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공예 미술품들이다. 강화지역에서 출토되거나 소장되어 왔던 것은 아니고, 여러 경로를 통해서 이 박물관에 기탁,기증되어 전시되고 있는 문화재들이다. 청동기시대부터 여러곳에서 출토되는 금속이나 옥, 유리 등으로 만들어진 다양한 장신구와 불상을 비롯한 불교공예품, 고려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재인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등이 전시되어 있다.
청동검부속구(청동기시대),
청동말모양띠고리(철기~원삼국시대), 청동초두(삼국시대)
백제시대 철제투구와 갑옷
철제환두대도, 허리띠고리, 발걸이, 마구 (삼국시대)
철제투구(고려시대),
수저(고려~조선시대), 금입사초문화형접시(고려시대), 금동잔탁(고려시대)
옛 공예
공예란 사람이 생활하는데 필요한 여러가지 용품을 주변의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제작하기 시작하면서 비롯되었다. 일반적으로 생활의 편리함을 도모하기 위해 고안된 여러가지 물건들을 모두 포함하므로 역사가 매우 길며 분류기준에 따라 그 종류도 다양하다. 재료에 따라 금속공예.돌공예.목공예.칠공예.죽공예.종이공예.가죽공예.도자공예.밀초공예.유리공예 등으로 나눌 수 있으며, 수요계층과 사용처에 따라 종교용품, 왕실용품, 사치품, 민예품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따라서 공예품은 그 민족의 오낸 역사와 더불어 생활터전이 되어온 자연환경과 주거환경, 종교, 생활철학에 따른 민족의 정서가 빚은 고유한 아름다움이 드러나 있다. 우리나라의 공에품에는 각 시대의 특징이 녹아 있다. 신석기시대에 만들어진 빗살무늬토기, 고운무늬가 새겨진 청동기시대의 거울 등을 통해 당시의 발달된 기술과 미감을 엿 볼 수 있다. 고구려.백제.신라.가야의 금관과 금제 귀걸이 등에서는 정교한 금은 세공기술이 돋보이며, 고려의 청자, 담백한 조선백자, 분청사기 등의 도자공예품은 세계도자사에서도 그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다. 청렴한 선비문화가 그 주축이었던 조선시대에는 간결하고 쾌적한 목공가구들과 화려하면서도 운치 있는 나전칠기 등이 조선시대의 아름다움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공예품은 각 시대마다의 이념과 기술, 에술성이 담겨 있으며, 여기에 실용성까지 겸비하여 발전되어 왔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금동좌불상(고려시대)
동경(고려시대)
명문금고(고려시대)
금고(金鼓), 불교 의식 용품으로 금속으로 만든 타악기의 하나이다. 절에서 대중을 불러 모으거나 급한 일을 알리는데 사용한다. 얇은 북과 같은 형태로서 세 개의 고리가 있어 달아맬 수 있게 되어 있다. 표면은 동심원이 여러겹으로 새겨져 있고 중앙에는 연화문이 배치되어 있다. 고려시대에 주조된 이 금고의 측면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으며, 고려시대에 제작된 금고 중 명문이 있다고 알려진 금고는 50여기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고는 865년(신라 경문왕5)에 제작된 금고이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금고는 널리 사용되었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불교조각
불교조각은 불교도들이 예배대상인 부처와 보살의 모습을 돌과 나무 등을 이용하여 형상화한 것을 말한다. 부처는 본래 모니를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대승불교의 영향으로 비로자나불(진리의 빛을 형상화한 부처), 아미타불(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을 설한다는 부처), 약사불(중생들이 모든 질병을 치유해주는 부처) 등의 개념이 형성되어 다양한 불상이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는 기원 후 4세기 경 중국으로부터 불교가 전래되면서 불상도 함께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초기에는 중국의 것을 단순히 모방하는 수준이었으나, 점차 우리나라 특유의 조형감각이 돋보이는 불상을 제작하여 <서산 마애삼존불>, <석굴암 본존불>과 같은 걸작이 탄생하게 되었다. 한편 보살은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일제의 중생을 구하려 애쓰는 자를 일컫는 것으로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기 이전의 석가모니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불상과 마찬가지로 보살상도 큰 공덕을 쌓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대표적으로 석가모니불을 보조하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아미타불을 보좌하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 그리고 미륵보살과 지장보살이 있다. 그중에서도 관음보살과 미륵보살은 모든 고통으로부터 중생을 구제하고 복을 가져다 주는 존재로 믿어져 대중에게 가장 친근한 보살로 신앙되어 왔다. 일반적으로 보살상은 불상과 달리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몸에는 화려한 장신구를 두른 모습으로 표현된다. 그 외에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으로서 사천왕, 팔부중 등도 조각으로 다수 제작되었다.
옥구슬(삼국시대)
옥기(玉器, Jade)
옥으로 만든 장신구로, 옛사람들은 옥을 천지의 정수이며 음양에 있어 지극히 순결한 것이라 생각하고 귀하게 여겼다. 옥의 원석을 갈고 다듬어 작은 구멍을 뚫으면 구슬이 되고, 이 구슬을 꿰어 달아 길이가 목에 두르는데 알맞으면 목걸이가 되고, 가슴까지 걸치면 가슴걸이, 손가락에 끼우면 반지, 팔목에 끼우면 팔찌가 된다. 그리고 팔에 끼우면 완천이 된다. 옥은 형태에 따라 구슬, 대롱옥, 둥근옥, 굽은옥 등으로 분류되며, 옥에 사용되는 물질에는 석제, 유리, 마노, 수정, 호박, 비취, 황옥 등이 있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유리구슬(삼국시대),
유리구슬(Glass Bead)
유리로 만든 장식용 구슬로, 삼국시대 비금속 장식구를 대표한다. 한국의 고대 유리구슬은 형태.크기.제작기법.용도.색 이외에도 화학 조성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형태상으로는 둥근 구슬, 굽은 구슬 등을 기본으로 변형하여 만든 각형 구슬, 대추형 구슬, 참외형 또는 메론형 구슬, 꽃잎형 구슬, 연주형 구슬, 코일형 구슬 등이 있으며 구슬 표면에 나타난 장식적 무늬에 따라 다른 색상의 줄무늬를 돌린 연리문구슬, 점무늬로 동심원을 그린 청령옥, 유리 표면에 사람 얼굴 등 어떤 형상을 나타낸 모자이크장식 구슬, 투명유리 내부에 얇은 금박을 입힌 금박구슬이 있다. 또한 크기가 아주 작은 구슬들을 소옥이라고 분류하기도 한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곱은 옥장식 목걸이(삼국시대),
곱은옥(Curved Jade)
보통 ‘C’자형으로 만곡한 몸체의 한쪽에 구멍을 뚫어서 매달게 되어 있는 치레걸이로, 형태상 ‘C’자형, 반원형, 반월형 등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곱은옥이라고 한다. 청동기시대 곱은옥의 재료는 대부분 천하석이지만, 철기시대 이후에는 수정, 삼국시대에는 유리 등의 재질로 변화한다. 곱은옥의 사용방법은 유적에서의 출토상태를 고려하여 볼 때 대롱옥과 반월형 곱은옥이 세트를 이루어 목걸이가 되며, 이때 곱은옥은 펜던트의 역할이다. 반면 곱은옥이 귀걸이로 이용된 듯 출토되는 예도 있다. 이 외에도 대롱옥과 연결된 목걸이나 머리장식의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대롱옥
대롱옥
원통의 대롱과 같은 형태로, 길이 방향의 중앙에 구멍을 뚫어 연결해서 사용하는 치레걸이이다. 재질은 대부분 벽옥이지만, 응회암과 같은 돌을 이용하여 만든 것과 흙으로 만든 것도 있다. 옥구슬 중에는 가장 먼저 발생한 것으로, 대롱옥은 고인돌이나 돌널무덤 등 무덤에서 주로 출토되는데, 대체로 목걸이로 이용된 것으로 보이나, 숫자가 적은 경우는 귀걸이 등 다른 치레걸이로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곱은옥 등 다른 형태의 옥과 결합되어 세트를 이루기도 한다. 무덤에서 출토되는 경우 무덤의 외곽이나 상부 등에서 출토되는 것을은 장송의례와 같은 매장의례에 이용된 것들로 판단된다. 아직 벽옥제 대롱옥을 제작한 흔적은 어느 유적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은장도(조선시대), 노리개(조선시대)
옥기의 역사
구석기시대에는 옥제품을 비롯한 장신구가 보이지 않으나 신석기시대 이후에는 옥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신석기시대에는 주로 점판암제, 곱돌제, 대리석제 등 보통의 돌을 사용하고 있지만 비취제나 흰색 옥돌, 벽옥제도 소량으로 사용되었다. 청동기시대에는 굽은옥, 대롱옥, 구슬 등이 사용되었는데 이들의 재료는 천하석, 벽옥, 유리 등으로 고인돌이나 돌널무덤에서 출토된다. 철기시대 옥의 형태는 정형화된 굽은옥, 6면체로 정교하게 다듬은 여러면옥, 주산알 모양의 옥과 구슬이 있다. 삼국시대에 이르면 옥은 정형화되고 다양한 형태가 나타난다. 목걸이에 사용된 옥의 종류는 둥근옥, 여러면옥, 대롱옥, 백옥, 굽은옥 등이 있다. 삼국시대의 옥이 다양해지는 것은 중국 옥문화의 영향으로 해석된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청자상감연당초문매병(고려시대), 청자음각모란문장경병(고려시대), 청자상감국화문소병(고려시대)
청자상감쌍어문대접(고려시대), 청자상감운학문대접(고려시대)
청자상감운학문완(고려시대), 청자음각연당초문잔탁(고려시대)
청자흑백상감류문소병(고려시대), 청자상감연판문호(고려시대), 분청사기귀얄문편호(조선시대)
청자상감국화문접시(고려시대)
고려청자
우리나라의 청자는 백토로 형체를 만들어 말린 후 섭씨 700~800도에서 한번 굽고, 그 위에 석회질의 유약을 입혀 1,300도 정도의 고온에서 구워내는 자기의 일종이다. 그릇을 두 번 구우면서 태토의 색이 흐린 회색이 되기 때문에 청자의 색은 회색바탕에 비취색 유약이 입혀지게 되어 이를 비취색, 곧 비색이라고 부른다. 고려시대에 접어들어 자기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정치.경제.문화 등 사회 전분야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일대 사건이었다. 초기에는 중국의 월주요 청자의 영향을 받았지만 차츰 고려청자만의 특색있는 형태와 무늬를 갖추게 되었다. 특히 상감 기법의 발달은 고려청자의 독창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분청사기인화문대접(조선시대), 분청사기인화문접시(조선시대), 청자화형접시(고려시대)
백자호(조선시대), 백자주병(조선시대), 백자호(조선시대)
백자자라병(조선시대), 백자편병(조선시대), 흑유어문편병(조선시대)
백자호(조선시대)
백자상감철화연당문초문발(조선시대), 백자음각연판문꽈리형연적(조선시대), 백자합(조선시대)
백자명기인형(조선시대)
백자명기소호(조선시대)
백자좌불(고려시대)
청화백자운용문호(조선시대)
청화백자운용문병(조선시대), 청화백자운용문병(조선시대)
청화백자어문대야(조선시대), 청화백자수복문합(조선시대)
청화백자목단문호(조선시대), 청화백자봉황문호(조선시대), 청화백자수자문소호(조선시대)
청화백자박쥐문호(조선시대), 청화백자칠보문호(조선시대)
청화백자국화문호(조선시대), 청화백자봉황문소호(조선시대)
조선백자
조선시대에는 분청사기와 백자가 도자기문화에서 중심을 이루었다. 분청사기는 비교적 짧은 기간동안 제작되었으나 백자의 경우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만들어졌고 사용되어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도자기라고 할 수 있다. 분청사기는 조선전기 약 150년간의 짧은 기간동안 만들어졌던 그릇으로 미술사학자인 고유섭선생은 회청색의 바탕흙에 백토를 바르고 유약을 씌워서 구워냈다고하여 “분장회청사기”라고 불렀으며 그 줄임말이 분청사기이다. 청자에서 사용되었던 대부분의 기형을 그대로 사용했으며, 표면에 백토를 입히는 여러가지 방식에 따라서 다양한 장식효과를 보여준다. 이러한 분청사기는 1467~1468년 경기도 광주에서 관요가 설치된 이후 국가에서 필요한 그릇을 백자로 제작하면서 지방 분청사기 가마들은 점차 지방 관청과 일반 백성을 위한 도자기를 만들게 되었다. 이 때문에 분청사기의 질은 떨어진 반면 백자의 생산량이 늘어났고,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이전인 16세기 중엽 분장분청사기를 끝으로 백자에 흡수되었다. 분청사기를 제작했던 가마터로 공주 학봉리를 중심으로 한 계룡산지역과 광주 충효동을 중심으로 한 무등산 지역이 가장 대표적이다. 조선시대의 도자를 대표하는 백자는 청자제작에 사용된 흙보다 순도가 높으며 안정된 흙을 사용했다. 백자를 굽는 온도도 청자의 경우 1280도 가량이지만 백자는 1300도 정도가 일반적이다. 백자는 세종때부터 왕이 사용하는 그릇인 어기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조선왕실에서 많은 양의 백자를 필요로 했다. 때문에 대궐 내의 식사와 잔치를 담당하던 사옹원에서 백자의 제작을 책임지는 관청이 되어, 도자기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분원’을 만들어 따로 관리하였다. 경기도 광주에 설치된 분원이 왕실과 중앙 관처용 백자의 제작을 담당했던 관요의 역할을 하게 되었고, 이러한 관요의 설치와 운영에 따라 백자는 발전하고 쇠퇴하기도 하였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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