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미추홀구 관교동에 남아 있는 인천향교이다. 인천 문학경기장 맞은편에 있었던 인천도호부청사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창건된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조선중기인 15세기에 수리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들은 조선후기에 지은 것으로 1975년에 크게 수리하였다. 강학공간인 명륜당과 동.서재가 앞쪽에, 제향공간인 대성전과 동.서무가 뒷편에 위치한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향교는 대체로 문을 굳게 걸어잠그고 있어 외지인이 방문하기는 쉽지 않으나, 인천향교는 관광지겸 역사체험장으로서 복원된 도호부청사와 같이 곳에 위치하고 있어 방문객이 향교를 쉽게 둘러볼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건물이 깨끗하다고는 볼 수 없으나, 항상 사람이 오가는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는 향교이다.
<인천향교 홍살문>
<외삼문>
<안에서 본 모습>
향교는 서원과는 달리 경치좋은 곳에 자리잡는 것이 아니라 지방관청 주변에 두고, 고을 수령이 수시로 드나들 수 있도록 있는데, 인천향교는 비교적 경치좋은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강학공간 출입문>
인천향교는 경사진 언덕에 위치하고 있어, 유생들이 생활공간인 명륜당 마당과 동.서재가 명륜당 뒷편에 있다.
<명륜당>
<안쪽에서 본 모습>
<명륜당 내부>
인천향교는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로 강학공간인 명륜당이 앞쪽에 있다. 명륜당은 앞면 5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가운데 3칸은 넓은 대청마루, 양쪽에 1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다. 가운데 문을 열면 강당에서 언덕아래 경치를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유생들이 거처하는 기숙사인 동재>
<맞은편 서재>
<제향공간>
담장과 내삼문을 두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인천향교는 내삼문과 담장이 남아 있지 않다. 대성전은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이다.
<대성전 앞 동무>
제향공간에는 선현들의 위패를 모신 동.서무를 제대로 갖추고 있다.
<맞은편 서무>
<명륜당 마당 입구에 위치한 재실>
<향교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거처하는 살림집>
<옛 관아터>
인천향교 서쪽편 문학초등학교에 인천도호부 관아가 있었다. 지금도 동헌 건물이 남아 있다.
인천향교 (仁川鄕校), 인천 남구 관교동
향교는 성현의 위채를 모셔 제사를 지내고, 지방 백성들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 국가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인천향교가 창건된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태종 6년(1406)에 인천향교를 중수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적어도 그 이전에 이미 인천에 향교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병자호란 때 불에 타 소실되었던 것을 숙종 27년(1701)에 재건하였다. 일제강점기 부천향교로 명칭이 바뀌어 부평향교에 통합되었으나 광복 후 분리.복원되었으며,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현재에는 대성전.동무.서무.명륜당.동재.서재 등이 남아 있다. 향교의 뒤쪽에는 제사 공간인 대성전과 동무.서무가 있고, 내삼문을 경계로 앞쪽에는 교육 공간인 명륜당과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서재가 있어, ‘전학후묘’의 배치형식을 볼 수 있다. (안내문, 인천시청,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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