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강화도는 삼남지방과 평안도, 황해도에서 생산된 물자와 세금으로 걷어들인 곡식들이 서남해안 연안항로를 거쳐 한강으로 모이는 서울이 입구에 해당하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또한 지리적 장점과 비교적 넓은 농지가 있어 국가 비상시를 대비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대몽항쟁의 경험으로 병자호란 때 국왕이 피신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으나, 청나라의 치밀한 공략으로 강화도가 점령되기도 했다.
병자호란 이후 강화도에는 행궁을 설치하고 방어시설로 강화산성과 5진7보53돈대를 구축하였다. 정2품의 강화유수가 행정과 군사를 총괄 지위하였으며,강화유수부는 지방조직이 아닌 중앙정부 조직에 속했다. 또한 강화유수부 관아에는 외규장각이, 전등사가 있는 정족산성에는 사고가 설치되었다. 지금은 군단위의 작은 지역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직할시 정도의 위상을 가지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강화도 진무영을 본영으로 하는 본.전.좌.우.후영 체계
5진7보53돈대(용두돈대),
병자호란 이후 효종은 북벌계획의 일환으로 강화 해안선을 따라 진,보,돈대를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숙종은 국방 강화를 위하여 5진7보53돈대 설치를 완료하였다.
전(塼)
철촉, 철환, 수키와,(남장대지 출토유물)
강화산성 남장대.
강화산성은 고려말 몽골과 화친의 조건으로 허물어졌으나 조선시대 국방강화를 목적으로 다시 축성되었다.
강화유수부 및 강화행궁,
국방상의 주요지인 강화에는 육군과 수군을 총괄 지휘하는 강화유수가 있었다. 또한 강화유수부에는 임금이 거처하는 강화행궁과 여러 왕실 관련 전각이 있었다. 강화행궁과 관아 건물들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의 침입으로 불타버린것을 그 이후에 동헌과 이방청만 복구하였다.
강화산성 남장대에서 내려다 본 강화읍 관청리 일대.
조선 제2의 수도, 강화
강화는 국가가 위급할 때 왕실과 조정이 피난하여 전란을 극복하는 안전보장처이며, 내륙으로 문화와 물자가 드나드는 인후(목과 코)와 같은 곳이었다. 조선시대 제2의 수도인 강화에는 매우 높은 관직인 종2품 유수가 배치되는 강화유수부가 있었고, 임금의 거처인 강화행궁과 왕립도서관인 외규장각이 설치되었다. 강화는 고려시대 이래 대규모 간척사업으로 풍부한 식량이 확보되었고, 바닷길을 통해 들어오는 조운선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해상관문이자 전략적 국방요지였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동의보감, 향약규칙, 학궁의례(강화향교 소장)
보(簠, 19세기, 왼쪽), 궤(簋, 조선시대 19세기,오른쪽),
보(簠, 19세기, 왼쪽), 보는 제례 때 쌀과 기장을 담는 음(陰)에 속하는 제기로 제상의 가운데에 올린다. ‘땅은 모지다’라는 뜻을 담아 사각형으로 만들었으며 몸체 양쪽에 손잡이가 달려 있는 제구를 칭한다. 강화향교에서 사용했던 이 제기는 뚜껑은 없어지고 몸통만 남은 사각형의 보이다. 몸통 위쪽 사면의 측면에는 뿔이 달린 서수의 머리를 붙였다. 몸통 하단부는 굽쪽으로 내경하여 들어갔다. 굽은 사각이며 측면은 호형이다. 궤(簋, 조선시대 19세기,오른쪽), 강화향교에서 보와 함께 궤로 사용했다고 전하는 제기이다. 뚜껑은 없어지고 몸통만 남은 이 원통형의 제구는 보와 동일한 형태의 뿔이 달린 서수의 머리가 몸통 위쪽 삼면에 붙어 있어 보와 한쌍을 이룬 변형된 궤로 추정된다. 궤는 제례때 메기장과 찰기장을 담아 보의 앞줄에 올리는 양(陽)에 속하는 제기이다. ‘하늘은 둥글다’라는 뜻을 담아 둥글게 만들었다. 전형적인 궤의 형태는 몸체 양쪽에 손잡이가 있다. 강화향교에서 보와 같이 사용한 이 궤의 몸통은 국그릇으로 사용되었던 놋그릇과 동일한 형태로 완만한 곡선에 평저를 이루는 내저면과 적당한 크기의 굽을 지닌 형태를 보이고 있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강화향교
강화 교육의 기반, 강화 향교
향교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지방 교육기관의 역할과 공자를 비롯한 선현에 대한 제사기능을 담당하였다. 강화에는 교동향교와 강화향교가 있으며, 모두 1127년 창건되었다. 특히 교동향교는 고려 충렬왕(1286년) 때 안향이 원나라에 갔다 오는 길에 공자상을 가져와 문묘에 모신 우리나라 최초의 향교이다. 향교는 고려시대 이후 강화지역의 교육기관이자 향촌의 미풍양속을 담당하는 지역사회의 중심이었다. 오늘날도 교동향교와 강화향교는 제사봉행과 전통문화교육에 힘쓰고 있다. <출처:강화향교>
강화 양명학의 주요 인물들
하곡문집(복제품),증참의공적소시가(복제품),
하곡문집(복제품), 조선후기 양명학자 정제두의 시문집으로 서(書), 소(蘇), 시(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양명학에 대한 신념과 이론들에 대한 견해를 담고 있다. 증참의공적소시가(복제품), 정제두의 제자인 이광명이 함경도 갑산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지은 수필본으로 한글로 기록된 이주풍속통은 이주(갑산)의 자연 및 인문지리를 담고 있다.
명미향관초고(복제품), 백하집(복제품)
명미향관초고(복제품), 조선후기 문신이며 이시원의 손자 이건창의 산문집으로 운재 정기우에게 보낸 편지글에는 시문에 관한 견해가 드러나 있다. 백하집(복제품), 조선후기 문신.서예가이며 정제두의 제자 윤순의 문집
마음의 참된 이치, 강화 양명학
조선후기 하곡 정제두(1649~1736년)를 필두로 강화를 중심으로 이어지는 조선 양명학을 강화학파라 한다. 양명학은 ‘마음이 만물의 주인이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같다, 인간의 선함을 완성한다”라는 세 가지 명제를 가지고 있다. 정제두는 이러한 양명학을 통해 명분을 강조하던 조선사회에 인간 중심의 실천정신을 강조하였다. 강화학파는 정제두의 뒤를 이어 이광명, 이광사, 신대우, 이시원, 이건창, 이건승으로 계승되었으며,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강화도 일대 조선시대 조운로
제5폭은 월곶진(연미정) 일대
「강화도지도」는 8폭으로 된 병풍인데 제5폭은 월곶진(연미정) 일대를 기록하였다.
연미정이 있는 월곶돈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한강하구.
조선시대 한강을 드나드는 선박들은 이곳에서 점검을 받고 물때를 기다려 한강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조선경제의 관문
조선시대의 강화는 국가 비상시를 대비한 물자보관소의 기능을 하였다. 또한 삼남지방과 평안도, 황해도의 생산물과 세금으로 걷은 곡식을 서울로 나르는 조운선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특히 월곶진(연미정)은 전국에서 올라온 조운선의 물품을 점검하는 곳이었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강화부 목장지도(19세기초),
이 지도를 통해 강화도 내 진강장.북일장.매음도.주문도.장봉도.신도.걸도.보로도.미법도 등 9곳에 목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주요 마장지, 강화
군사상의 이유로 강화 전 지역에는 고려시대부터 말을 키우는 마장이 설치되었다. 강화는 예부터 수초가 풍족하여 말을 키우기에 유리하고, 서울과 가까운 곳에 있어서 말의 수송이 쉬웠다. 진강목장(양도면)과 길상목장(길상면)은 국가가 특별히 관리하는 말 1,500필을 방목하였으며, 매음도목장(삼산면)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탔던 명마 사자황을 키웠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정족산사고.
사고는 고려와 조선이 실록을 비롯한 국가의 중요 서적을 보관하는 곳이다. 강화사고는 본래 강화부에 있었으나 안전을 위하여 1606년 마니산으로 1660년 다시 정족산으로 옮겨졌다.
정족산사고 함(복제품)
외규장각,
1782년 정조는 강화에 왕립도서관인 외규장각을 설치하였다. 1866년 강화에 상륙한 프랑스 해군은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왕실의례 관련 도서인 의궤와 귀중품을 약탈해 갔다.
외규장각이 있던 강화유수부 관아(강화행궁)을 그린 그림
순강원상시봉원도감의궤(복제), 영희전경건도감의궤(복제)
황효원 장군의 무기들(철궁, 패월도, 철제도신),
정묘호란(1627년) 당시, 인조를 호종한 공신으로 벼슬이 교동수사에서나중에 지의금부사에 이르렀던 황효원장군이 생전에 사용하던 무기들이다.
충렬사 상량문,
강화 충렬사는 병자호란 당시 순졸한 충신 김상용 신위를 봉안하고 있다.
시권,칙명,
시권, 1865년 황현주가 작성하여 제출한 시권이다. 시권은 과거응시자들이 제출한 일종의 답안지이다. 합격자의 시권은 뒤에 합격의 증표인 홍패 또는 백패와 함께 본인에게 돌려주었다. 칙명, 1902년 9월에 외부참서관 황우영을 경흥부윤 주임관 4등으로 발급한 칙명이다.
전령, 화부 이아 품목,
전령, 1895년 5월에 임실현감 황현주를 순초청 좌통순으로 임명하는 전령이다. 강화부 이아 품목, 황순의 원정을 상부에 보고하는 문서이다.
교지
호구단자,
1876년 황두희가 작성하여 강화부에 제출한 호구단자이다. 그는 부인 송씨를 비롯하여 숙모 노씨, 동생 내외, 아들 내외 등 14명이 함께 살고 있었고, 12명의 노비를 거느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조선시대 강화의 문화전통
강화는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국가의 안전보장처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 강화에서는 이형상의 「강도지」를 비롯한 다양한 지리서와 『한씨경란기』와 같은 전쟁의 실상을 담은 문학서가 간행되었다. 조선후기에는 전통문화를 계승하려는 역사책의 편찬이 이루어져 강화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고와 왕실의 귀중도서를 보관하는 외규장각이 설립되었다. 양명학의 이념을 강조하는 정제두와 그의 문인들은 강화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강화학파를 이루었다. 한편, 강화는 다른 지역보다 앞서 서양문화와 종교를 접하게 되었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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