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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계성 고분군(사적), 창녕박물관으로 옮겨진 계성고분이전복원관

경남 창녕군 교리 창녕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는 계성고분이전복원관이다. 1998년 발굴.조사된 계성고분군 II지구 1호분을 이전.복원한 것이다. 이 고분은 창녕 계성고분군에 지역에서 해발 76 m 구릉 정상부에 있던 대형봉토석식무덤으로 봉토가 12방향으로 구획되어 조성되어 있었다. 발굴.조사 결과 만흔 유물들이 도굴되었지만 금제큰고리귀걸 등 장신구, 철제도끼 등 철기와 제사 행위와 관련된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도로공사 과정에서 이곳으로 이전된 것이지만 창녕 일대 비화가야 지배층 무덤 내부 구조와 조성방법 등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계성고분군은 삼국시대 가야 지배층의 무덤이 밀집해 있는 유적으로 창녕군 계성리, 계남리, 명리, 사리 등에 걸쳐 있다. 금제큰고리귀걸이같은 장신구를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특히 글자가 새겨진 토기가 출토되었다.

<창녕 박물관 야외에 있는 계성고분 이전복원관>

<창녕 계성고분군(사적)>

<창녕 계성 고분군 분포(위성사진)>

<내부전시공간>

도로공사로 원래 위치에 있던 봉분을 현재의 위치로 옯겨 놓았다. 12방향으로 구획하여 흙으로 쌓은 성토방법과 석실 내부를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II지구 1호분>

II지구 1호분
이전.복원 대상인 II지구 1호분은 가장 높은 해발 76 m 지점에 조성되어 있는 중심고분으로 대형 봉분을 가진 횡구식석실분입니다. 조사당시 봉토 정상부는 도굴로 인하여 석실의 상부 석벽과 뚜껑돌 일부가 훼손된 상태였습니다. 석실이 크기는 길이 396 cm, 너비 230 cm, 높이 200 cm이며 봉분을 제거하고 토층상태를 확인한 결과 모두 5차에 걸쳐 매장행위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묘도는 석실의 장축방향과 일직선상으로 구획하고 바닥에는 소형 할석이 깔려 있었으며, 석실벽면은 긴벽의 아래 3~4단은 수직으로 쌓아 올렸고, 그 위로는 내부로 경사지게 맞조려서 축조한 맞조림식 구조를 하고 있음이 확인되었습다. 또한 석실 벽면의 돌 사이 틈새를 막기 위하여 논흙과 같은 점토질의 흙에 볏짚과 같은 것을 함께 섞어 벽면에 발라서 마무리한 흔적이 일부 벽면에 남아 있다. 석실바닥은 대부분 도굴로 인해 훼손이 되었으나, 1차 시상대의 상부에는 단단한 점토로 덮혀 있어 훼손을 면할 수 있었으며, 2,3차 시상대는 바닥에 자갈을 깐 반면 1차 시상대는 넓은 돌을 깔고 그 사이에 자갈을 채워 바닥 면을 편평하게 하였습니다. (안내문, 창녕박물관, 2010년)

봉분은 12방향으로 나누어 다른 성질의 흙으로 쌓았다. 영남지역 여러 곳에서 이런 방식의 봉분들이 확인되고 있다.

<봉분>

봉토의 분할성토
II지구 1호분을 발굴조사한 결과 석실의 중앙부를 중심으로 하여 방사선상으로 12방향으로 나누어 토질의 차이가 있는 흙을 이용하여, 봉토를 조성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봉토 축성방법은 1967년 문화재관리국에서 발굴조사한 창녕 계성고분군과 1992년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한 창녕 교동고분군 1호.3호분에서도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봉분의 분할성토방법은 성주와 대구, 울산 등의 영남지방에서 조금씩 확인되고 있으며 앞으로의 발굴조사에도 발견될 가능성이 높아 학계에서의 연구과제가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습니다. (안내문, 창녕박물관, 2010년)

<위쪽에서 본 석실 내부.>

<석실 내부>

<금제큰고리귀걸이, 김해박물관. 이 무덤에서 출토된 대표적인 유물이다.>

<유리제목걸이, 은제 허리띠장식, 창녕박물관>

<유리장식 은제모자 소도자(복원품), 계성 2지구 1호분, 창년박물관>

<행엽, 금동제 귀설이, 계성 2지구 1호분, 창녕박물관>

<은제귀걸이, 은제반지, 계성 2지구 1호분, 창녕박물관>

<삼엽문환두대도, 계성 2지구 1호분, 창녕박물관>

<청동합, 계성 2지구 1호분, 창녕박물관>

출토유물
II지구 1호분에서는 도굴로 인해 많은 유물이 결실되고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된 유물은 모두 20여점으로 크게 토기와 철기, 장신구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토기는 굽있는 주발 등 7점이 봉분 주위에서 출토되어 제사행위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철기는 석실 내부에서 출토되었는데 물미, 철제도끼 등 5점이 출토되었습니다. 장신구는 금속제와 유리제로 나눌 수 있는데 금속제는 금제큰고리귀걸이, 은제팔찌 등 9점이 출토되었고 유리제는 유리제목걸이, 유리제팔찌장식이 출토되었습니다. 출토유물을 통해서 당시 문화수준 및 피장자의 신분 등을 짐작할 수 있는데, 무엇보다 금제큰고리귀걸이는 금에다 유리를 장식한 것으로 당시 금가공기술이 매우 높은 수준이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로 국내에 출토 예가 드문 것입니다. 또한 함께 출토된 은제팔찌와 은제허리띠장식구, 유리제목걸이 등은 양산부부총의 유물조합관계와 비교될 수 있으며, 귀걸이와 팔찌, 허리띠장식 등을 한 것으로 보아 피장자가 여성이라는 것과 신분이 상당하였을 것이라는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안내문, 창녕박물관, 2009년)

계성고분군은 창녕군 계성면 계성리, 계남리, 명리, 사리에 걸쳐 있는 비화가야 고분군으로 중부내륙고속도로와 5번국도 양쪽 구릉에 분포하고 있다.

<계성고분군(도로공사전)>

<박물관에 옮겨진 1호분이 있던 계성고분군 II지구 전경.>

계성고분군
계성고분군은 가야 및 삼국시대 고분이 밀집분포하고 있는 유적으로 창녕군 계성면 계성리, 계남리, 명리, 사리에 걸친 고분군입니다. 1967년 첫 조사가 시작된 이래 199년까지 5차에 걸쳐 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최근의 조사는 1998년부터 1999년까지 호암미술관과 경남고고학연구소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발굴조사구역은 해발 682 m인 영축산의 서쪽능선 하단부분에 형성된 낮은 구릉면을 따라 남쪽에서부터 I지구가 시작되고 북쪽 끝이 IV지구이며 구릉을 중심으로 총 4개 지구로 나누어 집니다. 발굴조사를 통하여 금제큰고리귀걸이, 은제팔찌 등을 비롯한 장신구와 마구, 무구, 농공구, 기와, 자기 등의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특히 「李」, 「大」 등의 명문이 새겨진 토기가 출토되어 이 지역의 삼국시대 사회문화상과 매장풍습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안내문, 창녕박물관, 2009년)

<두귀달린 목긴잔, 계남고분, 창녕박물관>

<파수부유대소호, 계남고분, 창녕박물관>

<인화문 유개호(계성B – 3호분), 주구호(계남고분), 창녕박물관>

<인화문병, 계성 C – 1호분. 창녕박물관>


<삼지창, 계성고분, 창녕박물관>

<쇠도끼, 계남리 1호분, 창녕박물관>

<가락바퀴, 계남고분군, 창녕박물관>

<유개합, 계성B -1호분, 창녕박물관>

<덩이쇠, 계남리 1호분, 창녕박물관>


<단경호, 계남리 1호분, 창녕박물관>

大」자 새겨진 그릇, 비화가야 지역으로 신라문화가 확산되었음을 보여 주는 유물이다.>

이전.복원사업의 경과와 의의
국도 5호선 확장구간에 포함되어 1998년 호암미술관에 의해 발굴 조사된 계성고분군의 II지구 1호분은 영축산에서 서쪽으로 뻗어내린 구릉의 정상부에 자리잡은 대형봉토석실무덤입니다. 이 고분은 이미 도굴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금제큰고리귀걸이 등 중요한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고, 또한 봉토가 방사선사상의 12방향으로 구획되어 조성된 특징이 있어 학술적 가치가 대단히 높은 것으로 평가되었습니다. 그 고고학적 중요성을 감안하여 우리 창녕군은 창녕읍 송현리 49-3번지 1679 ㎡의 부지에 복원관을 건립하여 II지구 1호분을 이전.복원하고 영구보존하기로 영구보존하기로 하였으며 이를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게 되었습다. 이번 사업으로 멸실위기에 있던 중요문화유적이 공간적 위치만 달리하여 보호를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근의 교동고분군과 더불어 지역의 고대사를 밝혀줄 중요한 여가적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안내문, 창녕군청, 2010년)

<출처>

  1. 안내문, 창녕박물관, 2010년
  2. 안내문, 김해박물관, 2012년
  3.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4. 계성고분군 보고서, 창녕군, 201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