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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옥인동 윤씨가옥, 구한말 친일파 윤덕영 일가가 살았던 가옥

조선시대 경복궁 서쪽에 위치하고 있어 서촌이라 불렸던 옥인동에 있었던 ‘옥인동 윤씨가옥’이다. 이집은 친일파 윤덕영이 첩을 위해서 지은 것으로 전통적인 양반가옥과는 폐쇄적인 분위기를 주고 있다. 건물은 ‘ㄷ’자형으로 이루어진 안채 위주로 되어 있으며, 문간채와 마루방과 합쳐져서 전체적으로 ‘ㅁ’자형을 이룬다. 건물 전체적으로는 외관상으로는 크고 화려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내부는 방과 건물칸의 수도 상당히 많은 것으로 보이며, 건물 앞쪽 기둥머리에 익공을 치장하는 등 상당히 화려하게 지어진 집이다. 남산골 한옥마을에 있는 현재의 건물은 1910년대에 지어진 원래의 건물을 옮기려 했으나, 그 부재들이 너무 낡고 손상이 심해서 원래 모습을 본떠서 새로 신축한것이라고 한다. 건물을 지은 연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집안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건물이 폐허처럼 남아 있었다

<남산골 한옥마을에 복원한 ‘옥인동 윤씨가옥’>

서촌에서도 경치가 빼어난 수성동계곡에 있었던 별장이다. 원래의 건물이 너무 낡아 옮기지 못하고 원형에 가깝게 복원해 놓았다.

<대문이 있는 문간채>

서울의 다른 한옥과 마찬가지로 골목길을 향해 창문을 달아 놓았다.

<마당>

대문을 들어서면 안채의 대청마루가 바로 보이는 구조이다.  윤덕영의 첩이 살았던 집으로 한양 양반가의 일반적인 한옥에 비해서 폐쇄적은 구조를 하고 있다.

<‘옥인동 윤씨 가옥’의 건물내부>

전통적인 양반가의 ‘ㅁ’자형 주택과는 달리 궁궐 건물의 양식을 반영한 듯으로 보인다. 중앙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왼쪽에 안방을 배치하고 오른쪽에는 사랑방 역할을 하는 건너방과 부엌 등을 배치해 놓고 있다.

<대청마루>

대가족이 모여 살지는 않았지만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있다. 보통 양반 가옥에서 넓은 대청마루를 두는 이유는 집안 행사가 있을때 많은 사람들이 참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인데 반해, 첩이 살았던 이 집은 손님들을 초대하기 위해 잔치를 벌이는 등의 용도로 대청마루를 크게 지은 것으로 보인다.

<안방쪽 온돌방>

방쪽에는 4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방 내부>

<난간이 있는 툇마루>

<사랑방 역할을 하는 건너방과 부엌>

<부엌 내부>

<대청마루에서 본 문간채와 안마당>

본채건물과 문간채가 연결되어 있다. 문간채는 기단을 쌓지 않아 본채 건물보다 낮게 하여 격을 달리하고 있다. 문간채 옆으로는 넓은 마루방이 있어서 사랑채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부>

소리꾼 등을 초대하여 머무르게 했던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뒷마당 출입문>

부엌을 통해서 뒷마당을 출입할 수 있다.

<뒷마당>

건너방 뒷편으로 마당이 있고, 마당을 출입하는 작은 출입문을 두고 있다. 방에서 문을 열면 마당과 연결된다. 일반적인 한옥과의 사랑채와는 달리 툇마루를 두고 있지 않다.

<뒷마당을 출입하는 작은 협문>

<공연장>

이 가옥은 남산골 한옥마을 공연장 배경을 이루고 있다.

이 가옥은 조선 마지막 왕비인 ‘순정효황후 윤씨 친가’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황후의 일가이자 친일파인 윤덕영이 1910년대에 인왕산 아래 종루구 옥인동에 조성한 별장형식의 건물인 ‘벽수산장’의 일부인 것으로 밝혀졌다. 벽수산장은 친일파 윤덕영이 청휘각터를 비롯한 주위의 여러 별장터를 조성해서 만든 호화판 별장으로 그 면적이 2만평에 달했다고 한다. 또한 이 집과 친일파 민영휘 저택을 처음 봤을 때 궁궐 건물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권문세가라 하더라도 궁궐처럼 집을 건축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왕실이 권위가 떨어지면서 서울의 부호들이 궁궐건축을 담당하던 기술자들을 고용하여 궁궐건물처럼 지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가옥이 있었던 종로구 옥인동 일대>

이 집 주인인 윤덕영은 순종의 계비인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로 구한말 친일파로 큰 부를 축적했던 인물이다. 윤덕영 일가는 부근의 ‘박노수가옥’을 비롯하여 20여채의 건물들 짓고 모여 살았다.

서촌은 경복궁 서쪽 인왕산 기슭아래에 위치한 마을을 말하며, 현재 사직동.체부동.통인동.누상동.누하동.옥인동.신교동.청운동 일대를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전통적인 권문세가들이 살았던 북촌과 비교하여 서촌이라고 부르며 조선시대에는 ‘웃대’라 불렀다고 한다. 북촌이 권문세가들이 주로 살았던 마을이라면, 서촌은 권문세가와 함께 중인들도 많이 살았다고 한다. 경치가 좋고 공기가 맑은 북쪽에는 권문세가들이 자리잡고, 경복궁이나 관청들이 들어서 있던 육조거리와 가까운 아래쪽에는 관청에서 근무하던 중인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옥인동 윤씨가옥’이 있었던 수성동 계곡은 도성내에서도 경치가 좋고 물이 맑았던 곳이다.

<18세기 후반에 그려진 도성대지도에 묘사된 한양 웃대>

지금의 자하문 안쪽에 위치한 청운동 54번지 일대 골짜기를 말하는 청풍계에서 사직단까지 인왕산 도로 아래쪽에 주로 살았었다고 한다. 지도에는 당시의 명승지와 주요 마을이름인 청풍계, 옥류동, 누각동, 필운대, 인달방, 도가동, 송목동, 체부청동,전립동 등이 묘사되어 있다.

<박노수가옥>

친일파 윤덕영이 그의 딸을 위하여 1930년대에 지은 박노수가옥. 구한말 한옥양식과 중국식, 서양식 양식이 섞여 있는 가옥으로 1970년대 이후 동양화가 박노수 선생이 이집을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벽수산장 부근>

윤덕영 일가가 모여 살았던 벽수산장이 있던 뒷편 언덕은 추사 김정희가 당시 문인들과 모여서 풍류를 즐기던 곳인 송석원을 음각으로 새긴 바위가 있었다. 웃대에서도 경치가 좋았던 곳으로 많은 웃대인사들이 이곳에서 풍류를 즐겼던 곳으로 송석원이라고 불린다.

이 집은 대략 1910년대에 지었다고 알려진 옥인동 47-133번지 가옥을 그대로 본떠서 새로 지었다. 당시 옥인동 47번지 일대 너른 땅은 순종의 왕후인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 윤덕영 소유였다. 그는 20여채에 달하는 집을 짓고 일가붙이와 모여 살았는데, 그 가운데 서양식으로 지은 사위집(옥인동 박노수 가옥)과 윤덕영의 측실이 거처했던 가옥만 남아 전한다. 1998년에 남산 골 한옥마을을 조성하면서 옥인동 47-133번지 가옥을 옮겨 지으려 시도했으나 부재가 너무 낡고 손싱이 심해 신축하였다. 세밀하게 고증하여 지었고, 원래 터가 진 땅의 높낮이 차이까지 일부나마 되살려 본래 분위기를 재현하였다. 매우 규모가 큰 ‘ㄷ’자형 안채에 사랑채 구실을 하는 마루방과 대문간이 더해져 전체 배치는 ‘ㅁ’자형을 이루지만 아무래도 안채를 위주로 짠 공간임을 짐작할 수 있다. 간소하게 민도리집을 채택하였으나 안채 앞쪽은 일반 민가에서는 보기 드물게 기둥머리에 익공을 치장하는 등 건축구조와 세부기법은 당시 최상류층 주택의 면모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출처:서울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