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에 소재한 덕봉서원(德峰書院)이다. 이 곳은 숙종대에 정치적 사건인 기사환국으로 죽은 양곡 오두인(陽谷 吳斗寅, 1624~1689년)을 모시는 서원이다. 숙종대인 1695년 창건되었으며, 창건된 해에 숙종으로부터 이름을 하사받은 사액서원이다. 강당과 사당이 일렬로 배치된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으며, 경기지역의 서원들과 마찬가지로 규모는 단촐하지만 짜임새가 있는 서원이다. 강당인 정의당(正義堂)은 정조18년(1794)에 중수된 것이라고 하며, 나머지는 최근에 지어졌다. 교육기관 역할보다는 제사를 올리는 사당의 성격이 강한 조선후기에 창건된 서원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덕봉서원은 바리봉 숲을 등지고 옛 양성현 지역의 넓은 평야가 있는 남동쪽을 향하고 있다. 서원내에는 수령 200년 이상된 오래된 향나무가 남아 있고, 인근에는 오두인의 후손들인 해주오씨 세거지 덕봉리 마을이 있다. 구한말 서원철폐령에도 훼손되지 않은 47개의 서원 중 하나로 경기도를 대표하는 서원 중 한곳이다.
<덕봉서원>
옛 양성현 일대 넓은 벌판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뒷편에는 그리 높지는 않지만 아늑한 느낌을 주는 낮은 야산이 바리봉이 있다.
<홍살문>
<외삼문>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전통적인 사당출입문이다. 휴식공간으로 사용되는 문루나 누각은 설치하지 않았다. 후학을 양성하는 교육기능보다 제사를 올리는 기능을 중시하는 서원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출입문이다.
<강당인 정의당(正義堂)>
정조대에 중건된 것으로 앞면 5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날씨가 추운 중부지방 서원들의 강당과 마찬가지로 외벽을 만들어 바람을 막아주고 있다. 제사를 준비하거나 문중이나 유림들이 회의를 하는 곳으로 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기숙사인 동재>
다른 서원과는 달리 강당 뒷편 마당에 위치하고 있다. 서원이나 향교 동.서재에는 보기 힘든 부엌이 있다. 서원관리인이 머무는 살림집 역할도 겸했던 것으로 보인다.
<맞은편 서재>
동.서재는 1980년대에 중수한 것이라 한다.
<내삼문과 담장>
오두인은 조선 인조에서 숙종대의 문신으로 인조 26년에 진사시에 1등으로 다음해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인물로 사간, 부교리 등을 역임했으며 숙종5년에는 공조참판으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경기도 관찰사를 거쳐 공조판서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숙종대 송시열과 함께 서인을 대표하는 인물이며, 1689년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하고 인현왕후가 폐위되자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의주로 유배형을 받고 떠나는 중 파주에서 죽었다. 오두인은 진사와 문과시험에서 수석을 두번씩이나 한 인물로 공조참판과 판서를 지낸 것으로 볼 때 실무적인 역량이 뛰어났던 인물로 보인다.
<사당>
사당인 덕봉사우는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1970년대에 중건된 것이다.
<정려각>
<정려>
오두인의 아들 오관주에게 내려진 것으로 보인다.
<수령 250년 정도된 향나무>
<옛 양성현 일대의 넓은 평야>
덕봉서원 앞쪽으로 보이는 옛 양성현 일대의 넓은 평야이다. 안성천 지류인 한천이 지나가고 있다.
<덕봉리 마을>
서원에서 멀지 않은 덕봉리 마을은 오두인 일가들이 모여사는 전통마을로 그 중심에는 오두인 살았던 오정방고택이 있다.
덕봉서원(德峰書院),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
조선 숙종 때의 문신으로 기사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도중 세상을 떠난 양곡 오두인을 기리기 위하여 숙종21년(1695)에 건립되고, 그 해 사액된 서원이다.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았던 전국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오두인은 인조 26년(1648)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공조참판, 경기도 관찰사 등 여러 관직을 거쳤다. 숙종 때 인현왕후 폐위에 반대하다가 의주로 유배되던 도중 파주에서 세상을 떠났다. 숙종 20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공이다. 덕봉서원은 남 동향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경사진 대지의 아래쪽 터에는 강당인 정의당과 동재.서재가 자리 잡고 있으며 위쪽 터에는 사당인 덕봉사우가 위치하여 전형적인 전학후묘(강학공간이 강당의 앞에 있고 제향공간인 사당이 뒤쪽에 있는 배치형식)을 갖추었다. 사당과 강당은 부재의 사용으로 미루어 19세기의 건물로 추정된다. 동재.서재는 1940년대에 훼손 되었다가 새로 복원된 것이다. <출처:안성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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