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은 1970년대 서울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한 이후 그 터만 남았던 것을 발굴.조사를 거쳐 전각 일부를 복원하였다. 조선후기 많은 전각들이 있던 넓은 경희궁 권역에는 서울고 이전 이후 원래의 모습을 찾기보다는 도심에 있던 위치적인 장점때문에 많은 공공기관들이 들어설려고 했으며, 그 중 서울시교육청이 경희궁 서쪽 언덕에 이전해 왔으며, 서울역사박물관을 비롯하여 일부 공공기관이 자리잡게 되었다.
1980년대 발굴.조사 이후 경희궁은 정전인 숭정전을 비롯하여 자정전, 태령전 등 일부 전각들과 금천교만이 복원되었으며, 신라호텔 정문으로 사용했던 흥화문은 원래 자리가 아닌 숭정전 남쪽 개양문에 있던 자리로 옮겨져 간략하게 궁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복원된 건물 외 옛 숭정전 건물은 동국대에 있는 사찰인 정각원 불전으로 지금도 사용하고 있으며, 경희궁 주변에는 옛 경희궁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반쪽자리 경희궁 발굴과 복원
서울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한 후 1978년 경희궁지를 매입한 현대그룹은 이곳에 사옥을 조성하려 했다. 그러나 공원녹지를 확보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자 1980년 서울시는 이를 재매입하였고, 이때 경희궁터는 사적 271호로 지정되었다. 이 부지는 1986년에 경희궁지 사적공원 조성과 시립박물관 건립지로 모색된 이래 발굴조사가 여러 차례 이뤄졌다. 그 결과를 토대로 숭정전, 자정전, 태령전, 금천교 등이 복원되어 2002년 시민에게 공개되었다. 그러나 서궐도안에 나타난 70여 개 주요 전각 가운데 단 3개만 복원되었고 흥화문만이 제 자리를 찾았을 뿐이다.
경희궁 복원 전경, 1980년대
경희궁,미완의 과제
빽빽한 도심 속에 서울고등학교가 떠난 빈터가 생기자 이곳은 부지를 확보하려는 공공기관들의 각축장이 됐다. 서울특별시 교육위원회가 경희궁 영역의 서쪽 부지를 얻어 1981년에 이전해 왔고, 서울시립미술관은 88서울올림픽 개막에 맞춰 임시 사용할 목적으로 구 서울고 본관을 개.보수했다. 1995년에는 서울 정도 6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관이 건축돼 현재 시립미술관 경희궁 분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2002년에는 경희궁 동궁 영역에 서울역사박물관이 건립.개관했다. 현재 대형 건물로 둘러싸인 경희궁은 한껏 움츠린 채 겨우 자그마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1. 정비.복원을 위한 경희궁지 제2차 발굴조사보고서 外, 2. 시립서울박물관(가칭) 전시기본계획, 1995년,
3. 경희궁지 내 서울시립박물관 건립검토 회신 – 부지현황, 1985년
4. 경희궁지내 서울시립박물관 건립검토 회신(복제), 1985년,
경희궁지내 서울시립박물관 건립에 관하여 검토한 문서이다. 경희궁의 유적발굴을 철저히 조사한 후 박물관 건축을 진행하도록 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5. 토지대장 및 지적도 사본 송부, 1980년, 경희궁지의 토지매각 및 이전관계를 설명하는 토지대장 자료이다. 6, 신라호텔 정문으로 사용되던 흥화문을 1974년 서울시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하는 문서이다
경희궁은 살아있다.
현재 경희궁의 몇개 전각이 복원되어 개방되고 있지만, ‘경희궁’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낯설다. 실제 궁궐의 모습은 사라지고 터만 남았다는 뜻에서 ‘경희궁지’라는 이름으로 사적에 등록되었을 뿐이다. 서울시교육청과 서울역사박물관 및 동쪽의 주택가를 아우르며 큰 권역을 형성했던 경희궁의원형을 상상하기란 이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경희궁은 우리 주변 곳곳에 살아 있다. 경희궁의 정문이었던 흥화문은 비록 그 위치가 이전되었으나 현재 복원된 경희궁의 정문으로 또다시 쓰인다. 정전이었던 숭정전은 동국대학교 정각원 건물로 사용된다. 황학정은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채 사직단 주변으로 옮겨갔다. 또한 궁장의 일부나 돌계단, 영렬천 등이 경희궁 주변의 주택가 및 길가에 남아 있어 옛 경희궁의 위용을 추정케 한다.
폐허가 된 숭정전, 1890년대, 프랑스국립기메박물관
뽕나무로 덮인 궁궐, 1898년, 프랑스
서울고등학교, 1970년대
경희궁 전경, 1890년대.
고종대 경복궁 중건 과정에 대부분의 전각이 헐려서 당시에도 숭정전을 비롯한 일부 전각만 남아 있다.
숭정전이 보이는 경희궁 전경, 1890년대
경희궁 숭정전, 1909년
경희궁 흥화문, 1909년
조선총독부중학교, 1910년대
흥화문과 경희궁, 1890년대
복원된 경희궁, 2015년
현재의 경희궁
경희궁의 마지막을 지킨 건물들
경성중학교가 들어설 시기에 경희궁에는 숭ㅈ어전, 흥화문, 회상전, 흥정당, 황학정 등 5개의 건물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매국 관사를 짓기 위해 황학정이 사직단 북쪽으로 옮겨간 것을 시작으로, 경성중학교 교실로 사용된 숭정전과 임시 소학교 교원양성소 교실로 이용된 회상전과 함께 교원양성소 교실과 기숙사로 쓰인 흥정당도 1928년 장충동에 있는 광운사로 이전되었다. 마지막으로 흥화문은 1932년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사찰인 박문사의 정문으로 옮겨져서 야주개를 밝게 비추던 현판도 ‘경춘문’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흥정당, 1928년 광운사 이전, 1950년대 동북중학교 시절 변형된 흥정당.
흥화문, 1933년 박문사로 이전.
최근까지 신라호텔 정문으로 사용하다가 경희궁을 복원할 때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이곳 또한 원래 있던 곳이 아니고 개양문이 있던 자리이다.
숭정전(1975년), 1926년 일본계 사찰로 이전
황학정, 1922년 사직단 북쪽 이전.
1898년 경희궁 회상전 북쪽에 궁술 연습을 위해 지은 사정이다. 황학정은 1913년 경희궁이 헐리고 1922년 총독부 전매국 관사가 황학정 자리에 지어지면서 현재의 사직동으로 옮겨졌다.
잔존하는 경희궁의 현판들,
경희궁 전각들에 걸려 있던 각종 현판들이다. 현재는 고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경희궁 발굴유물(1985년, 1987년) 중 도자기류
건축부재들
두개의 숭정전
현재 경희궁 숭정전의 건물은 두개다. 경희궁 권역에 새롭게 복원된 숭정전과 동국대학교 정각원의 법전으로 사용되고 있는 본래의 숭정전이다. 숭정전은 1926년 일본계 사찰인 조동종 조계사에 매각됐다가 1976년에 동국대학교 내 현재의 자리로 이전.복원됐다. 또한 숭정전의 답도 2개 가운데 하나는복원된 숭정전, 다른 하나는 정각원에 놓여 있는 등 반반씩 나누어져 있다. 어좌의 닫집은 동국대학교 박물관의불상 위 천장에 부착돼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동국대 정각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숭정전 건물.
동국대박물관 불상위에 있는 닫집
1, 숭정전 현판, 2. 숭정전 어탑 부재, 3. 숭정전 토수, 4. 숭정전 봉황문 답도(탁본), 5. 숭정전 공작문 답도(탁본),
복원된 숭정전.
경희궁지에 남아 있는 옛 경희궁 흔적들
경희궁 흔적들.
새롭게 밝혀지는 경희궁의 흔적들
지금의 성곡미술관 자리는 경희궁의 영취정과 춘화정이 있던 곳으로 경치가 좋아 왕들이 이곳에서 꽃구경을 즐겼다. 특히 숙종은 이곳의 정취를 시로 짓기도 했고, 아름다운 이곳을 ‘반월형 석조 연못’으로 장식하기도 했다. 이 석조는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켰으나 경희궁의 것으로 인식되지 못하다가 최근에야 제 기억을 되찾게 됐다. 또 서울고등학교의 상징인 돌거북은 경희궁 금천교를 오랫동안 지켜온 것이며, 경희궁 인근 주택가에서 발견된 괴석도 궁정에서 사용되던 기이한 모양의 돌이다. 그러나 흥화문과 함께 옮겨간 해치모양의 석물과 개양문,흥정당의 행방은 여전히 찾을 길이 없다.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사라진 것을 찾는 일이 더 시급한 과제일 것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누각 위의 봄바람 좋아
섬돌 가에 반달같은 연못 있네.
앉아 물고기 뛰어 노는 곳을 보니
조용히 려천(戾天) 시를 읊네
– 「춘화정에서 반달연못을 바라보며」 숙종 –
반월형 석조, 복제, 숙종대 추정,
이 석조 연지는 통돌(全石)로 안팎을 반월형으로 가공하고 안쪽에는 두마리 잉어가 여의주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조각하고, 연지 상단 테두리에는 세마리의 서수(瑞獸)를 조각했다. 서수상 아래에는 구름 형태의 모란문이 조각되어 있으며, 서수의 자세와 표현방법, 문양과 조각기법을 통해 춘화정이 건립된 1704년 경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다. 현재 이 유물은 영취정과 춘화정 자리에 있는 성곡미술관 연못에 설치되어 있으며, 전시를 준비 현장조사 과정에서 경희궁의 것으로 새롭게 밝혀진 것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어제망관악시(御製望冠嶽詩),
경희궁 영취정에 걸렸던 현판으로 숙종이 영취정에서 관악산을 바라보고 감회를 적은 칠언절구이다.
“좌의 명산이 富林(지금의 과천)에 위치해 있는데
머리 들어 남쪽 바라보니 흰구름이 깊구나.
때때로 북암유상기를 읽으니 이 몸이 관악산에
올라간 듯 하다.”
괴석(塊石),
현재 경희궁 흥화문 남쪽 주택가 음식점에서 발견된 괴석으로 모란문이 들어간 석함에 올려져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되었다.
돌거북(石龜),
서울고등학교 본관 앞에 있는 돌거북이다. 학교가 경희궁지에 있었을때부터 본관 입구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것은 창덕궁 금천교 하단에 놓인 돌거북의 형태와 유사하며, 현재도 복원된 경희궁 금천교에는 돌거북의 받침돌이 남아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입구 흥화문이 있던 자리 앞에 복원해 놓은 금천교.
개양문
경희궁의 나쪽 문, 지금의 흥화문이 놓인 자리는 원래 개양문이 있던 곳이다. 개양문은 서본원사, 경성방송국을 떠돌다 성균관대학교 정문으로 사용되었고, 1970년대 신라호텔로 매각되었다고 구전되나 지금은 그 행방을 찾을 수 없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흥화문 석물
흥화문이 박문사 정문으로 헐려나갈 때 같이 옮겨간 것으로 추정되는 석물이다. 흥화문 철거 기사 오른쪽 하단의 석물과 박문사 정문으로 옮겨진 후의 왼쪽 해태상(사자상)은 같은 것으로 여겨지며, 1959년까지 기록에는 현존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 이후로는 행방이 묘연하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출처>
1. 서울역사박물관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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