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에밀레종’으로 불리기도 하는 성덕대왕 신종(국보)이다. 이종은 현존하는 범종 가운데 가장 큰 종으로 높이 3.5 m, 무게 18.9 t에 이르는 큰 종이다. 이 종은 크기뿐만 아니라 장식된 문양이나 세부조각 수법이 상당히 뛰어나며, 그 구성 또한 독창적이면서 후대의 모범이 되었던 종이다. 종의 몸통 아래와 위쪽에는 꽃무늬가 있는 띠로 장식되어 있고 종을 치는 부분에는 연꽃 모양의 장식과 그 양쪽에 비천상이 새겨져 있다. 비천상은 이 종에 새겨진 장식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며 뛰어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공양자상이라 부르는 비천상은 향로를 받쳐 들고 공양하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주위로 모란당초무늬가 피어 오르며, 머리뒤로 천의를 휘날리고 있다. 약간은 슬퍼보이는 듯한 비천상의 공양하는 모습과 은은한 종소리로 인해 종을 만들때 아이를 시주했다는 ‘에밀레종’이라는 슬픈 전설을 만들어 냈던 것 같다.(?)
<성덕대왕 신종(국보)>
이 종은 경덕왕이 부친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들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아들인 혜공대(771년)에 완성되었으며 성덕대왕 신종이라 불렀다. 이 종은 원래 성덕왕의 원찰이었던 봉덕사에 매달았는데, 절이 폐사되고 영묘사로 옮겼다가 조선시대에는 경주읍성 남문 밖에서 성문을 여닫는 시간을 알려주는 종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종은 통일신라 전성기에 만들어진 종으로 크기도 하지만 그 제작수법이나 종에 새겨진 각종 문양과 조각수법 등이 후대에 만들어진 것보다 상당히 뛰어나며 1,3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원형이 크게 손상되지 않고 사용되어왔던 종이다. 지금도 녹음된 종소리를 들려주고 있으니까 최근까지도 사용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비천상과 연화문>
성덕대왕 신종은 현존하는 범종 가운데 크기나 형태, 예술적인 조형미 등 모든 면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종을 제작하는데 구리 12만근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이 종은 한국 범종의 양식이 완성된 형태를 보여 주고 있다.
<종을 메달고 있는 부분인 용뉴>
<음통>
사실적인 조각수법이 돋보이는 용뉴는 용이 목을 구부려 천판에 입을 붙이고 있으며, 그 뒷편으로 음통이 붙어 있다. 음통은 종의 소리를 보완하기 위한 것으로 우리나라 범종에서 만 볼 수 있다. 이 종의 음통은 대나무가지처럼 만들었는데 연꽃무늬로 장식하고 있다.
<아래부분>
2009년까지는 종각에 제대로 매달려 있어서 그 아래로 관람객들이 동전을 던져놓기도 했는데, 지금은 2011년에는 종각이 하중을 견디지 못해 나무를 받쳐놓고 있다.
<비천상>
성덕대왕 신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종에 새겨진 비천상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비천상은 당좌와 당좌 사이에 새겨진 장식으로 종에 따라서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상, 불.보살상, 보살입상 등이 장식되는데, 이 종에는 향로를 받쳐든 공양자상을 새겨 놓고 있다. 이는 성덕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들어진 종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종의 은은한 소리와 함께 약간 슬퍼보이는 공양자상이 모습이 어린아이를 집어 넣었다는 전설을 낳은 것으로 보인다.(?)
<반대편 쪽 비천상.>
비천상 주위로 모란당초무늬가 피어오르고 있고, 머리뒤로 천의를 휘날리고 있다. 이런 양식은 다른 신라동종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한국비천상의 대표가 되는 조각수법으로 예술적성이 아주 뛰어나다.
<종신 위쪽 띠(상대),>
위쪽에는 보상당초문으로 장식하고 있다. 그 아래에는 보상당초문양으로 장식한 유곽과 연꽃으로 표현된 유두가 들어 있다. 비천상과 마찬가지로 4곳에 유곽을 두고 있다.
<종의 아래쪽을 장식하고 있는 하대>
종의 아래쪽을 장식하고 있는 하대. 8릉의 굴곡을 새기고, 당좌 같은 원형의 연꽃무늬를 여덟군데 새겼으며 그 사이를 당초무늬로 연결하고 있다.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
비천상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연꽃문양을 하고 있는 당좌 2개을 배치하고 있다. 후대에 만들어진 다른 범종에 비해서도 무늬가 선명하게 남아 있어 당시 범종을 만드는 기술 수준을 잘 보여준다.
범종
종은 시간을 알리거나 사람들을 모을 때, 그리고 의식을 거행할 때 쓰였습니다. 특별히 절에 있는 종은 불교를 의비하는 ‘범’자를 붙여 범종이라고 부릅니다. 이 범종 소리는 부처님의 말씀에 비유되기도 하며, 이 소리를 듣게 되면 지옥에 떨어져 고통 받던 중생까지도 구제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보통 한자로 종하면, ‘쇠 금金’변에 ‘아이 동童’자가 붙은 ‘종鐘’자를 씁니다. 중국이나 일본 종을 일컬을 때는 이렇게 씁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종을 지칭할 때는 ‘쇠 금金’변에 ‘무거울 중重’자가 붙은 ‘종’자를 씁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종에 새겨진 글씨나 기록에 쓰였기 때문입니다. 중국, 일본 종고 우리나라 종은 그 모습에서도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종을 매다는 종뉴는 중국식의 머리가 둘 달린 용이 아니라, 머리와 다리를 힘차게 뻗치고 있는 한마리의 용입니다. 이 종뉴 옆에는 중국이나 일본 종에는 없는 음통이 있습니다. 또한 중국 종이나 일본 종과 달리 종의 위아래에는 보상화무늬나 모란당초무늬를 새긴 띠와 4개의 유곽이 있으며, 유곽내에는 각각 9개씩, 총 36개의 유두가 있습니다. 그리고 비천상과 종을 치는 부분에 당좌가 새겨져 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2년)
<발원문>
당좌와 비천상 몸체 사이에 발원문과 함께 종 제작에 참여한 사람의 이름 등 1,000여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성덕대왕 신종에 새져긴 글씨, 통일신라 771년
성덕대왕 신종(국보)은 한국에서 가장 큰 종이다. 봉덕사종, 에밀레종으로도 불리는 이 종은 신라 33대 성덕왕의 공덕을 기리고, 왕실과 국가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원래 성덕왕의 아들인 경덕왕이 이 종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당대에 이루지 못하고 혜공왕이 아버지 경덕왕의 뜻을 이어 구리 12만근을 들여 완성하였다. 아름다운 비천상으로 유명한 성덕대왕 앞뒷면에는 1천여 자의 양각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여기에는 종을 치는 목적, 이 신종을 제작하게 된 연유 그리고 제작에 참여한 인물들이 기록되어 있다. 앞면에 있는 김부원이 쓴 글씨는 균형이 잘 잡힌 해서이며, 뒷면에 있는 요단의 글씨는 날카로운 필치의 글씨이다. 살이 적당히 붙은 필획은 중후한 느낌을 주어 커다란 종과 잘 어울린다. 비록 직접 쓴 글씨는 아니더라도, 통일신라의 문화를 대표하는 성덕대왕 신종에 새겨진 이 글씨는 당시 서예의 수준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중앙박물관에 전시된 탁본.>
성덕대왕 신종 뒷면에는 찬시 및 종을 만든 이들의 직함과 이름 등이 있다. 글을 지은 이는 신종 앞면의 글을 지은 한림랑급찬이며, 글씨는 대조 벼슬을 한 요단이 썼다고 한다.
성덕대왕 신종 뒷면에 새겨진 글씨탑본, 해서, 771년
성덕대왕 신종 뒷면에는 찬시 및 종을 만든 이들의 직함과 이름 등이 있다. 글을 지은 이는 신종 앞면의 글을 지은 한림랑급찬이며, 글씨는 대조 벼슬을 한 요단이 썼다. 이 찬시 역시 앞면과 같이 혜공왕의 위엄을 찬양하고, 경덕왕과 혜공왕의 효심으로 만들어진 신종의 장중한 면모와 아름다운 소리에 대한 찬사, 그리고 신종을 제작한 위대한 업적의 빛남과 영원함을 기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마모가 심하여 또렷하게 드러나지는 않으나, 글씨는 날카로움을 약간 드러낸, 유연하고 자연스러운 필치의 해서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앞면>
앞면에는 종에 적힌 명문의 본문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성덕대왕을 칭송하고, 명복을 빈다는 내용이다.
성덕대왕 신종 앞면에 새겨진 글씨 탑본, 해서, 통일신라, 771년
성덕대왕 신종 앞면의 글은 부처님께서 종을 높이 단 까닭, 성덕대왕에 대한 칭송, 종을 만든 경덕왕과 혜공왕의 효심을 기록하며, 신종의 소리로써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빌고 깨달음을 얻어 진리의 세계에 도달하기를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혜공왕 때 한림랑급 벼슬을 하던 김필요가 글을 짓고 글씨는 한림대서생 벼슬을 하던 김부원이 썼다. 글씨의 마모가 심한 편이지만 균형이 잘 잡힌 해서체로 썼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 8세기 서예에서 보이는 특징이기도 한 여유있는 필획과 유연한 필치는 커다란 종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국림경주박물관 마당에 걸려 있는 성덕대왕 신종.>
이 종은 원래 성덕대왕의 원찰이었던 봉덕사에 달았다가 절이 폐사된 뒤 영묘사로 옮겨졌으며, 조선시대에는 경주읍성 남문 밖에서 시간을 알려주는 종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또 (왕은) 황동(黃銅) 12만근을 희사하여 부왕이신 성덕왕(聖德王)을 위하여 큰 종 하나를 주조하고자 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그 아들 혜공대왕(惠恭大王) 건운(乾運)이 대력(大曆) 경술(庚戌) 12월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공인들을 모아 능히 그것을 완성하여 봉덕사에 안치하였다. [이] 절은 곧 효성왕(孝成王) 개원(開元) 26년 무인(戊寅)(738년)에 부왕인 성덕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창건한 것이다. 그러므로 종명(鍾銘)에는 ‘성덕대왕신종지명(聖德大王神鍾之銘)’이라 하였다. 성덕대왕은 곧 경덕의 아버지로 전광대왕(典光大王)이다. 종은 본래 경덕대왕이 아버지를 위하여 시주한 금이었으므로 성덕종(聖德鍾)이라 한다. 조산대부(朝散大夫) 전태자사의랑(前太子司議郞) 한림랑(翰林郞) 김필월(金弼粤)이 임금의 교지를 받들어 종명을 지었는데, 글이 번다하므로 수록하지 않는다. (삼국유사 권 제3 제4 탑상 황룡사종 분황사약사 봉덕사종,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불국사 부근 경주시 조양동에 위치한 성덕왕릉,>
성덕대왕신종, 국보,
성덕대왕신종은 원래 성덕대왕(재위 702~737)의 원찰이었던 봉덕사에 있다가 이 절이 폐허가 되면서 영묘사, 경주읍성 남문 밖, 동부동 옛 국립경주박물관을 거쳐 197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습니다. 그런데 이 종은 우리들에게는 ‘에밀레종’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종을 만들 때 어린 아이를 집어넣어 만들었는데, 종을 칠 때 나는 소리가 마치 아이가 그 어미를 부르는 소리아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이야기는 신라의 전설이 망라되어 있는 조선 후기 읍지인 ‘동경잡기’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마 1920년대 종을 보다 신비롭게 보이도록 지어진 이야기로 생각됩니다. 과연 종을 만들 때 어린아이를 집어 넣었을까요? 살생을 금지하여 벌제조차 죽이지 않는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어린아이를 집어 넣어, 중생을 구제한다는 범종을 만들었을까요? 성덕대왕신종에 대한 과학적 조사를 펼친 결고, 사람 뼈를 이루는 성분인 ‘인’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 종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빼어난 종입니다. 특히 아름당은 종의 형태와 무늬, 심금을 울리는 종소리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습니다. 종 한 가운데 손잡이 달린 향로를 받쳐 들고 있는 비천의 모습은 성덕대왕의 극락왕생을 간절히 염원하는 듯 하지 않나요?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2년)
<출처>
-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2년
-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 위키백과, 2022년
- 삼국유사,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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