조각실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대표적인 불상과 보살상을 시대별, 주제별로 전시하였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쇠와 돌로 만든 대형불상, 국보로 지정된 반가사유상과 금동으로 만든 작은 불상들을 통하여 우리나라 불교조각의 특징과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출처>
-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 ‘불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