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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특별전] 금관총(金冠塚)과 이사지왕(尒斯智王)

금관총은 1921년 경주 도심에서 주택공사를 하던 중 금관이 우연히 발견되어 신라고분의 존재에 대해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고분이다. 당시 일본인 학자들은 돌무지덧널무덤 구조를 이해하지 못해 유물들을 발견하지 못했으나 우연히 금관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들을 발견하면서 신라고분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최초의 발굴작업이라서 체계적으로 발굴이 진행되지는 않아서 실제로 없어진 유물들도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금관총은 대릉원일대의 고분들과 마찬가지로 돌무지덧널무덤 양식을 하고 있으며 출토유물들은 금관을 비롯하여 귀걸이.팔찌 등 장신구와 토기류 등 다양형 종류의 껴묻거리가 함께 출토되었다. 금관총이 발굴된 이후 금령총, 식리총, 서봉총 등 여러 고분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많은 유물들이 계속 출토되었다. 또한 비교적 최근이라 할 수 있는 1970년대에 황남대총과 천마총에서도 금관을 비롯한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 “금관총(金冠塚)과 이사지왕(尒斯智王)”>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2014년 여름 ‘금관총과 이사지왕尒斯智王’이라는 제목으로 특별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이번 전시는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고리자루칼을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이사지왕尒斯智王’이라 적힌 글자가 확인하면서 고분의 주인과 금관총 발견의 의미를 다시 한버 생각해 보고자 전시회를 개최한 것으로 보인다. 전시는 금관총에서 발견된 유물과 함께 당사 일본인들이 작성한 발굴보고서 등도 함께 전시되어 있어, 일제강점기 유물 조사와 발굴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금관총 사진>

유적지가 정비되지 않은 꽤 오래전 사진이다. 지금은 주변 주택들이 정비되어 있다.

삼국시대 신라 궁성이었던 월성 서북방향으로는 신라 황금문화 절정기인 마립간 시기에 조성 된 것으로 보이는 고분군을 들어서 있다. 마립간시기는 내물왕에서 왕이란 호칭을 처음사용한 지증왕 이전까지인 4~5세기를 말하며, 돌무지덧널무덤과 화려한 황금문화 등 신라문화를 대표하는 특징들이 나타났던 시기이다. 예전에는 노서리, 노동리, 황오동, 미추왕릉지구 등으로 구분하여 사적지로 관리했는데 이들 고분들은 지역적으로 떨어져 있지 않고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출토유물이나 무덤의 조성방식에서도 동일한 특징을 보이기때문에 지금 대릉원으로 일괄하여 부르고 있다.

<2011년 금관총>

금관총은 발굴.조사 후 봉분을 만들지 않아서 지금도 훼손된 채 남아 있다.

금관총 금관….
이 우아한 물건의 대부분은 ‘현대적인’ 느낌을 준다….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 것은…. 대개 간결한 예술적 형성에 내재한 장식을 신중하게 사용하는 매력적인 형식이다.
– 안드레아스 에카르트의 「조선미술사」(1929) 중에서

<금관총 금관(金冠), 금, 국보>

금관
금관총 금관은 신라 금관 중 가장 먼저 발견된 것이다. 금관에는 띠모양의 관테에 나뭇가지 모양과 사슴뿔 모양의 장식이 세워져 있는데, 장식의 앞면에는 133개의 달개와 57개의 곱은옥이 달려 있다. 세움 장식의 가장자리에는 한 주의 연속 점무늬, 관테에는 파도무늬가 새겨져 있다. 관테에는 한 쌍의 드리개가 달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출처:중앙박물관>

<금관 부분>

신라 금관 중 가장 먼저 발견된 유물이다. 가운데에 ‘出’자(또는 나뭇가지 모양)과 양쪽에 사슴뿔모양의 장식이 있는 전형적인 신라금관이다. 신라금관은 5~7세기 신라 고분에서 발견되는 유물로 서봉총, 천마총 등 5개 이상 발견되었으며,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형태의 유물이다. 사슴뿔과 나무가지를 형상화한 시베리아 샤먼의 관과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出’처럼 생긴 나뭇가지 모양>

곱은옥과 일정한 간격으로 나뭇잎 장식을 달아 놓고 있다.

금관총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금관총 유물을 정리하고 보고서를 쓴 하마다 고사쿠 교수는 금관총을 현 일본 시가현 가모이나리야마 고분과 출토유물이 비슷하다는 점을 근거로 6세기 초에 축조된 무덤으로 판단하고, 주인공은 자비왕(재위 458~475)이거나 지증왕(재위500~514)일 것으로 추정했다. 오늘날 신라 고분 연구자는 금관총의 축조 연대를 대략 5세기 중엽부터 6세기 초로 생각하고 있다. 금관총의 주인공이 신라의 왕(마립간)이라면 자비왕, 소지왕(재위 479~500), 지증왕 중 한 명일 수 있다. 그러나 금관총은 비록 금관이 출토되긴 하였으나 무덤의 규모나 입지 등으로 볼 때 왕릉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도 많다. 금관은 왕뿐만 아니라 왕비나 왕족들도 금관을 썼을 가능성이 많아 금관이 출토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왕(마립간)의 무덤이라 말할 수 없다. 이사지왕이 누구인가 명확하지 않지만 금관총에서 출토된 유물로 볼 때 500년 전후 사망한 신라의 유력자 중 한사람 이었음은 분명하다. <출처:중앙박물관>

<금관과 함께 출토된 관모와 새모양 장식>

3가지유물이 합쳐서 국보(금관총 금관 및 금제 관식)로 지정되었다.

<관모(冠帽), 금, 국보>

금관과 함께 출토된 것으로 내관(內冠)으로 추정하고 있다. 관모는 얇은 금판을 오려서 만들었으며 모자 위로 새날개 모양 장식을 꽂아 놓았다.

<새모양 관꾸미개, 금, 국보>

모자 위에 꽂아서 사용한 새날개 모양 장식. 이 장식은 삼국시대 신앙을 반영한 것으로 샤머니즘과 관련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칼장식, 금동.은>

<허리띠, 은>

‘이사지왕(尒斯智王)’이 확인되다.
1921년 금관총의 발견 이후 92년이 흐른 2013년,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부는 금관총 출토 유물을 정리하던 중 고리자루 큰칼의 칼집 끝에서 날카로운 도구로 새겨 쓴 글자를 확인하였다. 판독결과 ‘尒斯智王(이사지왕)’이라는 글자였다. 또 칼 손잡이 부근에서 ‘尒(이)’자와 이사지왕이 새겨진 칼집 끝 뒷면에서도 ‘十(십)’자가 드러났다. 금관총의 또 다른 칼에서도 ‘八’, ‘十’, ‘尒’라는 글자가 추가로 발견되었다. 신라 고분에서 글자가 새겨진 유물은 서봉총의 은합이나 호우총의 호우를 비롯하여 여러 점 출토되었으나 왕의 이름이 새겨진 유물은 금관총 출토 고리자루 큰칼이 유일하다. 이 유물은 금관총의 주인공을 찾는 연구와 당시 신라 사회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할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고리자루큰칼1(環頭大刀), 고리자루큰칼2>

<‘尒斯智王(이사지왕)’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부분>

<고리자루큰칼에 새겨진 글자(설명자료)>

<금관총 금관과 함께 출토된 주요 유물>

<금관과 함께 관(棺)에서 출토된 주요 유물들>

<팔찌, 금>

<반지, 금>

<가는고리귀걸이(細環耳飾), 금>

<바깥쪽에서 출토된 유물>

<초두(鐎斗), 청동>


<유리잔, 유리>

<고구려, 일본 등과 관계를 보여주는 유물들>

고구려에서 온 그릇
금관총 유물 중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는 용기 중 하나가 바로 손잡이가 네 개 달린 청동 항아리이다. 이 항아리는 형태나 특징으로 보아 고구려 항아리임이 분명하다. 금관총의 주인공이 사망한 시점에 고구려에서 신라로 보내 온 물품이었을 것이다. 금관총의 주인공은 고구려와 어떤 관계에 있던 인물이었고, 고구려에서는 이 항아리에 무엇을 담아 보냈을까? <출처:중앙박물관>


<1.네귀달린 항아리, 청동>

고구려에서 보내온 것을 추정되는 유물로 무덤 주인이 고구려와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청동 완(碗), 청동>

<3.뚜껑접시, 토제>

<4.완(碗), 금.은>


<5.장군(缶), 토제>


<6.짧은목항아리, 토제>

일본 열도산 고둥으로 만든 말띠꾸미개
금관총 유물 중 현 일본 규슈 지방 남부와 더 남쪽 바다에 서식하는 ‘이모가이’라는 아열대 고둥껍데기를 가공해 만든 말띠꾸미개가 있다. 원뿔처럼 생긴 ‘이모가이’의 구멍 주변은 편평하고 소용돌이처럼 둥글게 말려 있는데, 이 부분을 다듬어서 말띠꾸미개에 끼워 넣어 장식하는 데 사용하였다. 금관총 이외에도 황남대총 북분과 천마총 등 신라 무덤에서 자주 출토되는 ‘이모가이’는 문헌기록에 나오지 않는 신라와 일본 열도 왜(倭)의 교류를 알려 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출처:중앙박물관>


<7.말띠드리개, 금동>


<8.말띠꾸미개, 조개>

일본에서 수입된 조개로 만들어졌다.

<9.청동방울, 청동, 구형장식, 금동>

<10.말띠꾸미개, 금동.유리>

<11.말방울, 청동>

<12.바둑돌모양 돌, 돌>

허리띠와 물고기장식
이 물고기 장식은 허리띠에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금관총을 비롯해 신라 대형 무덤에서는 금은제 허리띠가 많이 출토되었다. 허리띠에는 약통, 물고기, 숫돌, 족집게 곱은옥, 손칼 등이 달려 있는데 허리띠에 물건을 주렁주렁 매달고 생활한 북방 유목민의 풍습과 관련이 있다. 이중 곱은옥은 생명을, 물고기는 식량 또는 다산을 상징한다고 여겨진다. <출처:중앙박물관>

<1.비갑(譬甲), 금동>


<2.물고기모양꾸미개, 금.은>

물고기는 다산을 상징한다.


<3.금제장식, 금>


<4.날개모양 꾸미개, 금동, 삼각모양 꾸미개, 금동>

금관 곱은옥(曲玉)의 원산지
비취라고도 하는 경옥으로 만들어진 곱은옥은 아직까지 한바도에서 원산지가 확인된 적이 없다. 금관총 조사를 담당한 하마다 고사쿠 교수는 경옥제 곱은옥을 일본 유물로 판단했다. 곱은옥이 처음 만들어 진 것은 한반도 신석기시대이지만 4세기부터 나오는 경옥제 곱은옥은 경옥을 한반도에서 채굴할 곳이 확인되지 않은 마큼 수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신라 금관의 경옥제 곱은옥은 모두 일본 열도에서 온 것일까? 앞으로 경옥제 곱은옥에 대한 연구가 기대된다. <출처:중앙박물관>


<5.곱은옥, 옥>

곱은옥은 유물로서 많이 출토되지만 한반도에서 채굴되지는 않았고, 외국에서 수입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6.유리구슬, 유리>

금관총의 발견과 신라 고분 조사
우리나라에서 근대 고고학 조사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연구자에 의해 이루어졌다. 당시 일본인 연구자는 신라 고분을 여러 번 조사하였으나 돌무지덧널무덤의 복잡한 구조를 이해하지 못해 제대로 조사하지 못했다. 그들은 공사도중 우연히 발견된 금관총으로 인해 신라고분에는 화려한 유물이 묻혀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후 연속해서 금령총(1924), 식리총(1924), 서봉총(1926) 등을 발굴하였다. 이러한 조사와 연구는 조선총독부가 주관하였고 일본인이 담당했다. 당시 금관총의 조사와 연구는 교토제국대학 하마다 고사쿠 교수가 주도하고 우메하라 스에지, 고이즈미 아키오, 사와 슌이치 등이 참여했다. 현재 일본 교토대학에 보관중인 보고서 원고와 사진 자료는 당시 금관총에 대한 관심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금관총 보고서와 관련자료>

1921년 금관총 금관과 이사지왕 큰칼의 발견 직후 찍은 사진. 금관총에서 유물이 발견된 직후 출토 상황을 기록하기 위해 경주나 서울에서 촬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금관총 유물의 출토 모습을 그린 도면은 유물을 수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작성한 것으로 훗날 보고서 본문(상)에 도면으로 출간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금관총 사진>

<발굴 당시 금관총 금관>

<고리자루칼>

금관총 유물은 1922~1923년에 걸쳐 교코제국대학 우메하라 스에지에 의해 조사되었다. 그는 일본에서 경성(서울)으로 출장와서 유물을 조사한 후 그 기록을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가 교토제국대학에서 편집한 후 보고서를 인쇄했다. 현재 일본 교토대학에는 당시 보고서 편집에 사용한 관련 자료가 남아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발굴 당시 금관총 모습을 그린 그림>

<금관을 비롯한 유물들이 발견된 당시 모습>

조선총독부는 금관총 보고서를 총4권으로 기획했다. 본문(상)은 1924년 5월, 도판(상)은 1924년 9월, 도판(하)는 1928년 3월 간행되었다. 본문(하)는 여러 문제로 정식 간행되지 못하고 ‘경주의 금관총’이라는 이름으로 하마다 고사쿠에 의해 1932년이 되어서야 출판되었다. 이 책들은 모두 일본 교토 지교도(似玉堂)에서 인쇄되었다.

<금관총 관련 보고서>

<금관총 발굴 보고서>

<물고기 모양 장식 그림>

<각종 문양>

<토기 등에 새겨진 문양>

<장식>

<경주의 신라고분 분포도>

4~6세기 고분들이 경주 도심 월성 부근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금관총 이후 발굴조사>

금관총에서 금관이 출토된 이후 여러 고분들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금관을 비롯한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금령총(金鈴塚) 방울, 금>


<식리총(飾履塚) 신발, 금동>

금관총과 이사지왕, 여전히 남은 과제들

남성인가? 여성인가?
금관총 보고서를 집필한 하마다 고사쿠교수는 주인공을 왕(마립간)으로 생각했는데 남성으로 본 셈이다. 그런데 현재 신라 고분 연구에서는 가는 고리 귀걸이(細環耳飾)를 하고 큰 칼을 직접 허리에 찬 남성, 굵은고리 귀걸이(太環耳飾)를 하고 큰 칼을 직접 차지 않은 사람은 여성으로 주장하는 견해가 많다. 보고서에 따르면 금관총의 주인공은 큰 칼을 직접 차지 않고 굵은고리 귀걸이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덤의 주인공은 여성일 가능성이 높다. 과연 여성일까? <출처:중앙박물관>

최고지배자인 마립간, 즉 왕일까?
이사지왕이라는 와아은 현재까지 확인된 금석문이나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역사 기록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사지왕은 신라 냉수리비(443년 또는 503년 건립)에 나오는 ‘차칠왕등(此七王等)’을 ‘이 7명의 왕들로’ 해석하여 당시 신라에 여러 명의 왕이 있었다고 하는 견해를 뒷받침하는 것일까? 아니면 신라 최고지배자인 왕(마립간)의 또 다른 이름일까? <출처:중앙박물관>

<굵은 고리 귀걸이, 금>

금관총(金冠塚)과 이사지왕(尒斯智王)
1921년 무덤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금관은 황금의 나라 신라의 존재를 알리는 중요한 발견이었습니다. ‘금관총’이라 이름 붙여진 이 무덤이 조사된 이래 92년이 지난 2013년, 국립중앙박물관은 금관과 함께 발견된 고리자루 큰칼을 보존 처리하는 과정에서 ‘尒斯智王(이사지왕)’이라는 왕의 이름을 확인하였습니다. 지금까지 고신라 무덤에서 왕의 이름이 확인된 적은 한번도 없었기 때문에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번 전시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금관의 발견 및 조사 과정을 소개하고 왕의 이름이 새겨진 고리자루 큰칼을 발굴 이래 최초로 공개하는 자리입니다. 이 전시를 통해 금관총의 주인공이 누구인가를 다시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출처: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