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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특별전, "한국의 도교문화"] 함께 하는 도교 – 도교와 유교, 불교 그리고 동학

1. 행복으로 가는길2. 도교의 신들3. 팔선이야기4. 신선세계를 꿈꾸다5. 신선이 되는 법6. 함께하는 도교

도교(道敎)는 유교와 함께 중국을 대표하는 토착종교이다. 중국 전통 신선사상과 토착신앙에서 유래하여 후한과 남북조시대에 불교의 영향을 받아 경전과 교리를 갖춘 종교로서 모습을 갖추었다. 우리나라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제천의식과 일맥상통한 점이 많아 쉽게 받아들여졌다. 도교는 종교로서 모습을 갖추던 때부터 불교의 영향을 받는 등 다른 종교와 상호 형향을 주고 받았다.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전각(殿閣) 중 산신을 모신 산신각(山神閣), 홀로 수행을 통해 도를 깨친 성인을 모신 독성각(獨聖閣), 북두칠성을 모신 칠성각(七星閣)은 토착신앙이자 도교의 성격을 많이 갖고 있는 곳이다. 도교의 경전이나 제례의식 또한 남북조시대 불교의 것을 참조하여 만들어졌다. 도교의 지위가 낮아진 조선시대에도 유학자들은 개인적인 수양의 방편으로 도교의 양생술에 관심이 많았으며, 생육신 중 한명인 김시습은 불교와 도교에 정통하여 도교적인 관점에서 유가의 사상을 해석하기도 하였다. 구한말 서양의 학문과 종교 들어오면서 이에 대응하는 동학이 발생하였다. 동학은 기존의 유교와 불교의 가치에 민간신앙과 도교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창제된 종교로 도교적인 성격이 강했다. 또한 민간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전래된 삼국지 영웅 관우를 숭배하는 관제신앙이 크게 유행하였다.

구운몽도(九雲夢圖), 조선,

소설 구운몽의 내용을 그린 그림으로 전통적인 도석인물화와 비슷하다.

소설 『구운몽』의 내용을 그린 그림이다. 각 화면의 상단에 소설의 내용을 쓰고, 하단에 그림을 그렸다. 성진이 팔선녀를 만나는 장면에서부터 백능파와 양소유가 함께 있는 장면까지 있는데, 중요한 내용이 빠져 있어서 원래는 10폭으로 제작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출처:중앙박물관>

성명규지(性命奎旨), 중국 명,

도교의 내단 수련 비법을 집대성하여 압축 설명한 명나라 책이다. 지은이와 간행연도를 알 수 없다. 성명규지란 본래 이름인 ‘성명쌍수만수규지(性命雙修萬壽奎旨)’를 줄인 말로서, 마음과 몸을 함께 수련한다는 성명쌍수(性命雙修)의 방법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편마다 그림을 그려 넣고 내단 수련의 복잡하고 미묘한 과정을 체계있게 정리하여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구운몽(九雲夢), 조선 1900년,

조선 숙종 때 김만중이 지은 소설이다. 육관대사(六觀大師)의 제자이던 성진은 팔선녀를 만난 후 추방되어 양소유라는 이름으로 환생한다. 이후 팔선녀의 후신인 8명의 여자들을 차례로 만나 아내로 삼고 영화롭게 살다가 다시 불문에 귀의하여 극락세계로 돌아간다는 내용이다. 소설의 소재나 모티프 면에서 유교와 불교, 도교의 요소들이 조화를 이룬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호계삼소도(虎溪三笑途),

남북조시대 도연명과 관련된 일화를 그린 그림으로 고사인물화이다.

중국 육조시대의 고승 혜원(慧遠)과 시인 도연명(陶淵明), 도사 육수정(陸修精)의 고사를 그린 그림이다. 혜원이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에서 수행할 때 절 앞의 호계(虎溪)를 넘어가지 않았는데, 어느날 찾아 온 도연명과 육수정을 배웅하며 담소하다가 호랑이의 울음을 듣고서야 다리를 건넜음을 깨닫고 함께 웃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유.불.도 삼교의 회통을 상징하는 뜻에서 회화의 소재로 많이 사용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도교에 심취한 왕효의 묘지명,

고려 15대 숙종의 다섯째 아들 왕효의 묘지명이다. 유교의 가르침 안에서 불교을 믿고 도교에도 조예가 깊었던 왕효의 정신세계를 잘 요약하고 있다. 『고려사』는 그가 1179년에 사망했다고 기록하였으나, 이 묘지명을 통해 그보다 8년 앞선 1161년에 노환으로 타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도교에 심취한 윤언민의 묘지명, 고려,

여진 정벌로 유명한 윤관의 막내아들 윤언민의 묘지명이다. 의술로 병자를 치료한 일, 노자를 사숙한 듯 푸른소를 타고 출퇴근한 일, 불교와 도교를 대표하는 인사들의 존경을 받은 일 등 그의 다채로운 정신세계를 포함한 여러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남화경주해(南華經註解), 박세당,

저명한 유학자였던 박세당의 도교에 대한 이해도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남화경』은 중국의 책 『장자』의 다른 이름으로 『남화진경』, 『장자남화경』이라고도 한다. 『도덕경』과 함께 고려 조선시대의 지식인들이 즐겨 읽던 대표적인 도가서(道家書)이다. 이 책은 중국 송나라의 임희일이 지은 『구해남화경』을 다시 베껴 쓴 것으로 보인다. 『구해남화경』은 『장자』의 입장이 유가(儒家) 경전의 뜻과 부합됨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해설서로 평가되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도덕경에 해석을 달아 펴낸 책(新註道德經), 박세당, 조선,

조선후기의 학자이자 문신인 박세당이 『도덕경』에 주석을 붙여서 펴낸 책이다. 유학자인 박세당은 『도덕경』이 비록 성인(공자)의 뜻에 부합하지는 않으나 세상에 행해지고 있는 이상 잘못된 점을 보고 넘길 수가 없어서 주해로서 바로잡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대도가 없어진 뒤에 인(仁)의 가치가 인정된다고 말한 노자는 그 근본을 빠뜨리지 않은 사람이라고 평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순언(醇言),이이,

이황과 함께 조선을 대효하는 석학인 이이 또한 도교에  대한 이해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조선중기의 성리학자 율곡 이이가 『도덕경』 중에서 유학의 뜻에 가까운 말 2,098언(言)을 가려 뽑아 풀이하고 토를 붙인 책이다. 성학(聖學), 즉 성리학에 해롭지 않은 말이라고 하여 순언이라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동학속의 도교
19세기 조선의 백성들은 정부와 지방 토호들의 수탈에다 전염병과 흉년으로 도탄에 빠져 있었다. 서학(西學)이라 불리는 천주교가 꾸준히 전파되는 한편에서, 성리학과 불교는 사회적 구실을 다하지 못하였다. 이런 현실을 고민하던 경주 출신 지식인 최제우는 1860년(철종11) 4월 상제(上帝)와 대화를 나누는 신비로운 종교적 체험을 하였고, 이를 계기로 서학에 맞선다는 뜻의 동학을 창립하였다. 동학에서는 사람이면 누구나 마음을 닦고 기운을 바르게 하면, 병이 낫게 되고 나아가 사회적으로는 도덕이 회복된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가르침을 펴기 우해 동학에서는 기존의 유교와 불교의 도덕과 가치에다 민간신앙과 도교적 요소를 가미하였다. 최제우의 신비체험 당시 상제가 신비스런 부적을 내려주며 불사약이라 했다는 점, 그 부적을 최재우가 불에 태워 마시자 병이 나았다는 점, 상제가 부적과 함께 주문을 내려 주면서 사람들에게 이를 가르치면 장생할 수 있다고 한 점 등은 모두 도교의 불사약과 부적, 주문에서 그 개념을 빌어 온 것이었다. 동학의 핵심적 가치나 도덕은 유교적이었다. 그러나 유교나 불교만으로는 굶주림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민중을 달래기 어렵다고 보고, 친숙하면서도 신비로운 도교적 요소를 가미하였던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동경대전(東經大全), 최제우, 조선,

동학의 1대 교주인 최제우가 지은 동학의 경전이다. 포덕문(布德文).논학문(論學問).수덕문(修德文).불연기연(不然其然)의 네 편으로 구성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용담유사(龍潭遺詞), 최제우, 조선,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가 1860년(철종11)에서 1863년에 걸쳐 지은 포교 가사집이다. 1881년 6월 충북 단양군 남면 천동 여규덕의 집에서 최시형에 의해 처음 간행된 후 목판본으로 다시 간행된 바 있다. 한문으로 된 『동경대전』과 함께 동학의 기본 경전이다. 최제우는 자신이 깨친 후천개벽사상을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따를 수 있도록 국문으로 쓰고, 가사의 형식을 빌려 표현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민간신앙과 도교
도교의 신들 중에는 중국 토착 신앙에서 유래한 것이 많은데, 그 중에는 우리 고유의 토착 신들과 상통하는 것들이 적지 않았다. 밤하늘의 별자리를 관찰하고 숭배하며, 삶의 터전이 되는 대지와 강, 산과 나무 등을 신성시하고, 마을이나 성곽, 가정을 지키는 신령이 있다고 믿는 종교 관념은 우리 조상들도 일찍부터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두칠성에서 유래한 칠성신(七星神), 성곽이나 마을을 수호하는 성황신(城隍神), 불을 수호하는 조왕신(竈王神)과 같은 도교의 신들이 한국에 들어와 토착 민간신앙과 무리없이 어우러지면서 점차 그 일부가 되어 간 것은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한편으로, 중국 무속(巫俗)에서 유래한 도교의 점복(占卜)과 부적(符籍)문화 역시 복을 구하고 액(厄)을 피하려는 한국 재래의 민간 신앙과 결합되면서 그 일부가 되어 갔다. 또한, 중국 고대의 무장 관우를 국가 수호신이자 민간의 재물신으로 숭배하는 신앙이 임진왜란 이후로 확산되면서 점차 무속화하였다. 19세기 후반 고종대에는 관우 신앙에 대한 한글전적들이 많이 간행되었고, 서울과 전주 등에 관우 사당이 새로 건립되기도 하였으나, 20세기에 들어 관우신앙은 점차 쇠퇴해 갔다. <출처:중앙박물관>

북두칠성
칠성도는 북두칠성과 하늘의 여러 별들을 그린 불화이다. 북두칠성인 칠성은 인간에게 가장 친근한 별자리 중의 하나로서 일찍부터 인간사를 주관하는 별로 신앙되었다. 불교에서는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하늘의 성신(星辰)이 복합적으로 망라되어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민간신앙과 도교에서도 북두칠성에 대한 신앙이 발전하여 관복을 입고 홀을 든 칠원성군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출처:중앙박물관>

북두칠성 공양문, 조선,

북두칠성에게 올리는 의식에 필요한 글들을 모은 책이다. 「칠성청(七星請)」, 「불설북두칠성연명경」, 칠성하강일, 칠성부(七星府) 등이 수록되어 있다. 책 말미에 1534년(중종29)에 안동 하가산 광흥사(壙興寺)에서 초간되었음을 밝히고 있는데, 이 책은 좋지 못한 인쇄 상태로 보아 그 후쇄본이 아닌가 한다. <출처:중앙박물관>

칠원성군을 그린 그림, 조선,

손에는 홀을 쥐고, 관복과 관모를 쓰고 서 있는 7구의 인물은 북두칠성을 도교적으로 의인화하여 묘사한 칠원성군(七元星君)이다. 칠원성군은 탐랑성군, 거문성군, 녹존성군, 문곡성군, 염정성군, 무곡성군, 파군성군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북두칠성이 인간의 길흉화복과 수명을 관장한다는 도교의 믿음에서 유래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북두칠성을 그린 그림,

북두칠성은 하늘을 상징하고 하늘이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신으로 무속에서도 오랫동안 모셔졌다. 고려시대 이규모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 노무편(老巫篇)에는 칠원성군 그림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는 등 고려시대부터 도교로부터 영향을 받은 북두칠성 그림이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밀양 성황신 손긍훈 상(城隍神), 조선,

경남 밀양 추화산의 성황사에 모시던 손긍훈의 신상이다. 원래 도교에서 성곽이나 도시의 수호신이던 성황신은 우리토착의 마을 공동체 신앙과 습합하여 점차 민간신앙화한 것으로 보인다. 손긍훈은 신라말 고려초 밀양을 지배하던 호족으로 추정되는 인물인데, 당시의 호족들은 지역의 통치자이자 공동체의 수호자로 인식되어 훗날 손긍훈처럼 지역 성황신으로 모셔지기도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관우신앙
소설 『삼국지연의』의 주인공으로 충의와 용맹의 상징인 관우, 관제 또는 관왕으로도 불리는 관우는 명대에 도교의 신으로 우뚝 섰다. 관우에 대한 신앙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사들에 의해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이후 조선의 왕들은 관왕묘(關王廟)를 건립하는 등 관우를 높이는 정책을 폈다. 특히 19세기 말 고종대에는 관우신앙과 관련된 서적을 다수 출판하는 등 관우에 대한 존승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국가 차원의 관우숭배는 1910년에 관왕묘 제사가 폐지되면서 끝을 맺었다. 민간에서도 임진왜란을 계기로 관우신앙이 퍼져 나갔다. 조선후기를 통해 무속화해 간 관우신앙에서 관우는 병을 다스리고 복을 내리며, 재물을 관장하는 영험한 신으로 받들어졌다. 민간의 관우신앙은 20세기초까지 지속되다가 쇠퇴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동묘치성병(東廟致誠甁)」을 새긴 병, 조선 19세기,

동관왕묘에서 치성을 드릴때 사용하던 백자병이다. 몸체 상단부에 돋을새김으로 ‘동묘치성병 경진삼월일’이라는 명문이 있어 이 백자병의 용도를 알 수 있다. 또한 이 유물의 제작기법과 기형을 고려해 보면 명문 중의 경진(庚辰)은 1820년(순조20)이거나 1880년으로 추정된다. <출처:중앙박물관>

황룡이 그려진 부채, 조선 19세기,

동관왕묘 정전 앞에서 4점의 황룡선(黃龍扇)이 발견되었다. 부채의 앞면에는 각각 한쌍의 용을 그려 넣었다. <출처:중앙박물관>

관우상.유비상.장비상, 조선 19세기,

동관왕묘 정전의 좌우 벽에는 여러개의 감실이 세워져 있다. 그 중 정전의 왼쪽벽에 배치된 목조 감실 중 한 감실에 관우를 비롯한 세 구의 조각상이 배치되어 있다. 이들 조각상은 모두 크기가 작은 목조상으로 주칠한 용상 위에 앉아 있는 의좌상이다. 모두 용머리를 장식한 용상 위에 앉아 있다. 용상의 답장에는 용무늬를 비롯한 각종 무늬를 장식한 최고급 화문석에 황실을 상징하는 자주색 선을 두르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관성제군보고, 조선 19세기후반,

관제신앙의 경전인 『관성제군보고』를 청색안료로 쓰고 그 위에 투명 유약을 입혀 구워낸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과화존신(過化存神), 조선 1880년,

고종의 명령으로 관제신앙의 경전들을 모아 한글로 옮겨 1880년(고종17)에 편집, 간행한 책이다. 번역자나 편집자는 알 수 없다. 원래 본문은 「각세진경(覺世眞經)」, 「구겁문(救劫文)」, 「부대련구(附對聯句)」, 「영험기(靈驗記)」, 「교유문(敎諭文)」, 「배심성훈(拜心聖訓)」 등으로 이루어졌으나, 이 책에는 「교유문」과 「배심성운」은 빠져있다. 관제신앙과 국어사 연구에 좋은 자료이다. <출처:중앙박물관>


무안왕묘비명(武安王墓碑銘) 탁본, 조선,

관우의 충절을 기려 제사 지내던 동묘에 1785년 정조가 세운 무안왕묘비를 탁본한 것이다. 비명은 정조가 직접 글을 짓고 전서(篆書)로 썼다. 맨끝에 정조 자신이 이 글을 짓고 써서 관제 제사때 악가(樂歌)로 쓰도록 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부적과 점
민간에서는 복을 구하는 것과 액을 막는 것이 가장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복받는 삶을 위해서 액(厄)을 피하고 신의 뜻을 살피는 점복(占卜)이 선시시대로부터 꾸준히 행해졌다. 이와 더불어 신의 뜻을 전달하고 귀신을 부리는 부록(符錄) 또한 유행했는데, 부(符)는 노란 종이에 붉은 색으로 쓴다. 반면, 록(錄)은 여러 부적 사이에 쓰는 비문(祕文)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점도구,

점을 칠 때 거북점 통 속에 든 엽전으로 양효(陽爻), 음효(陰爻) 6개로 된 주역의 64괘를 뽑아 점을 치는 도구이다. 거북 등에는 낙서(洛書) 혹은 별자리 무늬를 표현하였다. 점상, 조선 19세기, 기둥 아래 받침은 거북모양이고, 거북의 등에는 별자리 무늬가 음각되어 있어 점을 칠 때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옥추보경(玉樞寶經),

굿을 할 때 읽는 경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경국대전』에는 도류(道流)가 이를 읽는다고 하여 도서(道書)라고 전하고 있으나, 위서(僞書)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도류들이 이를 읽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주로 병굿이나 신굿과 같은 큰 굿에서 읽는데, 이 경을 읽으면 천리 귀신이 다 움직인다고 한다. <출처:중앙박물관>

당사주(唐四柱),

평생 운세를 글과 그림으로 설명해 놓은 책이다. 주역점에 비해 쉽고 삽화가 있어 조선후기 이래 민간에서 많은 판본이 간행되었다.

1.액박이 부적, 사람에게 12년 중 3년은 세가지 재앙이 드는데 이를 삼재라 한다. 삼재가 닥치면 머리가 셋이고 몸은 하나인 매를 붉은 물감으로 그려서 방문에 붙이거나 몸에 지니고 다녀 액을 막았다.
2.칠성부적, 칠성부를 몸에 지니면 재앙을 물리치고 복이 온다고 한다. 칠성부에는 상단 우측부터 자손에게 복을 주는 탐랑, 장애와 재난을 없애주는 거문, 업장을 소멸시켜 주는 녹존, 구하는 바를 얻게 해주는 문곡, 하단에는 모든 장애를 없애주는 염정, 복덕을 두루 갖추게 해주는 무곡, 수명을 연장시켜 주는 파군이 각각 표현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3.세화판(歲華板),

세화는 한 해 동안 질병이나 재난 등의 불행을 사전에 예방하고 행운이 깃들기를 기원하는 그림이다. 새해 첫 날 여러 사람에게 좋은 뜻을 전해주고자 목판으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 판에는 수복강녕(壽福康寧) 부귀다남(富貴多男) 등의 길상문자와 길상무늬가 함께 시문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순창 성황대신 사적 현판, 조선,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순창에서 성황신을 섬기던 일을 새긴 현판이다. 송판2장을 이어붙이고 총73행 1,600여 자의 글자를 새겼다. 1281년(충렬왕7)과 1297년(충렬왕23)에 작성된 성황신의 봉작(封爵0 및 존호(尊號) 문서와 1583년에 현판을 새기고 1623년과 1743년에 현판을 보수한 사실 등을 기록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왕신 관련 문서, 조선,

염라판관(閻羅判官)이 측신(厠神,뒷간신)에게, 그리고 종규(鐘馗)가 조왕(竈王)에게 각각 내린 전령 형태의 문서이다.

부뚜막 모양 부장품, 봉산 양동리 출토, 낙랑,

부엌의 신인 조왕신은 불의 신 혹은 부뚜막의 신으로 여겨졌다. 부엌 신의 역할은 집 안에 머물면서 집 주인의 과실을 낱낱이 기록한 뒤 하늘에 올라 옥황상제에게 고자질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조왕신이 여성으로 표현되는 데 반해 중국은 남성으로 표현되는 차이점이 있다. 이 유물은 무덤에 부장되는 명기로 방형의 아궁이에 굴뚝이 있으며 위에 2~3개의 둥근 구멍이 뚫려 있고 가마 모형과 그릇 모형이 놓여 있어 부엌 아궁이의 모습을 실감나게 묘사한다. <출처:중앙박물관>


성황신,

성황당에 모시던 것으로 전해지는 성황신도이다. 일성과 월성이 표현된 관을 쓰고 홀을 든 채 용이 장식된 의자에 앉은 모습이다.

깁진년 유월 초칠일 오시에 동방삭이 이 우물에서 나왔다. 정씨의 축원소이다.


「동방삭」을 새긴 팔각 간주석,

통일신라 때 간주석에 조선시대 사람들이 글을 새긴 것이다. 동방삭은 중국 한나라 때의 전설적인 인물로 불로장생을 상징한다. 일설에는 동방삭이 우물을 파고 지하세계로 내려가 영지초(靈芝草)를 먹었으며 신비한 세계에 오래 머물다 나왔다고 한다. <출처:중앙박물관>

재물의 신, 관성제군
용맹하고 의리 있는 장수였던 관우는 고향인 산시성의 상인들에 의해 재물신으로 모셔졌다. 원대(元代)를 거쳐 명청대에 관우의 인기가 높아지자 전쟁의 신이자 상인들의 재물신으로 각 지역에서 숭배되었다. 우리나라도 임진왜란 이후 관우신앙이 확산되었으며, 특히 상인들이 재물신으로 많이 섬겼다. 지금도 서울의 성제묘(聖帝廟) 등지에서 상인들이 관우제사를 지내는 등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관성제군성적지도(關聖帝君聖籍圖誌), 조선

중국 청나라에서 1693년 간행된 『관성제군성적도지』를 1876년(고종13)에 조선에서 증간한 것이다. 「관성제군성적지도」는 관우의 일생을 미화.윤색하여 그림과 함께 해설한 것으로서 관제신앙의 경전으로 사용되던 책이다. 책의 서문에서 박규수는 자신이 20세 무렵부터 관왕을 숭모해 왔으며, 거처할 때나 꿈속에서도 가르침을 받았다고 썼다. <출처:중앙박물관>

관성제군보훈상주, 조선 1882년,

중국 청나라의 길단(吉旦)이 옛 술사(術士)가 채록(採錄)했다는 관성제군의 말과 보충 설명을 적은 다음, 내용에 맞는 사례들을 그림과 함께 실어 놓은 책이다. 사람이 충효와 절의를 다하지 않으면 몸은 세상에 있어도 마음은 이미 죽은 것이라며, 선악에 대한 응보가 있을 것임을 강조하였다. 1731년에 처음 간행한 것을 1882년에 다시 간행한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관성제군명성경언해, 조선,

관제신앙의 경전을 한글로 풀이한 책으로, 고종의 관우신앙 강화책의 일환으로 1886년에 간행되었다. 한문본은 1855년(철종6)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며, 언해본은 1883년 간행 후 여러 차례 출판되었다. 한문 구절마다 한글로 언해와 주석이 붙어 있다. 분향하고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독송하면 모든 재앙이 사라지고 복이 오며, 효도와 공경이 인륜도덕의 근본이고 악을 행하면 반드시 갚음을 받는다고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장수의 신.수성노인, 조선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별인 수성 혹은 남극노인성을 인격화한 그림이 바로 수성노인도이다. 장수를 상징하는 수성노인은 단독으로 그려지거나 혹은 복(福)을 담당하는 복성(福星), 관직 출세를 담당하는 녹성(祿星)과 함께 삼성도(三星圖)의 형태로도 그려졌다. <출처:중앙박물관>


학문의 신, 문창제군(文昌帝君), 김덕성, 조선,

문창제군은 북두칠성의 국자 머리 바깥쪽에 위치한 여섯 개의 별로 이루어진 별자리 문창성을 신격화한 것으로, 문학과 교육, 학문의 신이며 특히 과거를 치르는 사람들의 수호신으로 여겨졌다. 문창성은 일반적으로 괴성(魁星)이라 불리며 붓과 벼루를 들고 왼 쪽 다리를 번쩍 치켜들어 북두칠성을 차고 있는 듯한 형상으로 묘사된다. 문창제군에 대해서는 당대의 장아(張亞) 대신이었다는 설 등 여러 주장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문창성을 묘사한 자수 붓 주머니

도교가 현대사회의 많은 문제에 해답을 줄 것으로 기대하는 것도, 도교를 미신과 동일시하며 과격하게 부정하는 것도 적절한 시선은 아니다. 도교문화는 엄연한 우리 역사의 일부분이었고 세시풍속이나 민간신앙, 예술과 대중문화, 심신 수련 등 우리 삶의 여러 영역에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다. 오늘에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우리 문화의 깊은 연원,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다양한 삶의 방식의 일부분을 들여다 보는 매개체로서 이번 전시가 자리매김 되길 희망한다. <출처:중앙박물관>

부귀에 얽매여 서로 다투는 혼란한 세상에 몇 사람이 날개를 친다 해도 오묘한 진리 속에 흘러가는 우주의 법칙은 어찌 한 치인들 바꾸어 놓을 수 있겠는가!
산속에 들어가야만 반드시 도를 터득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도를 닦으려 하면 반드시 산림 속에 들어가서 경건한 마음으로 비린내 나는 세속을 잊으려 하면 곧 맑고 조용한 마음이 된다.
석실 깊숙하게 들어가 정신을 집중하여 귀신을 부르려고 하면, 이미 말다툼 따위는 피하고 정숙하지 않으면 안되며 선약을 제련면 말 많은 우인들을 멀리해야 한다.
『포박자(抱朴子)』

함께 하는 도교 – 도교와 유교, 불교 그리고 동학
고대부터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는 도교와 유교.불교가 삼교(三敎)로 일컬어지며 중시되었다. 국가 차원에서 도교 제사를 많이 지낸 고려시대에는 개인이 도교적 지식을 갖추고 신선처럼 생활하는 것이 큰 미덕으로 여겨졌다. 도교의 지위가 크게 낮아진 조선시대에도 삼교의 어우러짐을 형상화한 문학이나 회화작품이 만들어졌다. 그런하 하면 저명한 유학자들이 『도덕경』이나 『장자』를 학문적으로 탐구하기도 하였다. 한편 도교는 불교와 상호 영향을 주고 받았다. 당초 도교의 조직체계나 의례는 불교의 그것을 본뜬 것이었고, 고려시대에는 사망한 불교 승려의 매지권(買地券)에 서왕모.동왕공, 황천(皇天).후토(后土)와 같은 도교 신들이 등장하였다. 고려나 조선의 치성광여래도(熾星光如來圖)와 같은 불화에는 도교의 신들이 불법의 수호신으로 묘사되기도 하였다. 도교는 19세기 말에 서학(西學)에 대응하여 창시된 동학(東學)의 전파에도 영향을 미쳤다. 선약(仙藥), 주문(呪文), 장생(長生)과 같은 도교적 용어나 개념이 사용됨으로써 동학이 일반 백성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