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토기는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빗살무늬토기와 청동기시대 무늬없는토기, 이후 철기제작과 함께 물레와 굴가마의 사용 등 새로운 기술적 발전을 보여주었으며, 역사시대에는 도기, 자기 등으로 발전하며 오늘날까지 인류의 삶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토우장식 그릇 받침, 삼국시대 5세기, 점토, 국립중앙박물관>, <백자 철채 인물.소.말모양 명기, 조선 17세기, 국립중앙박물관>
<토우장식 굽다리접시, 삼국시대 5~6세기, 국립중앙박물관>, <백자 철채 인물.소.말모양 명기, 조선 17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예로부터 인간은 자연에서 얻은 기본 소재인 흙으로 사람과 동물 모양을 만들어 토기를 장식하거나 무덤에 넣었다. 삼국시대 원통형 그릇 받침대에 부착된 도망가는 개구리와 쫓는 뱀 토우는 생사를 오가는 냉혹한 자연 현장을 보여준다. 이에 반해 더벅머리 총각, 소와 말 한쌍씩을 소박하게 만든 조선시대 백자 명기에서는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따뜻한 삶이 느껴진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토기>
<붉은간토기, 검은간토기>
<가야 토기>
<가야 토기>
우리나라에서 자기가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통일신라 말기인 9~10시에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많았던 것 같다. 황소의 난에서 시작된 당나라 말에서 오대에 이르는 혼란기에 중국 도자기 기술자들이 한반도로 넘어오면서 월주요의 영향을 받은 도자기들이 고려초기부터 생산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청자는 아름다운 비취색으로 대변되는 고려청자 특유의 색과 장식기법으로 고려만의 자기를 만들게 된다.
<고려청자>
<고려 청자>
<고려 청자>
<고려 청자>
분청사기는 고려 상감청자를 계승한 도자기제작기법으로 ‘백토로 분장한 회청색의 사기’라는 뜻으로 20세기에 들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외형상 고려청자에 비해서 제작수법이 쇠퇴한 느낌을 주고 있지만, 투박하면서도 서민적인 면모를 보이는 등 한국적인 미를 잘 담아내고 있다.
<분청사기>
<분청사기 조화 모란무늬 항아리, 조선 15세기 후반 ~ 16세기 전반, 국립중앙박물관>
큼직한 항아리에 흰 흙을 거칠게 바른 후 선으로 긁어 모란무늬를 간략하고 힘차게 표현했다. 갈색 바탕흘과 어이저운 백색 못자국 위로 모란무늬를 그린 선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청돈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멈추지 않고 솟아 올는 생명력을 보여주는 듯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분청사기 조화 기법 편병, 조선 15세기 후반 ~ 16세기 전반, 국립중앙박물관>
<분청사기 조화 기법 편병, 조선 15세기 후반 ~ 16세기 전반, 국립중앙박물관>
과감하고 빠른 선이 특징인 조화기법 분청사기는 현대적이라는 평을 받는다. 조화(彫花)는 거친 갈색 바탕에 백토를 바른 뒤 표면을 선으로 긁어 무늬를 표현하는 기법이다. 조선 15세기 후반부터 지역마다 특징적인 기법으로 분청사기를 장식했는데, 자유분방하게 변형한 반추상적인 표현으로 장식된 분청사기가 많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분청사기 조화 기법 편병, 조선 15세기 후반 ~ 16세기 전반, 국립중앙박물관>
<분청사기>
<분청사기>
백자는 유교사회를 추구했던 사대부라 불리웠던 지배계층의 취향에 잘 맞아 떨어졌다. 조선전기에는 사대부 취향의 백자와 서민 취향의 분청사기가 같이 만들어졌으나, 15세기 경기도 광주에 관요가 설치되면서, 왕실에서 주로 백자를 만들어 사용했기때문에 지방가마들도 지배계층의 수요에 맞추어 분청사기 대신 백자를 만들게 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백자>
<조선 백자>
<조선 백자>
백자는 무늬를 표현하는 수법이나 안료에 따라 분류할 수 있는데, 조선백자는 상감청자를 계승한 백자상감(白磁象嵌), 무늬가 없는 순백자(純白字), 코발트 안료를 사용하여 푸른색 무늬를 그린 청화백자(靑畵白磁), 산화철 안료를 이용한 철화백자(鐵畵白磁), 산화동으로 무늬를 그린 동화백자(銅畵白磁, 진사백자)가 있다.
<백자 청화 모란.봉황무늬 병, 조선 19세기, 국립중앙박물관>
<백자 양각 청화 장생무늬 필통, 조선 19세기, 국립중앙박물관>,<백자 투각 청화 장생무늬 필통, 조선 19세기, 국립중앙박물관>
<백자 청화 구름.용무늬 항아리, 조선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용은 구름을 몰고 비를 부르는 신령한 동물로, 동아시아에서 최고 권력자가 독점한 상징물이었다. 이 항아리는 왕실 연회에서 술을 담거나 종이와 비단으로 만든 꽃나무를 꽂는데 사용했다. 왕실 권위를 상징하는 기물이어서 청화를 사치스럽다고 여겨 금지했을 때도 계속 만들어졌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백자 청화죽문 각병(국보)는 몸통을 모깎기 방법을 사용하여 8각 형태로 만든 작품이다. 바탕에는 밝은 청화 안료를 사용하여 한쪽면에는 대나무 한그루를, 다른면에는 여러 그루의 대나무가 밀집해 있는 모습을 그렸다.
<백자 청화 대나무무니 각병, 조선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국보>
동아시아에서 선비를 상징하는 대나무를 단단한 팔각형 병에 간결하고 청초하게 그렸다. 이 병은 바탕흙이 눈부시게 희고 유약이 맑고 투명하여 최상품 조선백자의 면모를 보여준다. 18세기 전반 조선백자의 수준 높은 아름다움을 대표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청화 백자>
<동화백자 외>
흙을 다루는 지혜
인간이 밟고 있는 흙은 가장 구하기 쉬운 재료이자, 늘 함께 있는 물질입니다. 흙과 물을 섞어 형태를 만들고 불에 구워 그릇을 완성하는 기술은 인간의 지혜와 노력의 산물입니다. 고령토와 같은 좋은 흙을 찾아 잘 정제하고 1,300도 이상으로 굽는 온도를 높이고, 유약으로 물이 스며들지 않게 하고, 그릇 모양을 독창적으로 만들고, 표면을 장식하는 기법이 발전했습니다. 여러 과정을 거쳐 음식을 담는 그릇에서 예술 작품의 경지로까지 오르게 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금, 최고의 가치를 지닌 금속
<귀걸이, 삼국시대 5~6세기, 국립중앙박물관>
금은 녹이 슬지 않고 광택이 변하지 않으므로 인류가 가장 가치 있는 금속으로 아껴왔다. 삼국시대에는 지배계층의 지위를 상징하는 금제 장신구가 유행했다. 이 귀걸이는 금에 약간의 은을 합금해 강도를 높인 귀걸이다. 금판을 두드려 고리를 만들어서 속이 비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여지무늬 허리띠, 고려 12~13세기, 청동에 금도금, 국립중앙박물관>
금은 희귀하기 때문에 다른 금속으로 물건을 만든 후 금을 얇게 입혀 금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금도금 기법이 개발되었다. 이 허리띠 장식은 청동에 금도금한 것으로, 여덟개의 판과 끝장식이 남아 있다. 각각의 판에 여지 무늬가 도드라지게 표현되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은, 빛나지만 변하는 금속
<허리띠, 삼국시대 5~6세기, 은, 국립중앙박물관>
<드리개, 삼국시대 5~6세기, 은, 국립중앙박물관>
은은 희고 반짝이지만 색이 잘 변한다. 은은 귀한 금속이지만 금보다 아래 등급으로 분류되었다. 은 허리띠 착용자는 금 허리띠 착용자보다 신분이 낮았다. 신라에서 금 허리띠는 수도 경주의 대형 무덤에서만 출토되는데, 은 허리띠는 경주와 신라에 편입된 지역의 대형 무덤에서 출토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연꽃.모란 넝쿨무늬 팔찌, 고려 12~13세기, 은, 국립중앙박물관>
은은 두들기거나 정으로 또아 무늬를 섬세하게 표현하기 좋은 재료이다. 이 팔찌 겉면에는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은판을 두들겨 모란과 연꽃 넝쿨무늬를 촘촘하게 표현했다. 팔찌 안쪽은 정으로 넝쿨무늬를 쪼아 새겼다. 팔찌 속에 부적과 다리니경문이 들어 있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청동, 인간이 만든 최초의 금속
‘전 덕산 청동방울 일괄(국보)’은 충남 예산군 덕산면 남연군묘 근처에서 출토된 청동방울이다. 출토된 청동방울은 8각형 별모양 팔주령 1쌍과 아령모양 쌍두령 1쌍, 포탄모 간두령 1쌍, x자 형태로 둥글게 말려있는 조합식쌍두령 1점이 있다. 중국에서 들어온 청동기 문화가 소멸해가던 기원전 3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유물로 추정되고 있다. 청둥기시대 후반 제사장들이 주술적 용도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팔주령, 덕산출토로 전해지는 청동방울, 초기철기시대, 청동, 국립중앙박물관, 국보>
<쌍두령, 덕산출토로 전해지는 청동방울, 초기철기시대, 청동, 국립중앙박물관, 국보>
<간두령, 덕산출토로 전해지는 청동방울, 초기철기시대, 청동, 국립중앙박물관, 국보>
<조합식쌍두령, 덕산출토로 전해지는 청동방울, 초기철기시대, 청동, 국립중앙박물관, 국보>
무른 구리에 주석을 섞으면 단단한 청동이 된다. 인류 최초의 인공합금인 청동은 계급사회의 출현을 증언한다. 이 청동 방울들은 당시 최고 권력자인 제사장이 의례에 사용한 도구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거울, 중국 한 2세기 후반, 청동, 국립중앙박물관>
중국에서는 상주시대부터 청동기를 만들었다. 이 두 점의 거울 뒷면 끈을 꿰는 고리 주변에 각각 봉황과 짐승무늬가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봉황무늬 향합, 고려 14세기, 청동과 은, 국립중앙박물관,>
끌로 무늬를 파내고 가는 금속선을 박아 넣는 입사 기법은 고려 때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이 합은 향을 담아두는 그릇으로, 은입사 기법으로 무늬를 표현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봉업사명 청동향로(보물)’는 경기도 안성시에 있는 봉업사 절터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이다. 몸체와 덮개, 세개의 발이 달린 기대(器臺)로 구성되어 있다. 향로의 중간 부분은 고려시대 향완과 비슷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으며 뚜껑에는 보주가 달려 있다. 전체적인 비례감과 형태에서 주는 조형미가 뛰어나다. 뚜껑에 ‘봉업사(奉業寺)’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고려초 봉업사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봉업사’가 새겨진 향로, 고려 11~12세기, 청동,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철, 인간과 가장 밀접한 금속
<세잎무늬 둥근고리자루 칼, 삼국시대 5~6세기, 철과 은, 국립중앙박물관>
철광석은 지구에 고르게 분포하지만 철을 뽑아내는 제련 공정이 까다롭다. 한국에서는 삼국시대 3세기 무렵부터 철기를 대량으로 제작했다. 무기 제작에는 당시 금속을 다루는 최고의 기술이 집약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강도가 높은 철제 칼이 만들어졌다. 둥근고리자루 칼은 삼국시대 지배계층을 대표하는 무기였다. 이 두 자루의 칼은 손잡이와 고리를 은으로 만들었다. 고리 안쪽에는 나뭇잎 모양을 장식해서 주인의 신분과 지위를 나타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금속을 다루는 지혜
선사시대부터 인간은 금, 은, 철, 수은, 주석, 구리, 납을 사용했습니다. 때로는 우연히, 때로는 노력으로 금속을 발견했습니다. 청동과 같은 금속을 만들기도 하고, 금동기법처럼 금속의 가치를 높이는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열을 가하면 녹고, 두드리면 펴지고, 잡아당기면 늘어나는 금속의 성질을 더 잘 활용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인간은 계속 새로운 금속을 찾아내고 활용법을 탐색할 것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생각하는 여인 최종태, 1992년, 청동, 국립현대미술관>
자연은 인간에게 경이로움과 막연한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지식이 늘면서 인간은 삶을 근본적으로 사유하기 시작했다. 이 작품처럼 인간은 유한한 삶을 어떻게 살아야하고 죽음 뒤에 무엇이 있을지 고민하면서 종교의 차원이 높아졌다.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선과 절제된 형태, 소박한 재료의 성질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자연을 활용하는 지혜
인간은 변화무쌍한 자연환경에 살아남기 위해 자연을 슬기롭게 활용합니다. 인간이 자연을 활용하며 얻은 모든 경험과 지혜를 버무려낸 것이 바로 인류의 역사입니다. 멈추지 않은 도전 정신으로 인류의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끝없는 호기심과 상상력, 문제 해결을 위한 집념으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도토기와 금속공예품에는 우리 선조가 흙과 금속과 같은 자연의 물질을 활용한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출처>
-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 국보 덕산 청동방울 일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 ‘보물 봉업사명 청동향로’,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 ‘국보 백자청화죽문 각병’,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 ‘보물 백자 청화동정추월문 항아리’,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