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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정전(국보),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곳

종묘의 정전(正殿)은 역대 국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종묘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공간이다. 정전(正殿)에는 태조와 현 국왕의 4대조, 사대부 가문의 불천위 조상에 해당하는 공덕이 큰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공간이다. 현재는 19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으며 신실 한 칸에는 한분의 왕과 그 왕비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원래는 정전(正殿)을 종묘라고 불렀으나 지금은 영녕전을 포함하여 종묘영역 전체를 종묘라 부른다. 정전에는 국가에 큰 업적을 남긴 왕의 신위를 모시기로 되어 있었으나 조선중기 이후에는 업적이 많지 않은 왕과 왕비의 신전을 영녕전으로 옮기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종묘 정전(국보)>

조선왕조가 존속했던 500여년간 지속적으로 모실 신주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수차례에 걸쳐서 증축하게 되어 세계적으로 드문 긴 목조건물이 되었다. 정전은 신주가 모셔진 19칸의 신실과 그 양쪽에 익실 3칸씩으로 되어 있으며 그 양쪽에 누각형태를 하고 있는 동월랑과 창고 형태의 서월랑이 연결되어 있다. 정전 영역에는 종묘제례가 거행되는 넓은 월대가 설치되어 있다 월대 앞에는 그 앞쪽에는 역대국왕의 공신들을 모신 공신당(功臣堂)과 생활과 밀접한 일곱소신을 모신 칠사당(七祀堂)이 있으며, 서문 밖에 제례악을 준비하는 악공청(樂工廳)을 두었다.

<정전 영역 남쪽편 출입문>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출입문으로 삼문의 형식을 하고 있지만, 혼령들이 출입하는 신문(神門)으로 사용하고 있다. 국왕을 비롯한 제례에 참여하는 인원들은 동문을 통해 출입하고, 악공들은 서문을 이용한다. 정전영역은 궁궐 전각에 해당하지만 추녀마루에 잡상을 설치해 놓지 않았다.

<가운데 신문>

신문은 혼령들이 쉽게 출입할 수 있도록 틈을 많이 만들어 놓고 있다.

<기둥아래 북모양의 태극문양 장식>

<종묘 정전 영역>

건물은 신주가 모셔신 19칸의 신실이 있는 정전을 중심으로 양쪽에 3칸씩 협실, 그 양쪽에 동월랑과 제기고가 연결되어 있다. 건물은 상월대 위에 세워졌으며, 그 아래에는 종묘제례의식이 거행되는 넓은 월대가 설치되었다.

<2008년 종묘 정전 영역>

<정전 동문>

종묘제례에 참석하는 국왕을 비롯하여 제관들은 준비공간인 전사청이 있는 동문으로 출입한다. 동문도 정문과 마찬가지로 앞면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추녀마루에 잡상은 없다. 국왕과 제관들이 목욕재개하고 대기하던 재궁과는 어도가 연결되어 있다.

<동문 안쪽 공간>

<안쪽에서 본 정전 동문>

<종묘 정전(국보)>

태조와 역대 국왕을 모신 종묘 정전. 정전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를 비롯하여 19명의 왕과 그 왕비를 모시고 있다. 종묘를 처음 세웠을때는 7실은 단일 건물이었으나, 공덕이 큰 불천위에 해당하는 국왕이 늘어남에 따라 여러차례 층축되었으며, 1836년(현종2)에 19칸으로 증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종묘 신실>

<앞에서 본 모습>

종묘 정전은 19명의 왕과 왕비를 모신 19개의 신실이 있다.

<정전 신실앞 제사를 준비하는 퇴간>

<처마와 공포>

정전은 국가를 상징하는 중요한 건물이지만 궁궐 정전과는 달리 겹처마와 단청을 사용하지 않고 지붕을 받치는 공포도 장식성이 거의 없는 익공계 공포를 사용하고 있다. 종묘 정전의 단순하면서도 절제된 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정전 추녀마루 잡상>

종묘 정전(宗廟 正殿, 국보)
종묘의 중심부분으로 길게 지은 정전의 앞에는 넓은 월대를 두었고 사방으로 담장을 둘렀다. 남쪽의 신문으로 혼령이, 동문으로 임금을 비롯한 제관들이, 서문으로 제례악을 연주하는 악공과 춤을 추즌 일무원들이 출입했다. 1395년에 신실7칸의 규모로 창건했고 여러 차례 증축을 거쳐 현재는 19칸에 이르러 매우 긴 목조 건물이 되었다. 몸체인 신실의 양쪽에는 창고와 부속실을 마련했다. 거친 월대 바닥과 그 위로 육중한 지붕이 떠 있는 모습은 숭고하고 고전적인 건축미의 극치를 이룬다. 남쪽 담장 안에는 공신당(功臣堂)과 칠사당(七祀堂)을 각각 동쪽과 서쪽에 세었으며, 서문 밖에 제례악을 준비하는 악공청을 두었다. <출처:문화재청>

<종묘제례를 지낼때 신실 내부의 모습>

내부는 개방된 넓은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향대청에 재현해 놓은 신실 내부>

종묘 신실은 신주를 모신 신주장을 중심으로 서쪽에 책장, 종쪽에 보장이 있다. 신주장 앞의 신탑에는 궤가 놓여 있고 그 앞에 제상과 좌우에 봉선과 황개가 놓여 있다.

<보장(寶欌)에 보관하는 금보, 옥보, 보함>

보장(寶欌)은 왕과 왕비의 시호를 새긴 금보, 은보, 옥보를 보관하는 장이다. 보장에 모셔지는 보와 보통, 보함.  태조 금조(太祖 金寶), 태조의 시호 “강헌 지인계운 응천조통 광훈영명 성문신무 정의광덕 대왕지보”를 새긴 금으로 만든 도장이다. 신의고황후 옥보, 대한제국 선포이후 1899년에 태와 지를 고황제와 고황후로 추존하면서 옥으로 만든 황후의 도장이다. 보통(寶筒), 어보를 담는 내함으로 구리, 주석, 납을 합금하여 만들었고 내부에는 붉은 비단 천을 발랐다. 보함(寶函), 보통을 담은 외함으로 뚜껑에는 거북이 모양의 손잡이가 있으며 장식이 매우 아름답다.

<책장(冊欌)>

책장(冊欌)은 왕과 왕비의 공덕을 기록하여 만든 금책, 옥책, 죽책 등을 보관하는 장이다. 태조 옥책, 이 옥책은 숙종 9년(1638) 정의광덕이라는 시호를 올릴때, 태조 생전의 공덕을 기리는 내용들을 옥돌에 새겨 만든 책이다. 옥책함(玉冊函), 옥책을 보관하는 함으로 표면에 붉은 칠을 한 다음 금으로 봉황, 매화, 난초, 대나무 등의 문양을 그렸고 뚜껑에는 자물쇠를 달았다. 정조 축책(正祖 竹冊), 영조대왕이 정조를 세손으로 임명할 때 내린 문서의 내용을, 대나무 조각에 금으로 글을 새겨 만든 책이다.

<제사 때 신주를 기대는 대>

궤几는 ‘의궤儀几’ 또는 구불거리는 형태때문에 ‘곡궤曲几’라고 부르기도 한다. 신주의 수에 맞게 제작되어 평소에 신탑 위에 놓였다가 대제 때 궤 앞에 신주를 모셨다. 이 궤에는 ‘일십삼’이라는 묵서명이 있어 정전1실에 부묘된 신덕왕후의 궤로 추정된다. <출처:고궁박물관>

<신주나무, 신주목神主木>

밤나무를 깎아 왕과 왕비의 신주로 쓰기 위해 만든 것이다. 정육각형의 몸체에 윗부분은 둥글게 하였다. 상.하와 사방에 구멍(규竅)을 내었다. 신주목의 중앙부분에 왕은 모호廟號.시호諡號.존호尊號를, 왕비는 시호.존호.휘호徽號를 순서대로 적어 신주로 봉안하였다. 신주를 봉안하는 함, 복제, 뚜껑과 받침대로 구성되며 받침대 안에 좌자座子를 깔고 신주를 봉안하였다. 1421년(세종3)에 궤의 앞뒤가 바뀔 수 있다고 하여 뚜껑과 받침대 앞면에 붉은 글씨로 ‘전前’자를 써서 구별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앞면이 막힌 신주궤를 사용하다가 1637년(인조15) 이후 내궤의 앞면을 비워 신주의 출납을 편리하게 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신탑에 까는 자리, 욕석褥席>

 신탑 위에 깔았던 화문석이다. 신주를 놓는 곳에는 황화문석, 자방주요, 황화문석의 세겹으로 된 욕석을 깔아 신주를 모셨다.

<종묘제례시 제사를 준비하고 있는 모습>

종묘대제는 조선왕조의 사당인 종묘에서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의례로, 봄.여름.가을.겨울.납일 등 1년에 5번 지냈으나 현재는 매년 5월 첫번째 일요일에 국제문화행사로 봉행되고 있다. 제향의식 뿐 아니라 제례악과 일무 등 유형과 무형의 세계유산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종묘대제는 세계적으로 보기드문 종합적인 의례이다. <출처:문화재청>

종묘 제향의 의식 절차
종묘 제향의 절차는 조선 초기에 큰 틀이 확립되었으며 시대에 따라 약간의 수정.변화가 이루어졌다. 국왕이 직접 의식을 수행하는 친제親祭의 절차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신관례(晨祼禮), 향과 술로 혼백을 모셔오고 예물과 폐백을 바침
축시 정가(새벽1시)에 초헌관(招獻官)인 왕과 제관이 입장하여 각자의 위치에 서면 제례가 시작된다. 왕은 향을 피우고 땅에 향기로운 술을 부어 하늘과 땅으로 돌아간 신의 혼백을 신주로 모시는 의식을 행하였다. 신을 모신후에는 흰 모시를 폐백(幣帛)으로 바치고 희생의 간을 불에 태워 제사 준비가 충실하게 되었음을 신에게 알렸다. <출처:고궁박물관>

<신관례>

신관례는 신을 맞이하는 의식절차로 향과 술로 혼백을 모셔오고 예물과 폐백을 바친다.

궤식(饋食), 익힌 고기를 신에게 바치고 곡식을 태워 즐기시게 함. 신에게 익힌 음식과 술을 올려 즐겁게 해 드리는 절차로 제의의 핵심이 되는 의식이다. 궤식에서는 전사청에서 삶은 소.양.돼지의 고기를 생갑(牲匣)에 담아 남신문(南神門)과 신의 길을 통해 각 신실로 운반하였다. 제관들은 생갑을 조(俎)에 받쳐 제상의 서쪽에 올렸다. <출처:고궁박물관>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천조례(薦俎禮)>

삼헌례三獻禮, 신에게 술을 세차례 올려 즐기시게 함. 술을 올라는 헌작(獻爵)은 국왕이 단술(예제醴齊)을 올리는 초헌례(初獻禮), 왕세자가 탁주(앙제盎齊)를 올리는 아헌례(亞獻禮), 영의정이 청주(淸酒)를 올리는 종헌례(終獻禮)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초헌례 후에는 축문을 읽어 제사의 연유를 고했다. 종헌례때는 종묘에 부속된 배향공신(配享功臣)과 칠사(七祀)의 신위에도 한 잔의 청주를 올려 즐기게 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첫술잔을 올리는 초헌례(初獻禮) 국왕이 단술(예제醴齊)을 올린다.>

<왕세자가 탁주(앙제盎齊)를 올리는 아헌례(亞獻禮)>

<영의정이 청주(淸酒)를 올리는 종헌례(終獻禮)>

<신이 드신 술과 고기를 내려 받아 복을 받는 음복례(飮福禮)>

<송신사배(送神四拜), 신을 보내는 예를 올림>

국왕과 제관들은 하늘과 땅으로 돌아가는 신을 위하여 네 번 절하는 예(송신사배)를 올렸다.

<망료례(望燎禮), 축문과 폐백을 묻고 태워 제의를 마무리 함.>

신을 보낸 후에는 제례에 사용되었던 축문과 폐백을 묻고 태우는 망료례를 행하여 제례를 청결하게 마무리하였다.

<축문을 태우는 망료>

<정전 왼쪽편에 위치한 축문을 태우는 망료를 하는 장소>

<정전 동쪽편 동협실과 동월랑>

동협실은 제기를 보관한 제기고이며, 5칸규모의 서월랑은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이다.

제기의 보관처, 제기고(祭器庫),
종묘 제향에 사용되는 제기는 역대 국왕과 왕비의 신명에게 바치던 기물이었기에 조선초부터 정성껏 관리되었다. 1416년(태종16) 제기를 보관하기 위한 별도 공간인 제기고를 마련하였으며, 영조 대에는 당시 제기고로 쓰인 정전 동협실 내에 대규모 제기장을 설치하였다. 이 제기장은 1836년(헌종2) 정전이 동쪽으로 4칸 더 증축될 때 철거되지 않고 일부 수리된 채 현재의 동협실로 이전되어 전해지고 있다. 정전 동협실의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붙박이장 형태의 대규모 제기장(대장大欌)은 종묘 오향대제 때 사용된 제기를 보관한 대제제기장(大祭祭器欌)이다. 2층으로 이루어졌으며 내부에는 선반을 별도로 달아 많은 양의 제기를 보관하기 용이하도록 하였다. 제기장2층의 서쪽에는 일종의 별실이 있는데, 기록에 따르면 보.궤의 뚜껑을 두었던 장소이다. 영녕전의 제기고는 별도의 건물로 영녕전의 동북쪽에 자리하였다. 고종 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내부에는 정전 제기고와 유사한 형태의 2층으로 된 벽부형 제기장이 설치되어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종묘 정전 제기고의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장>

<동월랑>

지붕이 있는 복도형식의 건물로 제사를 준비하는 장소이다. 월대를 오르는 3개의 계단이 있다. 종묘제례에 참여하는 국왕을 비롯한 제관들이 사용하는 길이다.

<정정 서쪽편 서협실과 서월랑>

서협실은 신주를 모시고 이동할 때 쓰는 신여(神轝), 욕석(褥席), 병풍(屛風) 등을 두는 장소인 의물고(儀物庫)로 쓰였다.

<서월랑>

서월랑은 5칸 규모로 벽과 창이 있는 창고처럼 지어졌다.

<동문에서 하월대를 오르는 계단>

<상월대>

정전 건물은 화강석으로 기단을 쌓은 월대 위에 올려져 있다. 월대에는 3곳의 계단이 있으며, 동쪽편 계단이 어도로 연결되어 있다. 아마도 국왕이 사용한 계단으로 보인다.

<신들이 드나드는 남문과 신도로 연결된 가운데 계단>

신들이 지나가는 계단인 듯 하다.

<동월랑 월대에서 본 정전 앞 상월대와 퇴간>

<하월대>

<하월대를 오르는 계단>

<월대의 빗물이 흘러내리는 석누조>

<신도>

정전 남쪽 신문을 들어서면 종묘제례 의식이 거행되는 넓은 월대가 조성되어 있고 중간에 혼령들이 이동하는 신도가 설치되어 있다. 월대는 궁궐 조정과 마찬가지로 거친 박석이 깔려 있으며, 혼령이 지나가는 신도와 어도, 국왕을 비롯한 제관들이 위치를 알려주는 판위에는 전돌을 깔았다.

<어도>

동문을 들어서면 국왕의 이동하는 길에 전들을 깔린 어도가 설치되어 있다.

<동쪽편 계단 앞 판위>

<정전 가운데 계단 앞 제관이 서 위는 위치를 알려주는 넓은 판위>

<종묘제례>

종묘제례악은 종묘제례 의식에 맞추어 연주하는 것으로, 기악.노래.춤이 어우러지는 종합예술이다. 악기 연주에 맞추어 선왕의 공덕을 기리는 노래를 부르며, 열을 맞추어 추는 일무를 춘다. 종묘제례악은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고, 2001년에 종묘제례와 더물어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출처:문화재청>

<종묘제례악 연주>

<팔일무>

<악공들이 대기하던 정전 서쪽편에 위치한 악공청>

<종묘제례시 악공들이 출입하는 정전 서쪽 출입문>

<우주를 묻은 위치를 표시한 책>

왕과 왕비의 신주가 부묘되기 전 혼전(魂殿)에서는 3년 동신 신주로 뽕나무로 만든 우주(虞主)를 사용했다. 신주를 부묘하면 쓰임새를 다한 우주는 정전 뒤뜰 담장 아래에 묻었는데 이 위치를 그림에 표시한 것이다. 정조를 비롯한 여러 왕과 왕비의 우주를 묻은 위치가 기록되어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우주를 묻은 장소>

역대 공신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 공신당(功臣堂)
역대 군왕들의 재위 중 공이 크다고 평가 받은 신하들의 위패를 모시고 배향하는 사당으로 배향당(配享堂)이라고도 한다. 태조부터 순종까지 정전에 모신 역대왕의 공신 83위의 위패를 안치하였다. 종묘가 창건된 1395년(태조4)에 처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5칸으로 정전 가까이에 있었으나, 1410년(태종10)에 동서월랑을 지으면서 월대 아래로 옮겨졌다. 성종대에는 3칸짜리 건물이어으나 1778년(정조2)에는 4칸으로, 헌종 대에는 6칸으로 증축되었다. 현재는 정면 16칸, 측면1칸의 건물로 정전의 남측 동편에 위치해 있다. 전면 중앙부 3칸에는 나무판자로 된 판문(板門)이 설치되었으며, 나머지 칸에는 광창을 설치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조선왕조 5백년동안 역대 국왕을 모셨던 공신들의 위패를 모신 공신당>

83명의 공신들을 모시고 있다. 종묘가 창건된 해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원래는 5칸의 작은 건물이었으나 정전과 함께 증축되어 현재는 16칸의 큰 건물이 되었다. 종묘에서 정전과 함께 중요시 되었던 곳으로 정치적 부침에 따라 모시는 공신이 바뀌기도 했으며, 공신당에 모셔진 공신들이 후손들이 전국의 권문세가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공신당에 모셔진 공신들>

<공신당 출입문>

<공신당 내부>

공신당은 전국의 권문세가와 관련되었기 때문에 국가적에서도 상당히 신경썼던 것으로 보인다.


<종묘 공신당에 배향된 황희의 위패, 복제>

세종의 배향공신인 황희의 위패이다. 공신의 위패는 밤나무로 제작하고 중앙에 ‘관직명.시호.이름’순으로 썼다. 왕이 불천지주가 되면 공신당에 게속 머무를 수 있었지만 왕의 신위가 종묘 정전에서 영녕전으로 옮겨지면 제향공신 위패도 내어서 자손에게 돌려보냈다. <출처:고궁박물관>

<정전 담장 바깥에서 보이는 공신당>

일곱 소신(小神)의 위패를 모신 사당, 칠사당(七祀堂)
인간생활의 여러 가지 일들을 사찰하고 처벌하는 일곱 소신의 위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서쪽으로부터 도로통행을 주관하는 국행지신(國行之神), 후손없이 죽은 옛날 제후로 사형을 주관하는 공려지신(公厲之神), 도성의 대문을 주관하는 국문지신(國門之神), 거처를 주관하는 중류지신(中霤之神), 음식에 관한 일을 주관하는 사조지신(司竈之神), 출입을 주관하는 사호지신(司戶之神,) 삼명(三命, 나이, 선을 행하고도 흉한 일을 당하는 것, 선한 일과 악한 일에 따라 보응하는 것)을 살피는 사명지신(司命之神)을 모셨다. 늦어도 1414년(태종14)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건물 규모는 3칸으로 1713년(숙종39)에 일부 수리가 되었다는 기록이 전할 뿐 공간에는 큰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정면3칸, 측면1칸의 맞배지붕으로, 중앙에 판문이 설치되고 좌우칸에 살창을 설치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칠사당>

일곱의 작은 신들에게 왕실과 궁궐의 모든 일과 만백성이 아무 탈 없이 잘 풀리도록 기원하는 사당이다. 칠사는 ‘봄의 사명(司命)과 사호(司戶), 여름의 사조(司竈)와 중류(中霤), 가을의 국문(國門)과 공려(公厲), 겨울의 국행(國行)’을 이르는 말이다. 칠사에게 지내는 제사는 토속 신앙과 유교 사상이 결합된 국가 의례였다. <출처:문화재청>

<칠사당 내부>


<칠사당에 모셔진 위패. 복제>

일곱 소신 중 후손 없이 죽은 옛날 제후로 사형을 주관하는 공려지신의 위패이다.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곳, 정전(正殿)
종묘의 중심 건물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太祖)를 비롯하여 역대 왕 중에서 특히 공덕이 크다고 평가된 19명의 왕과 그 왕비의 신위 총 49위를 모셨다. 건립 초기 7실의 단일 건물이었으나 생전의 공이 커서 정전에 계속 모셔지는 불천위(不遷位), 왕위에 오르지 못했지만 사후에 추존되어 모셔지는 경우 등이 늘어남에 따라 몇 차례에 걸쳐 증축되었다. 정전은 창건 시 7칸으로 세워졌으나, 1546년(명종1)에 신실4칸을 더하여 총11칸으로 늘어났다. 이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8년(광해군 원년)에 11칸으로 복원되었고, 1726년(영조2)에 15칸으로, 1836년(현종2)에 19칸으로 증축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정전의 좌우에는 협실이 각3칸, 동서월랑 각5칸이 설치되어 ‘ㄷ’자형 건물을 이룬다. 동협실은 제기를 보관한 제기고이며, 서협실은 신주를 모시고 이동할 때 쓰는 신여(神轝), 욕석(褥席), 병풍(屛風) 등을 두는 장소인 의물고(儀物庫)로 쓰였다. 정전의 남쪽 동편에는 공신당(功臣堂), 남쪽 서편에는 칠사당(七祀堂), 동편 담에는 수복방(守僕房), 동편 담 밖에는 전사청(典祀廳)이 자리잡고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국조오례의의 설명과 도설,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1474년(성종5)>

『국조오례의』의 내용을 보완하기 위해 실제로 의례를 행하는데 필요한 참고사항을 오례의 서례序例에 맞추어 설명하고 도설을 붙인 책이다. 길례吉禮 항목에 실린 <종묘전도宗廟全圖>는 종묘의 창건 당시 모습에 가장 가까운 그림으로 월랑月廊만 제외하면 창건때의 건축과 같다. <출처:고궁박물관>

<『종묘의궤』중 ‘종묘전도’>

<종묘의궤의 속편, 종묘의궤속록宗廟儀軌續錄>

1706년 편찬된 『종묘의궤』의 속편으로 1706~1741년 사이의 건축, 제향 대상, 의식 등 종묘의 변화상을 전반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이다. <종묘전도宗廟全圖>에는 1726년(영조2)의 정전 증축, 1732년(영조8) 재사齋舍 중건 등의 변화가 반영되어 있다. 정전의 좌우 협실에는 제기고祭器庫, 서고西庫가 있으며 신주神廚는 전사청으로 표기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예조의 업무를 기록한 책, 춘관통고春官通考, 1788년(정조12)>

예조禮曹 소관의 업무 전반을 서술한 책으로 조선 초기부터 정조 초기에 이르는 전례의 변화가 반영되어 있다. 1474년의 종묘의 모습은 <원의종묘原儀宗廟>에, 1667~1726년 증축 이후의 모습은 <속의종묘續儀宗廟>.<속의영녕전續儀永寧殿>에, 1788년의 종묘는 <금의종묘영녕전전도今儀宗廟永寧殿全圖>에 묘사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종묘의 제향공간(祭享空間)과 건축
종묘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제향의식을 행하는 공간인 정전과 영녕전이다. 정전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재위중인 왕의 4대조상, 공덕이 큰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영녕전은 정전에 모시고 있던 신주를 옮겨 모시기 위해 지은 별묘이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정전을 종묘라 하였으나, 현재는 정전과 영녕전 및 부속 건물을 모두 합쳐 종묘라고 부른다. 조선왕조가 500여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지속하면서 정전과 영녕전 내부에 모실 신주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두 건물 모두 몇차례에 걸쳐 증축되었다. 그 결과 정전은 19칸의 신실에 좌우 익실 각3칸을 갖춘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긴 목조건물이 되었으며, 영녕전 또한 16칸의 긴 건물이 되었다. 종묘는 매년 제사의식을 반복적으로 거행하는 공간으로 계획되었다. 정전과 영녕전에는 대규모의 월대가 설치되었으며, 왕과 왕세자가 위치하는 자리를 알려주는 판위(板位) 등을 전돌로 높게 마감하고 동선을 표시하는 등 일반 건축과 차이를 보인다. <출처:고궁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