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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자운서원, 율곡 이이와 제자들을 모신 서원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임진강 나루가 가까이 있는 자운서원(紫雲書院)이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와 제자인 김장생(金長生), 박세채(朴世采)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서원으로 광해군대(1615)에 건립되으며, 효종으로부터 ‘자운(紫雲)’이라는 적힌 친필현판을 받은 사액서원이다. 구한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때 한사람은 한서원에 모셔진다는 원칙에 따라 훼철되었다. 황해도 배천군 문회서원(文會書院)이 율곡을 모신 유일한 서원으로 살아남았다. 원래의 건물들은 구한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과 한국전쟁 등으로 없어지고, 해방 후 1968년 유림들이 국가의 지원을 받아서 과거자료 고증을 통해서 복원하였다. 건물은 앞쪽에 강학공간인 강인당(講仁堂)과 기숙사인 동.서재가 있고, 뒷쪽에 사당인 문성사(文成祠)를 둔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파주 자운서원>

파주 자운서원은 수도인 한양과 가까이 있었던 까닭에 서원의 규모도 크지 않으며, 누각을 비롯하여 정원을 꾸며놓지도 않고 있다. 현재의 건물들은 1968년에 고증에 따라서 복원되었다. 강학공간인 강당과 동.서재를 앞에, 사당인 문성사를 뒤에 둔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외삼문>

자운서원은 건물 자체로는 문화재로서 가치는 없지만, 이 곳이 율곡 이이 선생을 비롯하여 그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묘역이 가까이 있기때문에 선생이 태어난 강릉의 오죽헌과 함께 율곡 선생의 유적지로서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곳이다. 율곡선생 가족묘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서원으로 방문객들이 숙박할 수 있는 동.서재나 서원관리인의 살림집인 고직사 건물을 크게 지어 놓지는 않고 있으며, 사당을 중심으로 유생들이 공부할 수 있는 공간만을 두고 있는 수도권 서원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강학공간 중심건물인 강인당(講仁堂)>

유생들의 강학 장소로 지금의 학교 교실 역할을 했던 곳으로 1997년에 신축하였다.

<강학공간 마당>

<유생들이 머무는 기숙사인 동재>

앞면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가운데 1칸은 대청마루, 양쪽에 온돌방 1칸씩을 두고 있다.

<맞은 편 서재>

<서원의 내력을 말해주는 강당 동쪽편 고목>

<자운서원 묘정비>

문성사 외삼문 왼쪽편에 있는 묘정비이다. 자운서원은 효종때 자운이라른 편액이 내려졌고, 그때 묘정비가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비문은 당대 유학자이자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이 지었다고 전해지며, 글씨는 예서체로 김수증이 썼다. 글씨를 깨끗하게 잘 썼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자운서원묘정비(紫雲書院廟庭碑)
자운서원의 역사를 적은 비이다. 자운서원은 조선시대의 대학자인 율곡 이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자 광해군 7년(1615)에 지은 서원으로, 이이의 묘와 그 조상들의 묘가 있는 파주지역에 건립되었다.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박세채의 제사도 함께 지냈던 곳으로, 효종 즉위년(1649)에 왕이 자운이란 현판을 내리었다. 비는 서원의 자운문 바깥의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2단으로 이루어진 받침돌은 아랫단은 4장의 돌로 짜 맞추고, 윗단은 옆면과 윗면에 각각 구름과 연꽃무늬를 두었다.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김수증이 예서체로 썼으며, 비의 명칭은 김수항이 썼다. <출처:문화재청>

<제향공간>

문성사는 율곡 이이와 제자들인 김장생, 박세채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헐어진 것을 60년대에 중건한 것이다. 전학휴묘의 공간배치에 따라서 자운서원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사당 내삼문>

<문성사>

문성사는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일반적인 서원과는 달리 아산 현충사처럼 누구나 참배를 할 수 있으며, 영정도 함께 모셔져 있다.

<옆에서 본 모습>

<문성사 현판>

원래는 효종으로부터  ‘자운(紫雲)’ 친필 현필이 걸려 있었다.

<사당 내부>

가운데 율곡 이이, 오른쪽에 사계 김장생, 왼쪽에 현석 박세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가운데에 율곡의 영정이 같이 모셔져 있다. 율곡은 지폐에 그려져 생활속에서 항상 접할 수 있는 인물이다. 거의 모든 과거 시험을 수석합격했던 최고의 천재이자 외모도 준수한 호남형이다.

<사당에 걸려 있는 현판>

<사당 앞에 자라고 있는 향나무>

자운서원(紫雲書院),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율곡 이이(1536∼1584)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율곡은 조선 중기 대학자이며 정치가로 성리학의 큰 줄기를 이루던 분으로 『격몽요결』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광해군 7년(1615)에 세운 이 서원은 효종 1년(1650)에 국가로부터 인정받은 사액서원으로 ‘자운’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숙종 39년(1713)에 율곡의 뒤를 이은 학자인 김장생(1548∼1631)과 박세채(1632∼1695)를 추가로 모셨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폐쇄되었다. 그 뒤 서원 터에서 제단을 세워 제사를 지내왔으나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되었고 지금 있는 건물은 새로 지은 것이다. 대문 격인 자운문을 들어서면 위패를 모신 사당이 모습을 드러낸다. 사당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아담한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앞면에는 각 칸마다 2짝 여닫이 문을 달았는데 문 앞은 개방된 구조로 널찍하여 제사지내기에 적합하다. 사당 안쪽에는 이이의 영정을 중심으로 좌우에 김장생과 박세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8월에 제사 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파주 이이 유적(사적)>

자운서원은 율곡 이이와 어머니 신사임당 등 가족들의 묘역이 있는 곳에 세워졌다. 율곡 이이 유적지는 공원처럼 넓게 조성되어 있다.

<무덤>

자운서원의 원래 건물들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과 한국전쟁으로 없어졌지만, 전국에 있는 율곡선생을 모신 여러 서원 중에서 자운서원이 큰 의미를 갖는 이유는 이 곳이 율곡 이이 선생과 그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묘소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율곡 이이선생과 신사임당이 태어난 강릉 오죽헌과 함께 율곡 선생을 대표하는 유적지로 자운서원이 자리매김 하고 있다. 역사 이래 우리나라에는 큰 업적을 남긴 수많은 위인들이 있지만, 어머니와 아들이 지폐에 등장하고 있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이 큰 영향을 지금도 미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율곡 선생의 가족묘는 입신양명을 했다고 해서 율곡선생과 노씨부인은 묘가 제일 윗쪽에 있고, 그 아래로 큰 형, 아버지인 이원수와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합장묘, 그리고 아들 이경림 묘가 나라히 있는 형태로 되어 있고 그 주위 율곡 선생의 누님 이매창의 시부모를 포함한 가족묘가 같이 있는 것이 이색적인 모습이다.

<서쪽편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율곡선생 신도비>

<화석정>

자운서원에서 멀지 않은 임진강변 언덕에 위치한 화석정(花石亭). 율곡이 여러사람들과 학문과 정치를 논하던 유서깊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