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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역사박물관, 개항기의 강화

병자호란 이후 북방민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조선 정부는 강화도를 책임자를 정2품 강화유수로 하고, 군사와 행정을 총괄하게 하였다. 또한 강화산성, 정족산성 등을 보강하고 해안에 5진7보53돈대를 설치하는 등 국방을 강화하였다. 또한 강화갯벌들을 간척하여 농토를 넓혀 식량자급을 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이러한 조선의 대비책과는 정반대로 구한말 조선의 위협은 해양세력으로부터 찾아왔으며,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 조선은 서양함대에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여 강화행궁이 약탈당하고 초지진 등 여러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서양세력이 물러간 이후 일본은 운요호사건을 일으켜 조선과 통상조약을 맺음으로써 조선은 쇄국정책을 끝내고 개항을 하게 되었다. 1976년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은 오늘날 기준으로는 개항을 위한 조약이지만, 당시 조선은 기존에 부산에 설치되었던 왜관을 확대한다는 의미로 개항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로 당시 국내적으로 개항에 대해 큰 저항이 없었다.

<병인양요와 정족산전투, 1866년>

<병인양요때 프랑스군과 큰 전투가 있었던 정족산성 남문>

<병인양요, 신미양요 당시 작성한 지도>

<병인양요, 신미양요 주요 격전지>

<소포, 블랑기포>

<포탄, 탄환>

<조총>

<덕진진 경고비>

덕진진 남쪽 덕진돈대 앞에 위치한 이 비는 1867년에 흥선대원군의 명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전면에 ‘바다의 관문을 지키고 있으므로 선박은 통과할 수 없다,’고 써 있다.

신미양요
미국은 1871년5월, 군사원정을 통하여 조선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강화도에 접근하였다. 조선정부는 진무중군에 어재연을 임명하고 콜로라도호에 “외국과 조선은 교역하지 않는 것이 400여 년 이전부터 규범화된 원칙”을 내용으로 흥선대원군의 친서를 전하였다. 이후 초지진, 덕진진을 시작으로 광성보에 전면전이 벌어졌다. 이 때의 정황은 당시 미군 킴벌리 중령의 부관이었던 슐레이 소령의 회고에 잘 나타나 있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신미양요 전투모습, 초지진을 공략하는 미군>

“광성보 함락에 있어 미군의 작전은 힘겨운 것이었다. 이곳은 강화의 진지 중 가장 요충지였기 때문에 조선 수비군은 결사적으로 싸웠다. 미군은 함성을 지르며 진격해 들어갔고, 탄약을 갈아 넣을 여유도 없었던 조선군은 창과 칼로 방어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은 무기도 없이 맨주먹으로 싸웠으며, 모래를 뿌려 상대방의 눈에 손상을 주려 하였다. 그들은 끝가지 항전하였고, 수십명은 총탄을 맞아 강물에 나뒹굴었으며, 어떤 자는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거나 물속으로 투신하였다. 조선군은 근대적인 총기를 한 자루도 보유하지 못한 채 징갈총이나 노후한 전근대적인 무기를 가지고서 근대적인 미국총포에 대항하여 싸웠다. 조선군은 결사적으로 장렬하게 싸우면서 아무런 두려움 없이 그들이 진지를 사수하다가 전사하였다. 가족과 국가를 위하여 이보다 더 장렬하게 싸운 국민을 다시 찾아볼 수 없다.”

<초지진>

<신미양요 당시 미군이 찍은 사진>

<조미수호통상조약 초안>

<강화도조약, 1876년>

운요호 사건 이후 부산, 인천, 원산을 개항하는 것을 주내용으로 하는 강화도 조약을 강화도에서 체결하였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외국과 통상협정을 맺는다기보다는 왜관이 설치되었던 부산포 외에 인천과 원산에 추가로 왜관을 설치한다는 개념으로 조약을 맺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화도조약에 체결되었던 강화유수부 연무당>

<강화산성 서문 안쪽 연무당 옛터>

강화인의 민족정신
대한제국의 군대가 강제 해산된 후, 강화진위대의 참령이었던 이동휘와 이능권을 중심으로 강화의 의병활동이 활발하게 시작되었다. 일본군과 온종일 격전을 벌인 전등사 전투에서는 무기가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강화의병이 큰 승리를 거두었다. 강화의병이 수년간에 걸쳐 장기적으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강화주민들의 절대적인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화인의 저항정신은 1만명이 넘게 참여한 3.1보통운동과 실상보통학교를 중심으로 일어난 6.10만세운동으로 이어졌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강화도 의병활동 사진>

강화 근대학교의 설립
강화의 근대교육기관은 1899년 성내공립보통학교(강화초등학교)를 설립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901년 합일학교가 세워진 이후 일제의 탄압속에서도 항일사상의 고취를 위한 교육에 힘썼다. 특히 강화진위대 참령이며 후에 의병활동의 중심인물이 되는 이동휘와 윤명삼, 유경근 등은 1904년에 보창학교를 설립하였는데, 1907년에는 강화각지에 14개의 분교를 세워 800여 명이 넘는 학생을 가르쳤다. 이밖에도 강화학파였던 이건승이 독립주권의 회복 의지를 고취하기 위해 계명의숙을 세웠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강화도 보창학교>

<근대교육관련 자료>

 조선과 서구 충돌의 장, 개항기의 강화
19세기 후반, 조선을 향하여 서양세력들이 밀려 들어오면서, 수도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강화는 조선과 서구문명이 충돌하는 현장이 되었다. 1866년 일어난 병인양요는 기독교 선교를 빌미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던 프랑스와 조선의 전쟁이었다. 프랑스군은 외규장각 도서 등 문화재 약탈을 자행하여 조선인에게 서양에 대한 경계심을 강화시켰다. 1871년 일어난 신미양요는 중국에 진출한 미국상인들의 기득권을 보호할 명목으로 미국이 조선을 침공한 사건으로, 대원군은 이 사건 이후 “침법하는 양이와 화친할 수 없다.”는 척화비를 곳곳에 세워 서양에 대해 쇄국정책을 단행하였다. 고종이 집권하고 개항의 필요성이 높아져 갈 때인 1876년, 메이지유신에 성공하여 근대국가로 전환한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일수호조규, 즉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이를 계기로 조선은 제국주의 침략에 본격적으로 노출되었다. 이에 조선정부는 강화에 최초의 근대해군사관학교인 총제영학당을 건립하고, 강화의병운동을 벌이는 등 일제침략에 대한 저항운동을 벌였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