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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역사박물관, 강화 바닷길과 고려시대 강화

강화도는 한강하구와 서해안 연안항로에 위치한 큰 섬이다.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었고, 주변에 넓은 갯벌이 있어 외부의 공격에 방어하기 좋은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어 선사시대 이래로 사람이 거주해 왔다. 강화도는 역사적 사건에 많이 등장하는데, 그 중 대표적인 시기가 고려시대 대몽항쟁기와 병자호란일 것이다. 고려가 몽골에 40여년 항쟁하는 동안 고려 국왕을 비롯하여 집권층은 강화도로 피신하여 대몽항쟁을 주도하였다. 대몽항쟁기 동안에도 고려 지배층은 화려한 생황을 영위했으며, 팔만대장경을 비롯하여 많은 문화적 유산을 남겨 놓고 있다.

참성단,

마니산 꼭대기에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쌓은 제단으로, 동그란 모양으로 쌓은 아랫단 위에 네모난 제단을 올렸다. 단군과 선조들은 말을 달리고 바다를 건너 강화의 신성함을 찾았다. 최근에도 민족의 성지인 참성단에서 전국체육대회 성화가 올려지고 있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선사시대
문명의 여명기인 신석기시대에는 대륙문화가 초원길을 따라 황해로 전해졌다. 신석기의 토기는 강화 앞바다인 영종도, 삼목도, 덕적도 등 서해지역 섬 전역에서 발견되어 이 시기에 사람들이 널리 퍼져 살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민족의 이동이 있었던 청동기시대에는 강화에 참성단을 쌓고 거석문화인 고인돌을 남겼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강화 전등사

삼국시대
고대국가 시대의 강화는 백제의 영역으로 황해로 나아가는 문호의 구실을 하였다. 강화는 서해안의 한강, 금강, 영산강을 잇고 중국의 동진, 양나라와 활발하게 교류하는 해상운송로의 역할을 하였다. 남하정책을 시도하던 고구려는 강화에 혈구군을 설치하고, 전등사, 백련사, 청련사, 적석사를 창건하였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고려청자

강화 교동도의 교동향교,

안향이 처음으로 공자상을 모셨다는 향교이다. 그 당시의 향교는 아니고 조선시대에 중건한 것이다.

강화물길과 고려청자
고려시대에는 육지의 비단길과 바다의 남해로가 있었으나, 주로 바닷길을 이용한 중국 양자강 이남의 항주, 영파와 잎본 규슈의 나가사키에 이르는 해상교류가 활발하였다. 고려청자의 전성기인 강도 시기에는 강진과 부안에서 생산된 고급청자가 공물 또는 상품으로 서해의 조운로를 따라 강화로 유입되었다. 충렬왕12년(1286)에 안향은 원나라에서 공자상을 가지고 서해물길을 따라 귀환하면서 처음으로 배를 댄 교동도에 공자상을 모셨다. 이로써 우리나라 향교 가운데 가장 먼저 공자와 제자들의 그림을 봉안하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개경과 각 지역에 문묘가 설치되었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이 측량한 강화부 지도(왼쪽), 1871년 신미양요 당시 미군이 작성한 뱃길 지도(오른쪽)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이 측량한 강화부 지도(왼쪽). 이 지도는 1866년 11월 프랑스 Roze 일행이 강화부 침략시 측량된 것으로 당시의 행궁 외규장각 장녕전 등 중요 건물들의 위치를 알려주고 있다. 1867년 프랑스 수로부에서 해도번호 제2556호로 출판되었다. 1871년 신미양요 당시 미군이 작성한 뱃길 지도(오른쪽)

조선시대
대외교역과 강화물길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의 국제적인 해상로와 달리 한반도 남부와 북부를 잇는 연안항로로 주요 해상영역이 변경되었다. 그러나 강화 앞바다를 통한 세곡 조운로는 계속 활용되었다. 근대에 이르러 서구열강은 발달된 항해술을 이용하여 강화 앞바다의 옛물길을 통해 한반도로 들어오면서 우리문화와 접촉하게 된다. 특히 천주교, 성공회, 감리교 등의 서양 종교의 유입으로 근대 강화지역은 오랜 전통문화와 신문화의 충돌의 장이 된다. 어려웠던 근대시기를 겪고 이제 서해안 시대와 남북교류의 중심지로 떠오르는 강화는 새로운 문명기를 맞고 있다. 앞으로 강화의 물길은 21세기 신문명의 나들목으로서 세차게 흐를 것이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강화의 열린 바닷길 이야기
동아시아 문명 중심통로, 강화 물길을 따라 문물만 교류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담고 있는 문화가 흐르며 인류의 문명은 더욱 풍요로워졌다. 동아시아 문명의 중심통로인 황해는 한반도와 중국, 일본을 돌아 동남아시아로 나아가는 거대한 고속도로와 같다. 이러한 황해를 끼고 있는 강화는 한반도 중부에서 흐르는 한강, 예성강, 임진강과 서해안의 조류가 만나는 중요한 지점일 뿐만 아니라 한반도와 세계 문명의 발상지인 황화문명과 세계해상 문명의 통로인 동중국해로 나아가는 지점이었다. 선사시대 이래 물길을 따라 동아시아 문명이 흐르며 강화에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강화천도의 길,

을유에 왕이 개경을 출발하여 승천부에 머무르고 병술에 강화도의 객관에 입어하였다. 이때 장맛비가 열흘이나 계속하여 진흙길이 발목까지 빠져서 인마가 쓰러져 죽었다. 고관이나 양가의 부녀들로서 맨발로 업고 이고 하는 자까지 있었다. 환과고독으로서 갈 바를 잃고 호곡하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 고려사절요 –

청자상감운학문뚜껑, 청자뚜껑달린주전자, 청자상감쌍학문소합,

청자상감연화문병, 청자양각연화문병, 청자병

청자상감국화문접시 (강화 송해면 출토), 청자대접(강화 관청리 출토)

청자상감국화문과형주자(송해면 하도리 출토), 청자상감국화문과형병(고려 13세기), 청자양각파도문삼족향로(고려 13세기)

강화유수부 관아(강화 행궁)에 남아 있는 고려궁지

강도의 궁궐, 고려궁지
1234년 궁궐공사가 완료되고, 개경과 전국에서 이주한 귀족과 주민들을 위한 민가가 들어서면서 강화는 새로운 도읍의 면모를 갖추었다. 강도의 궁궐은 개성과 같이 송악산(북산) 남쪽 기슭을 중심으로 개경의 궁궐 구조를 그대로 본떠서 지었다. 행정관서는 궁궐의 남쪽과 동쪽에 두었으며 강도의 도심은 송악산과 견자산, 화산(남산) 주변에 자리하고 있었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강화산성 남장대에서 내려다 본 강화읍.

강화중성 주변 출토 청자류

강도의 성곽, 강화성
강도의 성곽은 개성과 같이 내성, 중성, 외성의 3중성이다. 강화내성은 궁궐과 관아를 포함하는 성곽이며, 중성은 도성으로 주택과 사원 등 각종 도시시설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리고 외성은 해안 방어선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 밖에 하음산성, 고려산성, 혈구진성, 삼랑성 등을 두어 외곽에서 도성을 지키는 구실을 하였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진양부 팔관회 전경

동경(강화읍 국화리 출토), 환옥(강화 하점면 창후리 출토), 구슬(강화 하점면 창후리 출토)

강도 권력의 중심, 진양부
무인집권기의 최고 권력자였던 최우는 1234년 진양후에 책봉되어 왕자와 비슷한 지위를 얻었다. 최우 권력의 중심지인 진양부는 국왕을 견제하고 관료들을 장악하였다. 당시의 권력은 송악산의 대궐보다 견자산의 진양부에서 나온다고 말할 정도였다. 진양부는 궁궐 못지않게 웅장했으며, 채색비단으로 만든 무대에서 대규모 연회를 수시로 열었다. 전쟁으로 내륙과 강화주민들의 삶은 어려웠지만 집권층의 문화는 화려하고 사치스러웠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청동숟가락, 동전 (창후리 고분군 출토)

두귀달린항아리, 항아리, 병 (강화 하점면 창후리 고분군 출토)

강도 시기, 강화 주민의 생활
강화천도 이후 개성과 같은 규모의 궁궐과 성곽을 쌓는 대규모 공사와 무신집권자들의 사치스러운 생활 때문에 강화 주민들은 인력과 물자동원을 감수해야 했다.

“최이가 사사로이 얼음을 재어 서산의 빙고에 저장하려고 백성을 풀어 얼음을 실어 나르니 그들이 매우 괴로워하였다. 또 안양산의 잣나무를 옮기어 집안의 정원에 심었다. 안양산은 강도에서 수일 길이 되는데 문객 장군 박승분 등으로 감독하게 하니, 떄에 추위가 한창이어서 역도가가 얼어 죽는 자도 있어 연로 군현이 집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 그 소요를 꾀하였다. 어떤 사람이 승평문에 방을 써서 붙이기를 ‘사람과 잣나무 중 어느것이 중하냐’라고 하였다.” – 고려사절요-

강화의 고려왕릉

석인상, 석수(곤릉 출토)

가릉 발굴조사 전경, 능내리 석실분 발굴조사 전경, 곤릉 발굴조사 전경, 석릉 발굴조사 전경

동전

청자화형접시(능내리 석실분), 청자접시(석릉)

강화 고려왕릉의 특징
왕릉의 영역은 2~3단으로 조성되었으며 각 단에는 석상이 위치하고 있다. 가릉은 무덤 주인이 묻히는 석실이 지상에 있으며, 석릉과 곤릉 및 능내리 석실분의 석실은 지하에 있다. 석실 상부에는 8각(가릉, 석릉) 또는 12각(곤릉)으로 구성된 호석이 둘러 있다. 곤릉과 능내리 석실분 앞쪽에는 정자각을 축조하였으며, 석실 내부의 벽면은 회칠을 하였다.

석릉(고려 21대 희종),

석릉에서 출토된 청자는 고려청자 전성기의 색과 장식문양을 보여준다. 음각과 양각기법 외에도 상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법이 사용되었다. 은제품, 청동유물, 구슬, 동전 등이 함께 출토되었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잔받침(석릉), 청자뚜껑(석릉)

철제14면체못(석릉), 은제고리열쇠,구슬(석릉),은제고리(능내리 석실분)

은못(능내리 석실분), 청동제고리장식(능내리 석실분)

곤릉(고려22대 강종의 비 원덕태후의 능),

곤릉에서는 도자기와 기와류, 각종 금속제류 및 구슬, 동전이 수습되었다. 겨묻거리 청자는 모두 고급품으로 강진과 부안에서 제작된 우수한 도자기가 강화까지 공급되었음을 보여준다.

잡상(곤릉), 수막새(곤릉)

능내리 석실분(고려 23대 고종의 비 안혜태후의 능으로 추정), 능내리 석실분에서는 용이 있는 원통형 향로와 날카로운 눈매와 부리를 갖춘 봉황무늬를 새겨 넣은 봉황무늬 은제도금 장식판이 발견되어 무덤의 주인이 상당히 높은 계층이었음을 보여준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수키와(능내리 석실분)  항아리(능내리석실분), 수막새(능내리 석실분)

가릉(고려24대 원종의 비 순경태후의 능), 석실 내부에서 원풍통도를 비롯한 중국동전 86점과 관을 장식했던 것으로 보이는 은제경첩과 나비장식, 호박구술, 새를 조각한 옥장식 등이 출토되었다.

강화 홍릉

고려왕실의 위상, 왕릉
남한에 있는 고려왕릉 5기 가운데 4기가 강화에 있는데 고려 제21대 희종의 ‘석릉’과 제22대 강종의 비 원덕태후의 ‘곤릉’, 제23대 고종의 ‘홍릉’과 제24대 원종의 비 순경태후의 ‘가릉’이 그것이다. 이 외에도 왕릉급 고분으로 능내리 석실분과 인산리 석실분이 있다. 개경에서 장사지내는 예법에 따라 모두 대형의 석실분으로 조성되었다. 왕릉에서 출토된 화려한 금속공예품과 최고급 청자에서 당시 왕실의 위상과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발원문

팔만대장경을 새긴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이 발원문은 부처의 힘을 빌어 외적의 침략에 대처하고 민심을 수습하고자 하는 염원을 담은 글이다. 대장경을 제작하기에 앞서 부처님과 모든 천신들께 임금과 신하 및 백성들이 각오를 다짐하고 실천하기 위한 의지를 담았다.

“엎드려 원하옵건데 여러 부처님은 … 간곡하게 비는 것을 헤아리셔서 신통한 힘을 빌어주어 완악한 몽골로 하여금 멀리 도망하여 다시는 우리 국토를 밟는 일이 없게 하여 전쟁이 그치고 중외가 편안하며, … 무강한 수를 누리고 나라의 국인이 만세로 유지될 수 있게 하여 주신다면 제자들은 마땅히 노력하여 법문을 보호하고 부처님의 은혜를 만분의 일이라도 갚으려 합니다. 이규보, 「대장각판군신기고문」

동문선, 권111의 「선원사경찬법회소」에 기록된 강화 선원사 창건 경찬법회에 대한 내용

대장경이란
대장경은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하여 널리 알릴 목적으로 간행된 불교의 대경전이다. 대장경이란 말은 ‘세개의 광주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경(經),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지켜야할 도리를 담은 율(律),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연구해 놓은 론(論)인데, 이 세 가지의 큰 광주리를 합쳐 대장경이라 부른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동국이상국집(복제품), 강도고금시선(영인본)

강화에 꽃피운 고려문학
강도 시기는 『고려대장경』의 출간이 보여주듯이 고려시대의 문예부흥기였다. 이규보로 대표되는 강도문학은 발달된 불교와 유교문화를 기반으로 대몽골항쟁의 민족의식을 높이는 등 다방면의 작품을 남겼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강화 선원사지

잡상(선원면 지산리 출토), 수막새(선원면 지산리 출토),

암막새(선원면 지산리 출토), 전(塼, 선원면 지산리 출토)

고려대장경과 강화 선원사
거란군을 물리치기 위해 만든 초조대장경이 전쟁 중에 불타버리자 최씨정권은 새로운 고려대장경(재조대장경, 팔만대장경)을 1236~1251년에 걸쳐 조판하였다. 대장경 조판사업을 추진할 대장도감을 최대 국가사찰인 강화 선원사에 설치하고, 16년에 걸쳐 8만여 장의 대장경 목판을 완성하였다. 선원사에 있던 고려대장경은 조선이 건국된 후, 한양으로 옮겨졌다가 현재는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청자상감국화문주전자(고려 13세기)

고려청자
고려청자는 12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하고 왕실, 귀족과 사찰을 중심으로 사용되었다. 강화의 고려왕릉에서 출토된 청자는 유색이 좋고 장식문양과 제작수법이 세련되었다. 왕실 이외에도 무신정권기의 권력자였던 최항의 무덤에서 나온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는 왕실자기에 비해서도 장식이 매우 화려하다. 강화 중성 주변 건물지 발굴조사에서도 최상급의 청자류가 출토되어 왕실 못지 않은 귀족들의 화려한 생활상을 보여준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강도 시기의 찬란한 문화
39년간 대내외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강도 시기의 고려는 찬란한 문화를 남겼다. 특히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고려대장경이 제작되어 당시의 불교문화가 세계적인 수준이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하여 목판인쇄의 단점을 보완하였다. 목판 및 금속활 인쇄술과 함께 고려청자 등 공예미술문화의 발전 또한 획기적이라 할 만하다. <출처: 강화역사박물관>

고려의 수도, 강화
13세기 초 중국대륙의 새로운 강자가 된 몽골은 고려에 무리한 조공을 요구하였다. 1225년 고려를 방문하여 공물을 징수한 몽골사신이 귀국길에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몽골은 이를 계기로 1231년 고려를 침략하였고, 무신정권(최씨정권)은 1232년 강화로 수도를 옮기고 장기간의 전쟁을 벌였다.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할 때까지 39년간 강화는 수도로서의 위상을 가지고 ‘강도(江都)’라 불리우며 고려시대의 정치.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