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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테마전, "중국법첩"] 법첩속의 중국 서예(~남북조시대)

법첩(法帖)이란 옛 명필의 글씨를 익히거나 감상할 목적으로 모범이 되는 글씨의 모사본이나 탑본(榻本) 등을 책으로 만든 것이다. 10세기 중엽 중국 남당(南唐)에서 처음 법첩을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것 중 가장 유명하면서 오래된 것은 송나라때 왕의 칙명에 의해 만들어진 『순화각첩(淳化閣帖)』이다. 이는 역대 제왕과 명신, 진나라 왕희지와 왕헌지의 글을 집대성하여 만든 것으로 실제로는 왕희지의 글씨를 감상하고 익히는 서예 교본이었다. 법첩은 옛 명필의 글씨를 감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진품 글씨를 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법첩에 대한 연구를 통해 학문체계로 발전했으며, 이런 분위기는 명.청대까지 이어졌다. 청나라때에는 법첩이 오랜 세월 동안 글씨가 모각을 되풀이하면서 원형에 멀어졌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원본에 가까운 고대 중국 비석(碑石)을 연구하는 비학이 크게 발전하였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인쇄술의 발달로 더이상 전통적인 법첩은 제작되지 않고 있지만, 서예를 익히는데는 아직까지 많이 활용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1014년 겨울 “중국법첩(中國法帖)”이라는 제목을 특별전시를 개최하였다. 전시에서는 왕희지를 비롯하여 중국 역대 명필들이 쓴 글씨와 대표적인 법첩인 『순화각첩(淳化閣帖), 북송 992년』을 비롯하여 다양한 법첩을 살펴볼 수 있다. 전국시대 돌에 새겨진 가장 오래된 글씨인 “석고문(石鼓文)”을 비롯하 다양한 글씨체와 서예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명필들의 글씨를 체계적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

2014년 겨울 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테마전 “서예의 길잡이, 중국법첩”.

서예 발전의 역사를 쉬우면서도 간략하게 알 수 있게 해주는 전시회였다.

중국의 서예가.

순화각첩(淳化閣帖), 북송 992년.

서예의 역사에서 가장 잘 알려진 각첩으로 현재까지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한다. 이후 각첩제작의 모범이 되었다.

중국 최초의 법첩은 오대십국(907~960) 남당(南唐, 937~975)에서 제작된 『승원첩(昇元帖)』이며, 역대 글씨를 정리한 최초의 집첩(集帖, 전집 법첩)은 북송 태종 순화 3년(992)에 제작된 『순화각첩』이다. 『순화각첩』은 법첩 제작의 기준이 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태산 금강경(泰山 金剛經), 북제(北齊, 550~577년), 해서.

태산 계곡 바위에 새겨진 글씨

산둥성(山東省) 태산 경석욕(輕石峪)에 새겨져 있는 금강경은 총1040여 자인데, 그 중 12자의 탑본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수많은 서예가들은 이 거대한 너럭바위의 금강경 글씨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탑본은 주로 먹물로 하지만 이렇게 주묵(朱墨)으로 하는 경우도 있다. 자연에 새겨진 마애각석(磨崖刻石) 및 비석 글씨를 담은 비첩(碑帖)도 넓은 범주에서 법첩과 같은 의미로 여겨졌다. <출처:중앙박물관>

법첩속의 전서(篆書)와 예서(隸書)
서예는 한자 서체를 달리해가며 각 시대의 미감을 반영하였다. 전서는 두가지로 나뉘는데, 형태가 상형(象形)에 가깝고 획 굵기가 균일한 초기 서체인 대전(大篆)과 이를 좀 더 정리하고 변화를 준 소전(小篆)이 있다. 전서에 이어 예서가 등장하면서 필선(筆線)의 변화와 조형성이 풍부해져 서예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여기 소개하는 법첩은 모두 비석의 글씨를 탑본하여 만든 비첩(碑帖)으로, 초기 한자 서체(書體)인 전서와 예서를 볼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석고문(石鼓文), 전국시대(기원전 403~기원전 221년), 전서 대전(篆書 大篆),

전국시대의 것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글씨다.

북모양의 돌에 새겨진 글씨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중국 석각(石刻) 문자로, 사냥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주나라 때 제작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재는 전국시대 진(秦)대의 것으로 보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권량명(權量銘), 진(秦, 기원전221~기원전206), 전서 소전,

무게와 부피를 재는 저울인 권량에 새겨진 글씨이다. 중국 통일 후 진시황은 나라마다 서로 달랐던 복잡한 대전(大篆)을 정리하였는데, 이것이 소전이다. 소전의 서체는 비석(碑) 뿐 아니라 이와 같은 권량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노나라 효왕의 각석, 노효황각석(魯孝王刻石), 전한 기원전56년, 예서

노효황각석은 전한 선제(宣帝) 오봉 2년(기원전 56년)에 노나라 효왕이 영광전(靈光殿)의 완성을 기념하여 건물벽에 붙였던 정초석(定礎石)이다. 여기에 새겨진 것은 고예(古隸)로, 형태는 예서이나 필획은 전서에 가깝다. <출처:중앙박물관>

사신비(史晨碑), 사신후비史晨後碑), 후한 169년, 예서.

후한시대 예서를 대표하는 글씨라 한다.

후한 건녕 2년(169) 노나라의 재상 사신이 공자묘(孔廟)의 제사를 성대히 행한 것을 기념하며 세운 비석이다. 사신비는 후한의 예서를 대표하는 비석으로 특히 고박(古撲)한 맛을 지닌 글씨로 평가받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예술의 경지를 이룬 명필 서예가
예서에서 한층 더 변화하여 오늘날 우리가 쓰는 표준 서체인 해서(楷書)가 탄생하였다. 행서(行書)와 초서(草書)는 부드러운 붓으로 흘려 쓴 서체로 글씨의 아름다움을 더욱 다채롭게 표현하였다. 서체가 정리되고 체계화되면서 서예가의 시대가 도래하여 명필들이 등장하였다. 여기 소개하는 법첩에는 장지(張芝,?~192년), 종요(鍾繇, 151~230년)와 같은 초서와 해서의 대가들과 서예의 예술 경지를 개척한 왕희지(王羲之, 303~361년)의 글씨가 담겨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수선비(受禪碑), 삼국시대 위(魏, 220년), 예서.

왕희지 글씨 이전에 최고의 글씨로 여겨졌다고 한다.

삼국시대(220~280년)의 위나라 조비(曹丕,187~226년)의 황제(文帝) 등극에 관한 기록으로 수선표(受禪表)라고도 한다. 한의 예서를 잘 계승한 위나라의 대표적인 예서로 평가되며, 당(唐) 예서 발전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선시표(宣示表), 삼국시대 위(221년), 종요(鍾繇, 151~230년), 해서.

왕희지와 함께 서예의 대가로 알려진 종요가 쓴 글씨이다. 오늘날 볼 수 있는 정자체에 가까운 글씨이다.

선시표는 남방(南方, 오)의 손권(孫權, 182~252년)을 잘 견제하여 잘 대처해야 된다는 내용으로 종요의 해서 중 가장 유명하다. 종요는 왕희지와 함께 ‘종왕(鐘王)’으로 일컬어질 만큼 해서의 발전에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단아한 글씨는 육조시대(六朝時代) 서풍(書風)이라 하여 남조(南朝) 글씨의 기반이 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난정서(蘭亭敍), 동진 353년, 왕희지(王羲之, 303~361년), 행서.

중국 서예을 대표하는 왕희지의 대표적인 글씨이다.

회계현(會稽縣, 지금의 저장성 소흥현) 난정(蘭亭)에 모여 명사들이 지은 시집의 서문으로 왕희지가 쓴 글이다. 당태종의 지시로 만들어진 당 서예가들의 임모본이 전하며, 이 탑본 법첩은 그 임모본을 바탕으로 후대에 모각된 글씨이다.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 당 672년, 왕희지, 행서(집자).

왕희지의 행서를 집자한 비(碑)로 다양한 흘림체의 변화를 볼 수 있다. 현장(玄奘, 602~664년)의 불경 번역 후, 태종이 하사한 「대당삼장성교서」, 태자 이치(李治, 628~683년)의 「대당삼장성교서기(大唐三藏聖敎序記)」, 그리고 현장 번역의 「반야심경」으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법첩의 모사 방식, 법첩을 만들기 위해 글씨를 정확하게 모사하는 방법
1. 모서(摹書): 친필 위에 종이를 깔고 글씨를 직접 덧써서 본 뜨는 것.
2. 임모(臨摹): 친필을 옆에 놓고 특징을 정확히 관찰하여 옮겨 쓰는 것.
3. 탑모(榻摹): 윤곽선만 베끼고 안쪽을 먹으로 메우는 것
4. 모각(摹刻): 모사한 글씨를 돌이나 나무판에 옮겨 새겨셔 탑본(榻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

한진석각묵영(漢秦石刻墨影, 모서), 중국 1915년, 나진옥(1866~1940)

청나라 문자학자 나진옥(羅振玉)이 한(漢)과 진(秦)의 석각(石刻) 글씨를 정리한 책으로 글씨 테두리를 그대로 그려 글씨형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종이를 대고 글씨의 형태를 본뜨는 모서(摹書)의 기초단계인 이 모사방신은 탑모(榻摹)로 발전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완화유수첩(浣花流水帖, 탑모), 원 13세기 후반, 조맹부(趙孟頫, 1254~1322년), 행서

유려한 행서로 쓴 전당시(全唐詩) 법첩으로 두보(杜甫, 712~770년)와 왕유(王維, 701~761년) 등의 시 여덟 수가 수록되어 있다. 이 법첩은 글씨의 윤곽을 베끼고 안쪽을 먹물로 메우는 탑모방식 모사본이다. 이 모사방식은 친필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섬세한 표현도 가능하다. <출처:중앙박물관>

완화유수첩(浣花流水帖, 모각), 원 13세기 후반, 조맹부(趙孟頫, 1254~1322년), 행서

이 법첩은 옆의 탑모 법첩과 다른 모각(摹刻)방식으로 제작한 법첩이다. 모각은 글씨를 나무판에 새겨 탑본하는 방법으로, 제작이 쉽고 많이 만들어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임서 난정서(臨書 蘭亭敍, 임모), 동진 353년, 왕희지, 행서

<난정서>를 임서한 조선시대의 작품이다. 문인들은 <난정서>가 지닌 청담(淸談) 이미지를 동경하여 이를 즐겨 임서하였다. 임모는 글씨를 옆에 놓고 관찰하고 이를 정확히 재현하는 임서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므로 서예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주로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난정계회도(蘭亭禊會圖), 명 16세기, 전 당인(唐寅, 1470~1524년)

난정계회도 중 곡수에 술잔을 띄워 돌리는 장면.

왕희지의 난정 계사모임은 시와 문학 그리고 그림으로 끊임없이 표현되어 온 주제였다. 곡수(曲水)에 술잔을 띄워 돌리며 시를 짓던 당시의 정경을 섬세하게 담은 이 그림은 명의 문인화가 당인이 그렸다고 전한다. <출처: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은 역대 중국 서예가들의 글씨를 담은 법첩을 엄선하여 테마전 “서예의 길잡이, 중국법첩”을 마련합니다. 법첩은 모범이 되는 글씨의 모사본(模寫本)이나 탑본(榻本) 등을 옮겨 사람들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책 모양으로 장정(裝幀)한 것을 말합니다. 이번에 소개하는 법첩은 중국 역대 명필을 담은 것이며, 우리 조상이 서예를 공부하는 데 있어 늘 가까이 한 것들입니다. 법첩은 현재에도 서예 학습 교재로 사용되며 감상의 대상으로서 수장(收藏)과 보존으 가치를 지닙니다. 선대의 명필은 법첩을 통하여 후대로 전승되며, 원본이 없어지게 되더라도 법첩으로 옛 글씨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친필을 대하듯 우리 선조가 아끼고 사랑하며 연마했던 중국법첩을 통해 서예의 또 다른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기회가 되길 기대합니다. <출처:중앙박물관>

서예의 길잡이, 중국법첩(中國法帖)
법첩(法帖)은 옛 명필들의 글씨를 모사하거나 탑본하여 만든 서첩이다. 법(法)은 ‘모범’, ‘모범으로 삼다’는 뜻이며, 첩(帖)은 무엇을 붙이거나 써넣기 위해 묶은 책을 뜻한다. 법첩은 명필의 글씨를 안전하게 보존하며 감상하기 위해 글씨를 모사(模寫)하여 부본(副本)을 만드는 것으로, 이를 보다 편리하게 감상하고 보관할 수 있도록 책 모양으로 만들면서 발전하였다. 법첩을 통해 옛 명필의 글씨를 감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작품이 없어졌을 때에는 진품의 글씨를 확인할 수 있어 옛날에 만든 법첩일수록 특히 수장(收藏) 가치가 높다. 또한 법첩은 서예의 중요한 교재가 되기도 하였다. 법첩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바탕으로 첩학(帖學)이 학문체계로 발전하였으며, 법첩 제작도 활기를 띠었다. 법첩 애호의 분위기는 명(明)을 지나 청(淸) 가경(嘉慶,1760~1820년) 연간까지 융성했다. 이후 서예의 전통을 북위(北魏) 비석에서 찾아야 한다는 완원(阮元, 1764~1849년)의 「북비남첩론(北碑南帖論)」을 바탕으로, 법첩의 글씨가 모각을 되풀이하면서 글씨의 원형에서 멀어졌다는 비판를 받았고 상대적을 낮게 평가되었다. 반면 고증학(考證學)과 금석학(金石學)을 기반으로 고대 중국 비석을 연구하는 비학(碑學)이 발전하면서 비석(碑石)을 탑본한 비첩(碑帖)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런 가운데 근대적 인쇄 기술의 등장으로 전통적인 법첩은 더이상 제작되지 않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법첩과 비첩을 모두 법첩이라 부르며 특히 서예 학습에서 광범위하게 활용된다. <출처:중앙박물관>